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26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위플래쉬'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음악에 압도당한 영화
풍선이 터지듯 영화가 끝났다. 그리고 강렬한 재즈의 선율이 영화관을 나선 관객과 꽤 긴 시간 동행한다. '위플래쉬'는 근래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 중 가장 강렬히, 그리고 깔끔하게 끝나는 영화다. 깔끔하다는 표현은 강렬한 한방으로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선을 긋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한방은 진한 여운까지 준다. 그 여운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이 여운을 가진 채로 '위플래쉬'를 영화를 읽는 시도는 삼가야 할지도 모른다. 음악이 주는 황홀함이 영화를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만큼 압도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기에.

음악에 압도당한 느낌 자체만으로도 홀렸던 영화이지만, 관람 이후에 플렛처 교수(J.K. 시몬스)에 대해 주고받는 의견들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 영화가 얼마나 좋은 영화로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으로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과 더불어 영화를 본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말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참 좋은 영화라 생각해본다. 덕분에 읽어보고 싶어진 영화. 이 글은 '위플래쉬'가 내게 보여준 마지막 한 방(연주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도가 될 것이다.
 

   
 

음악적 성취를 향한 예술가의 고난
(1) 두 개의 문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한 청년이 방 안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카메라는 그를 향해 다가가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위플래쉬'에 대한 다양한 글들은 이 초반부 카메라 워킹에서 '시점'에 주목하고 있는데(카메라는 플레처 교수의 시점으로 읽을 수 있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플렛처가 문을 넘어 앤드류(마일즈 텔러)의 공간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와 대칭을 이루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다. 미친 듯 드럼을 연주하는 앤드류를 문 뒤편에서 응시하는 그의 아버지(폴 레이저)는 차마 문을 넘지 못한다. 이 문은 아버지가 서있는 곳과 아들이 속한 세계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이 발 딛고 서있는 공간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울지 모르나, 그들의 간격은 굉장히 멀어 보인다. 앤드류는 친아버지의 공간에서 빠져나왔고, 플렛처를 새로운 공간에서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듯하다. 어쩌면 이 영화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학적 아버지의 대결이고, 생물학적 아버지의 패배라는 비극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 사회학적 아버지의 목표
플렛처라는 아버지의 목표는 자신의 아들(제자)이 찰리 파커와 같은 전설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연습을 시키고, 모욕을 주며 끝없이 채찍질한다. ('위플래쉬'(Whiplash)는 앤드류가 연주하는 곡의 이름이자 채찍질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여러 가지로 참 적절해 보이는 제목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이를 예술가에게 필요한 순간이자 고난이라 말한다.

이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관객에게 남겨진 몫이다. 플렛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자를 훈련했지만, 결과적으로 앤드류는 음악적 성장을 이뤄냈다. 비인간적인 방법과 성공적인 결과. 이 두 가지 사실의 간격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플렛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앤드류는 혹독한 길을 견뎌냈고, 예술적 대가의 길이 쉽지 않으며, 그 길에는 어떤 숭고함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줬다. (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꺼내겠다.)
 

   
 

(3) 성취에 대한 오독
앤드류를 통해 관객은 예술을 향한 험난한 고난과 이를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를 보고 느낀다. 그리고 이 과정에 있었던 플렛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고 했다. 모든 의견이 가능하며,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견제하고 싶은 수용자와 감상이 있다.

플렛처를 한 청년의 성장을 이뤄낸 진정한 스승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특정 정치인들이 플렛처에 감정을 이입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현재 국가의 어려운 상황이 국가의 발전을 위한 과정이며, 이 과정을 이겨내야만 국가적 성취를 이뤄낼 수 있음을 주장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무시무시한 오독이 될 것이다. 그들의 정치는 모두 옳은 것이고 추구되어야 하는 과정이라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할 때, 그것을 진정으로 믿어버리면 어떨까. 그들을 향한 정당한 비판에도 귀를 닫아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른이 된 소년
(1) 취향이 아닌 선언

'위플래쉬'에서 앤드류가 타인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드물다. 영화는 앤드류의 다양한 행위 중 음악과 관련된 것만을 집중해 보여준다. 그래서 음악과 무관한 장면, 아버지와 영화를 보며 팝콘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팝콘과 초콜릿을 섞고 난 뒤 앤드류는 팝콘만 먹겠다고 한다. 처음엔 그의 취향으로 보였다. 동시에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듯 가고 싶은 길을 가겠다는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로 생각했다.

