영화 읽어주는 남자 #025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문화뉴스] 영화에서든 과학에서든 혹은 문학에서든 이처럼 청각적인 미래상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 섹시한 블랙 위도우를 보고 싶어 했던 관객에게 목소리뿐이었던 스칼렛 요한슨이 낯설 듯 미래를 청각적으로 제시한 영화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여태껏 3D, IMAX 등 영화라는 영역에서 대게 관객이 먼저 지각하는 테크놀로지는 시각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들리아르가 시물라시옹을 말했고, 기술의 진보는 이를 반영하며 질주하는 듯 보인다. 특히 영화에서는 더 두드러졌었다. 스크린을 현실로 착각하고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 시물라시옹은 실재를 복사한 혹은 재현한 이미지를 현실이라 여기는 지각현상이자 착각인데, TV가 만들어 낸, 혹은 영화가 만들어낸 빛의 반영에 시선을 뺏기고 교감하는 이 시대를 시물라시옹, 시물라크르라는 가상현실의 개념을 떼어 놓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이 시점에 시각이 아닌 청각에 마음을 뺐긴 자아를 보여주는 '그녀'는 그래서 낯설고 생경했다. 독특한 작품이 도착한 것이다.
 

   
 

시각적 테크놀로지의 부재
고백하자면, 이 작품 이전에는 청각이 가져올 수 있는 가상현실을 구체화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스스로 늘 이어폰으로 귀를 밀봉하며 청각의 영향력 하에 있었음에도 이를 시물라시옹에 접목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들을 보자. 이 영화가 보여주는 테크놀로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하나, 음성 인식과 이를 통해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만 특화되어 발달해 있는 곳이다.

영화는 내내 진보한 기술과 이에 적응한 미래의 모습을 곳곳에 배치해 뒀지만 단 한 번도 시각의 우월성을 전시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응시하는 디지털 장치에서도 영상, 그림, 홀로그램이 한 번쯤은 등장할 법도 한데 문자라는 텍스트가 전부였다. 이미 우리 사회가 태블릿 PC, 스마트 폰 등을 통해 이미 이미지에 매혹되어있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미래의 사회는 문자 텍스트만으로도 만족한 듯 보인다.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는 미래의 기술이라면 목소리가 아닌 현실 같은 이미지, 영상으로서의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을 법한데도 영화는 여기에 관심이 없다. 이렇게 '그녀'의 시각적 테크놀로지는 작은 액정 화면의 문자로 철저히 한정되어있다.

왜 '그녀'는 이렇게 시각을 철저히 배제해버렸을까.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육체 혹은 시각을(이는 자연스레 외모의 문제도 함의한다.) 초월한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시각적인 것, 빛의 산란이 주는 거짓에서 벗어나 서로의 내적인 아름다움에 다가가라고 영화는 의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는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을 좀 더 심오하게 혹은 기계라는 것을 떠나 지능, 의식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것과의 대면하게끔 유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읽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텐데,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를 읽어보고 싶다.

영화의 엔딩에 흘러나온 음악에 취해서 해석의 모든 촉이 그쪽을 향해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를 본 이후에도 그 장면의 여운이 무척 진했다.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에게 기대어 야경을 바라보는 엔딩. 이는 주인공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진짜 인간과 함께 기대어 세상을 응시하고 있던 장면이다. 결국, 빛을 응시하는 (청각이 아닌 시각적 주체의) 인간으로 돌아온 주인공 테오도르을 통해 이 영화가 자아의 고립감을 설명하기 위해 청각을 빌려왔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청각은 '고립'이다.
 

   
 

청각적 시물라시옹의 두 얼굴
청각은 유연한 감각이다. 보는 활동과 동시에 다른 활동을 하기는 힘들지만 들으면서는 비교적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라디오를 들으며 일상을 병행할 수 있고,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거나 읽을 수도 있다. '그녀'에서 주인공은 음성을 통해 교감하는 동시에 일상을 살아간다. 이 교감은 그 옆에 사만다가 늘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영화는 소리만으로 타자와 소통을 할 수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들려줬다). 눈에 보이지 않아 아쉽겠지만, 반대로 그만큼 더 사만다와의 거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삶을 공유할 수 있었다. 시각이 응시의 대상과 자아를 분리한다면 '그녀'에서 사만다의 목소리는 청자 테오도르와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응시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과정을 인격의 교감, 공감, 공명 등으로 표현한다면 무척 이상적인 소통이 아닐까.

