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이와삼의 작가 겸 연출가 장우재 인터뷰

   
지난 달 5일 예술의전당에서 본지와의 인터뷰를 가진 작가 겸 연출가 장우재


[문화뉴스]
"미안하지만 우린 다 죽습니다."

극단 이와삼을 이끌어가는 작가 겸 연출가 장우재는 말한다. 우린 모두 죽는다고 말이다. 그는 시공간적 한계를 직면할 수밖에 없음에도 무한하기를 바라고, 무한한 줄로 알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꼬집었다.

극단 이와삼은 긴밀하고 섬세하다. 그들의 연극을 보고 있노라면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실제로 지난 6월 연극 '햇빛샤워'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바 있기도 하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실체를 모방하는 단계가 사라져버린 상황을 시뮬라시옹이라 일컫는다. 그들이 하는 연극은 비현실적인 소재들을 주로 다룬다. 극은 있음직한 일들, 혹은 우리 주변에서 평범하게 일어나는 일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극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일들이 버무려져 있는 현실 가운데, 우리가 그리는 현실은 언제나 질서 정연함과 합리를 내세우는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극단 이와삼과 장우재는 인간과 세상을 아우르고 있는 여러 현상들의 본질을 꿰뚫고자 하기에, 그런 우아한 자태를 버리기에 겁내지 않는다. 지난 5일, 예술의전당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현실과 연극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봤다.

 

   
 

이름에는 대상의 본질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극단 '이와삼'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셨나?
ㄴ 많이들 물어본다. 지금은 간단하게 2는 음과 양, 3은 천지인이라 얘기한다. 2003년도에 지어진 이후, 이 이름에 '투 스트라이크 쓰리 아웃'이라는 의미가 붙기도 하고, '두 세 명만 있어도 된다'는 의미도 붙었다. 이렇게 이름에 대한 여러 의미가 붙어가는 것이 참 좋다. 요즈음에는 이름 따라 MT도 2박 3일로 가자고 얘기한다(웃음).

우실하 교수의 '전통문화의 구성 원리'라는 책에서, 우리나라의 전통미학은 2수 분화적 세계관, 곧 이성적이며 정착적이고, 농경중심적인 세계관과 3수 분화적 세계관, 곧 초월적이고 유목적인 세계관이 한반도에 섞여 있다고 말한다. 인상 깊은 대목이었다. 그래서 극단의 이름을 '이와삼'이라고 붙이게 됐다. 분별과 포용을 섞으려고 하는 위치에 우리 극단이 있다. 이것은 내 잣대기도 하다. 작품을 보면서도 분별과 포용이 섞여 있는지 보게 된다. 보통 극단 이름은 지향성을 나타내지만, 우리는 이름 자체가 중립적이다. 이게 더 오래가고, 효용적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참 많이 아끼는 이름이다.

장 연출의 이름도 궁금하다. '장우재'는 본명이 아니고, '장경순'이라는 본명이 따로 있다.
ㄴ 장경순이라는 이름은 여자 같다. 어머니가 중학교 때 집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장우재'라는 이름을 지어오셨다. 살다 보니 장우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순간이 많아졌다. 개명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장우재와 장경순의 사이에 있는 것이 바로 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둘 다 내가 평생 가져가야 할 이름인 것 같다.

 