그런데 앤드류는 왜 단맛의 초콜렛이 아닌 짠맛의 팝콘만을 골라먹으려고 했을까. 달콤한 인생이 아닌 짠맛이 나는 인생을 원하는 괴짜였을까. 영화를 통해 그는 쉬운 길이 아닌 '버드'라는 이상향을 향해 고단한 길만을 선택하는 독한 모습을 보여준다. 팝콘과 초콜릿이 보여준 그 대화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에서 단맛만을 쫓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독한 선언이자 마음가짐이었다.
 

   
 

(2) 어른이 된 앤드류 그리고 포르노
'위플래쉬'는 소년이 어른이 되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다. 어른을 성숙해지고 인생의 쓴맛을 알아간다는 성장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더 한국적으로 읽어보려고 한다. '어른'이라는 한글 단어의 유래는 흥미롭다. 이 단어는 옛말 '얼다'에서 유래한 말로, '얼우다'의 어간 얼우-에 사람을 뜻하는 '이'가 붙어 '얼운이'가 되었고, 이것이 '어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다'는 '남녀가 관계를 맺다'라는 뜻의 말이었다. 결국, 어른은 잠자리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면 '위플래쉬'와 '어른'을 어떻게 엮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음악이라는 겉옷을 걸친 포르노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앤드류가 드럼을 칠 때 흐르는 땀방울은 어딘가 외설적이다. 그 땀이 드럼을 적시고, 드럼은 격렬히 운동하며 격한 음성을 토해낸다. 그리고 그의 표정 역시 절정에 이른 남자의 표정을 연상시킨다. 에로틱한 장면이 연상되도록 앤드류의 드럼 연주 장면은 연출되었다.

이 관점을 더 확장하면, 여자친구였던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이 있다. 앤드류는 그녀와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지만 찰리 파커처럼 되기 위해서 그녀를 포기한다. 이 장면은 대가의 길을 가기 위한 한 남자의 고독한 선택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앤드류의 연주를 포르노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설정을 가져온다면 다른 시선에서 이 장면을 볼 수 있다. 앤드류는 두 여자(음악과 니콜) 사이에서 한 여자를 선택하는 남자이고 '위플래쉬'는 삼각관계를 보여주는 로맨스가 된다. 그는 니콜과 관계를 통해서 어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더 의미가 있는(물론 더 혹독한) 음악과 관계를 맺고 어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번외로 앞의 가정, 음악-앤드류-니콜이라는 구도를 조금 변형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구도에서 음악이라는 자리에 플렛처 교수를 대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플렛처-앤드류-니콜의 삼각관계로 '위플래쉬'를 봐도 다양한 해독이 가능할 것이다. 가학적인 남성과 피를 흘리면서까지 인정받으려는 소년. 그리고 결국 살며시 미소를 보내는 플렛처의 모습에서 동성애 코드를 대입시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며…. 어쩌면 '그래비티'와 가장 닮은 영화
2013년 '그래비티'를 영화관에서 관람한 후에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비티'는 영화가 TV 동시상영이 가능하고, 다운 받아서 집에서 볼 수 있는 시대에 여전히 영화관의 존재 의미를 말해주는 영화였다. (테크놀로지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본다는 게 아니라 우주를 체험한다는 느낌을 줬던 영화였고, 영화관에서 몰입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던 영화였다.

그리고 '위플래쉬'를 보면서 영화관과 음악의 조합도 환상적일 수 있음을 봤다. 그리고 이 경험은 꽤 강렬한 것이기에 다른 음악영화를 기다리게 한다. '레미제라블' 역시 음악이 강조된 영화였지만 그때와는 또 다르다. '위플래쉬'는 음악을 체험할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 시대에 영화관이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이유를 보여줬다.

'위플래쉬'는 마지막 앤드류의 연주 한방이 줬던 마취가 풀리면 점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화다. 지금 이 글을 쓴 뒤, 훗날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플렛처 교수처럼 무자비하게 이 영화에 비판의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이 영화는 음악이 준 강렬함으로, 그리고 예술적 성취를 위해 고난을 견뎌낸 한 남자에 대한 경외심, 숭고함으로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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