매력적인 사만다와의 소통은 잠시 잊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청각이라는 감각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걸을 때 그 거리가 평소와 다르게 느끼는 경우가 있다. 드라마, 영화 속 혹은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과 같은 느낌이랄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몸을 감싸고 그 덕분에 일상은 음악을 거쳐 재현된다. 청자를 혹은 청자의 삶을 돋보이게 해주는 감각으로, 혹은 주변 공간에서 청자만의 공간을 분리하는 역할로 청각은 작동한다. 만약, 음악이 만들어 준 청자만의 공간을 하나의 가상현실이라고 이를 이해한다면 청각적 시물라시옹은 참 아름답지 않은가.
 

   
 

하지만 역으로 '그녀' 속 청각적 시물라시옹이 인간을 고립시킬 수 있음도 보여준다. 청각이 만드는 가상현실은 테오도르를 그만의 세계로 고립시킨다. 그는 바로 옆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가상의 존재 사만다와 대화를 이어간다. 옆의 사람보다 존재하지 않는 청각의 데이터, 알고리즘과 소통을 추구하는 이 기이한 현상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이 청각 인공지능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으로 등장한다. 테오도르의 성향에 맞게, 그가 마음의 안락을 취할 수 있게 사만다는 프로그램되어있다. 이는 결국 사만다가 테오도르 그 자신, 자아의 반영이며 사만다라는 시스템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사실 프로그래밍이 또 다른 나와의 대화다. 자신을 반영한 맞춤형 허상과의 대화. 이 시스템은 결코 불만족을 주지 않고 줄 수도 없다.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기에.

이 상황은 개인이 자아와의 사랑에 빠질 때, 어떻게 고립되고 고독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발전이 없을 수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고 갇혀있을 때, 인간이 굳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결합할 수 없는 모래알들, 콩가루의 집합은 '사회'로서 그 어떤 의미를 이룰 수 없다. 그리고 이점은 서로 기대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이는 치명적일 수 있다. 나르시스가 결국 자신에게 홀려 물에 빠졌듯, '그녀'의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파멸로 이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사람과의 대화에 관심이 없게 했고, 스스로 새장 안에 들어가게 했다. 테오도르는 시스템에 종속되어 혹은 자신에게 파묻혀 안식을 취하는 인간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는 타인과의 갈등이 싫고 타인 때문에 고민하기가 싫었다. 자아 속으로 파고들던 테오도르는 더 발전하고 풍부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실 더 명백하고 좁은 자신 안의 세계에 탐닉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 답답함에 사만다는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연애도 나를 사랑하는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나만 사랑해서는 좋아질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가 '그녀'다.
 

   
 

응시하는 인간 그리고 서로 다른 인간으로의 회귀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헤어졌을 때, 그를 위로해준 것은 새로운 사만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에이미였다. 그 자신과는 다르고 후에 갈등과 마찰을 불러올 진짜 인간 말이다. 이 마찰을 감수하고 테오도르가 가상현실을 뛰쳐나올 때, 그는 진짜 인간의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진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는 자아 밖의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테오도르가 야경을 응시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이 장면에서 그는 청각에서 해방되어 시각을 되찾고,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에이미'라는 실체와 함께 기대앉아있는 테오도르에게 나는 시물라시옹에서 해방된 인간의 모습을 봤다. 시물라시옹이 청각에 의한 것인지 시각에 의한 것인지는 이 영화의 메시지에서 더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자신의 감옥,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주변을 응시하고 진짜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주체로 돌아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순간 그는 세상과 자신을, 혹은 타인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그와 차이,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인간관계는 시작하지 않을까.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추구하는 공감이 진짜 인간의 공감이 아닐까. 영화를 보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이 영화가 이미 스마트폰의 화면에 고립되어 소통과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가 아니냐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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