   
오는 22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하는 연극 '환도열차' ⓒ 예술의전당

극단 이와삼의 창단 계기가 궁금하다.
ㄴ 내가 원래 조직을 싫어한다. 소속이나 규정이 싫다. 어떤 선배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은 사람들이 극단을 만드는 것은 노동자가 조합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라며,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만들어라"고 말하셨다.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분명하게 박혔다. 그래서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라 결심하며 극단을 창단하게 됐다. 지금도 이 극단이 일종의 스테이션(station)이라고 생각한다. 이 극단은 나만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잘 쓸 수 있는 곳인 것이다. 하나의 체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과 비슷하다. 이파리의 끝과 줄기를 통하지 않고 바로 소통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분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방금 얘기한 '리좀', 연극 '햇빛샤워'에서의 '시뮬라시옹' 등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ㄴ 인문학자들은 내가 말하는 것들이 깊이가 없으니까 우스울 것이다. 나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과 비슷하다. 깊지 않고 맥락을 파악하는 수준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철학과 '햇빛샤워' 광자의 삶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가를 보는 것이 매우 재밌다. 인문학에 정통한 사람들이 미처 잡지 못할 수 있는 것들을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분들이 짚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배우고자 한다. 용어를 편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지적해주시면 바로 수정할 것이다. 그렇게 거듭하는 과정이 즐겁다.

 

   
연극 '미국아버지' ⓒ 극단 이와삼

지금껏 해왔던 작품 '환도열차', '미국아버지', '햇빛샤워' 등에서 극단적인 인간상이 가감 없이 그려진다. 평범한 이들의 극단적인 모습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
ㄴ 나는 극이라는 것이 몇 가지 분명한 요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그런 요소들로만 잡을 수 없는 게 많이 있다. 그렇지만 우선 전통적으로 극이라는 요소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그 외에 담기지 않는 이야기까지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왜 자꾸 극단적인 상황, 즉 극적인 상황을 사용하지?'라는 물음을 계속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 극적 요소들을 포진시켜나가려고 한다. 물론 이것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나도 궁극적으로는 극단적 표현이 '너무 연극적이다'라고 불리지 않는 선까지 내려가 보고 싶다. 가령 나뭇잎 한 장이 딱 떨어졌는데 극이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게 큰 사건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내 시야가 넓어져야겠다.

 

   
지난 1월 19일 남산예술센터 시즌프로그램 기자간담회에서 장우재 연출이 연극 '햇빛샤워'를 소개하고 있다

지난 1월, 남산예술센터 시즌프로그램 기자간담회에서 "두 번째 공연이 작품의 완성이다"는 말을 했다. 작품을 만들수록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뜻인가? 횟수로 두 번째가 되어야만 완성도가 가장 높은 공연이 된다는 뜻인가?
ㄴ '붓을 뗄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지 초연에서는 아직 붓을 뗄 때가 아니게 느껴질 때가 많다. 초연과 재공연 사이가 매우 중요하다. 초연에는 관객의 반응이나 느낌을 예상하며 극을 만들지만, 초연과 재연 사이에서는 관객이 비로소 들어오고, 그들이 이 극을 어떻게 봤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관객과 연극은 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어떤 의도를 담았어도 그들이 본 것은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재연에서는 관객들의 반응을 넣어 다시 정렬한다. 그래서 두 번째 공연이 중요하다. 두 번째, 세 번째 횟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지난 해 5월 공연된 연극 '햇빛샤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그렇다면 오는 5월 남산에서 재연 무대를 올릴 '햇빛샤워'에서는 관객들의 어떤 반응이 수용됐나?
ㄴ 이런 견해를 봤다. 마지막에 살인이 벌어지고 광자가 울면서 홀로 빛을 받는데, 이 모습이 지나치게 숭고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그 관객이 '숭고하다'고 말한 것은 어쩌면 광자의 모습에 관객을 지나치게 감정 이입하게 해 정작 사유해야 되는 것을 잊어버리고 빨려들어가게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한 부분이다. 그 의견을 존중한다. 기본적으로 더 세게 혹은 더 약하게의 조절 문제가 아니라,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정확하게 그 사람, 그 일, 즉 존재를 짚는 것이다. 정확하게 그 존재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균형감이 맞았는지 되물어본다.

극에서는 광자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사실, 그 부분은 떨어져서 보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광자적인 삶을 떨어져서 생각해보자는 의도다. 즉 이화(異化) 과정이다. 반면 광자는 드라마가 그려진다. 감정이입하기 쉬운 동화(同化)과정이다. 앞서 언급한 관객의 의견은 동화와 이화 중, 동화로 많이 쏠렸다는 것이다. 이 균형을 다시 맞춰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광자의 삶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지도 않고, 이런 삶이라고 정확하게 표현되는 수위를 다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ㄴ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데, 늘 지금 연습하고 있는 작품이 가장 애착이 간다고 말한다. 피하자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왜냐면 과거의 다른 작품이 현재 작업 중인 작품으로 와서 붙기 때문이다. 그때 좋았던 것이 지금 작업에 와서 다시 붙는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작품을 연출하는 경우가 아니니까 그게 가능한 것 같다.

만일 연출 의뢰작이 들어온다면?
ㄴ 한다. 하는데, 나한테 울림이 있는가를 먼저 판단하고, 그 울림이 있어야 연출을 맡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잘해내지 못할 것 같다.

 

   
 

장우재는 왜 '연극'이어야 했나?
ㄴ 그냥 그렇게 됐다. 왜 다른 장르가 아닌 연극을 하냐고 묻는다면 답을 할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연극을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 룸메이트가 연극반이었다. 친구 따라 갔다가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들어오게 됐다(웃음). 하다 보니 재밌어서 빠져들게 됐다.

그럼 지금은 '연극만 할 거야' 라는 마음이 있나?
ㄴ 그렇다. 내가 벌려놓은 것을 집중해서 모으는 게 훨씬 더 중요한 나이가 됐다. 더 벌리지는 않을 것 같다. 연극은 내게 고마운 일이다.

 

   
 

잠시 연극계를 떠났던 적이 있다. 연극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였나? 연극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
ㄴ 연극을 하면서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힘들다. 개인을 감당할 수는 있지만 나와 관련된 사람들까지도 경제적으로 힘들어진다. 그래서 경제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곳을 모색했지만 완전 실패했다.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 결국 내 사주엔 돈이 없다고 마음먹었다. 포기하고 나니, 많은 것이 열렸다.

'실패'라는 것이 정말 나한테는 귀중한 키워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실패는 또 다른 실패의 어머니다(웃음).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이 결국 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내게 돈은 포기의 대상이 아니라 역으로 열리는 세상이었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고, 그것들을 잘 주워 담았다. 그랬더니 그게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연극을 만들다보면 잘 만들고 그럴듯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그런 것들 다 버리고 여기 있는 것, 네가 할 줄 아는 것, 그렇게 다 걷어내야 한다. 실패 이후 '잘 보이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돈 벌고픈 마음들을 다 걷어내고 남은 것이 네 것이야. 그러니까 그것들을 잘 하는 거야'라는 태도로 바뀌었다.

사람 간의 관계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회에서 만남이 있다면 무언가의 의도가 생긴다. 만나면 잘되고 싶다. 그러나 망가지는 것은 잘되고픈 마음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는, 어떤 만남에 대해 헤어짐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만난다. 서로 취향도 다르고 인간 자체가 결국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존재다. 유한함이 우리 (만남)의 마지막인데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 아닌가 싶다. 차라리 언제 헤어지게 될지 모르겠지만 같이 있는 순간을 재밌게고 효과적으로 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그게 예술가와 일반인의 차이인 것 같다.

나는 절대 '희망'을 믿지 않는다. 예술가를 하려면 희망보다는 '지금, 여기, 너와 나의 시너지'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희망중심인 사회, 성과중심인 사회를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몰려있다. 카피를 이렇게 뽑는 건 어떤가? "미안하지만 우린 다 죽습니다"라고(웃음). 그러니까 잘 지내보자고 말이다.

 

   
 

회의적인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ㄴ 우리는 궁극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사랑'으로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모호한 말을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의 전제로는 '무조건적', '희생적', '지고지순', 혹은 '숭고함' 이라는 단어가 따라 붙는다. 그런데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사람이 성인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단어들의 반대 작용은 욕망이다. 그러나 사랑과 욕망을 떨어뜨릴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조건적으로 베푼다는 것은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가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기브앤테이크 방식이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렇다면 그걸 극복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사랑에는 기브앤테이크가 적절하게 일어날 수도 있지만, 시차가 어긋나기도 한다. 내가 그 사람을 한없이 사랑해도 그때 바로 답이 오지 않는다. 시차를 두고 다른 곳으로, 다른 시간에 어쩌면 내가 필요 없을 때 온다.

부모자식간의 관계에서 바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리사랑.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식은 절대 부모에게 돌려주지 못한다. 시간차가 있다는 말인데, 자식은 부모가 되어 제 자식에게 사랑을 준다. 똑같이 반복된다. 사랑이라는 관념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유한성이다. 즉, 사랑이 초월하려고 하는 것은 그 시간의 유한성을 초월하려고 하는 거다. 결국 사랑은 숭고한 게 아니다. 인간은 네가 나한테 돌려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리고 나 아닌 누군가에게, 다른 시간대에 그게 갈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똑똑한 거다.

사랑은 신비화될 대상이 아니다. 시간의 유한성을 지닌 인간 존재의 실패가 전제 되고 그 다음에 생긴 것이 사랑이다. 절대 숭고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드라마가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건 가짜 희망의 드라마다.

 

   
 

극단 이와삼은 관극 회원들과 긴밀한 소통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관극회원을 모으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들은 장우재 연출에게 어떤 존재인가?
ㄴ 극단 대표로서는 지금 목표가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서 극단을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꼭 필요한 자본으로도 연극이 가능할 수 있게 만드는 제작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의 관객은 소위 말하는 대중적 코드라든지 홍보마케팅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극단의 연극이 좋아서 온 사람들이 된다. 그런 관객들이 구름떼 같은 관객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분들을 다른 공연의 100명처럼 생각하고, 그분들과 직접 소통하자는 것이다. 관극회원을 늘려 100명을 채우자는 생각이 아니다. 그분들과의 네트워킹 자체가 소중하다. 또한 우리는 연극을 하지만, 회원 분들은 세상을 본다. 세상과 연극이 만나는 부분을 얘기 나누고 싶다. 회원 분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다.

미래의 장우재는 어떤 모습일까?
ㄴ 연극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있다. 전날 밤에 잘 자서 컨디션 좋은데, 작업실에서 오전 10시 반 즈음 나와서 맛있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그러고 담배를 한 대 폈는데 생각이 쫙 펼쳐지는 순간이다. 여기서부터 작업 생각이 돌아간다.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작업이 일어나기 바로 전, 커피 한 잔 담배 한 모금. 아마 그 시간은 변치 않고 보내고 있을 것 같다. 미래에도 그러고 있을 것 같다. 거기가 유럽이든, 정신병원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내자는 장우재 연출의 말을 들으면서, 학창시절에 좋아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가 떠올랐다. 장 연출의 모습에서 "Carpe Diem(현재를 잡아라)"라고 말하는 키팅 선생님의 모습이 드리워졌다. 물론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의도의 차이가 다소 있을지언정, 마냥 희망찬 내일을 꿈꾸고자 당장 오늘에 충실하지 못하는 이들을 꾸짖고 있다는 점은 상통했다.

장 연출은 올 한해를 바쁘게 보낸다. 오는 22일부터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환도열차', 5월에는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햇빛샤워', 10월에는 LG아트센터에서 '불역쾌재'로 관객들을 만난다. 장우재 연출가와 극단 이와삼은 진지한 사유를 바탕으로 연극 한 편 한 편을 정성들여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현재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고 있는 장우재표 연극에 대해 스스로 사유해보는 장 연출의 말로 기사의 끝을 맺는다.

"지금 내가 하는 연극이 관객과 잘 만나고 있다는 것은, 옛날에 연극 만드시던 분들보다 연극을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관객이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학의 깊이는 이전 선생님들이 더 훌륭하다. 그러나 연극이 아무리 위대해도 시대가 바뀌면 밀린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게 바로 연극존재의 유한성이다. 그것을 아는 순간, 연극 만들기가 재밌어진다. 연극은 언제나 흘러간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영상]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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