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열풍으로 드러난 거장의 민낯

지금까지 죄스럽다
시인 고정희의 추모식에 가서야 그녀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검은 리본을 젖가슴 위에 단 모시적삼 저고리 하며
추모시를 읽는 여대생의 젖은 비음까지
풋풋한 살냄새를 풍기는데
검은 미사복을 입은 추모객들의 옆 모습이 얼마나 性스러운지
나는 그만 고정희를 추모하는 도중
귓불이 달아오르고
쑥뜸으로 풀리지 않던 배꼽 밑의 울혈이 터져서
앗 뜨거라! 바지춤을 잡고 화장실로 줄행랑을 놓았던 것이다...
- 이윤택의 시 <죽음과 섹스와 시> 중 일부 발췌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이슬기] 연극계 원로이자 연극 <오구>, <시민K> 등 수많은 대표작으로 이름 높았던 연출가 이윤택이 성추문에 휩싸였다. 지난 14일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연출자 이윤택으로부터 10년 전 당했던 성추행 사건을 폭로한 것이다. 이에 또다른 피해자들의 추가적인 증언이 이어지면서, 연출가 이윤택의 성추행이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상습적인 행위였다는 점이 주목되며 대중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이에 이윤택 연출가는 한 언론 및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를 통해 "지난 남성중심 시대의 못된 행태였다. 스스로 벌을 달게 받겠다"며 근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해당 사과 내용에 정작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없는 점, 직접 사과를 하지 않는 점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자, 19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연희단거리패를 해체하고 피해자들에게도 공식 사과했다.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에서는 이윤택 연출가의 상습 성폭력, 성추행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조사 촉구 청원이 진행중이며, 한국극작가협회는 지난 17일 그를 제명조치한 상태다.

그는 연습 중이던 휴식 중이던 꼭 여자단원에게 안마를 시켰다.
그게 본인의 기를 푸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작업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중략)
무섭고 끔찍했다.
그가 연극계 선배로 무엇을 대표해서 발언할 때마다,
멋진 작업을 만들어냈다는 극찬의 기사들을 대할 때마다 구역질이 일었지만
피하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극단 ‘미인’ 대표 김수희 대표가 SNS에 올린 폭로글 중 일부

#MeToo!! 나도 당했다

검찰 내 성추행 사건에 대해 용기있게 털어놓은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의 폭로를 시작으로 각계각층에서  자신이 당했던 성폭력,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는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사회의 이면에 이토록 많은 피해자가 숨죽이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라울 정도다.

문화계에서도 이윤택 연출가에 앞서 영화감독 이현주, 연극배우 이명행, 심지어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될 정도의 거장으로 인정받던 시인 고은 역시 성추문에 휩싸인 바 있다.

그렇다면 이윤택 연출가를 포함한 사건 가해자들을 지금 형사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가능할까?

당시 피해자들은 폭행이나 협박에 굴한 것이 아니었다.

가해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향후 ‘업무상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속수무책 피해를 감내한 것이다.

형법에서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가해자를 ‘업무상 위력을 이용한 간음.추행죄(제303조)’로 처벌하고 있다. 본죄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분의 자가 그 위력을 이용해 상대방을 간음하거나 추행하였을 때 성립한다. 물론 위력을 사용할 만한 신분이 있더라도 폭행이나 협박을 수단으로 간음하였다면 일반 강간죄(제297조)가 성립한다.

2013년 6월 형법은 성폭력범죄자를 엄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절차를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된 바 있다. 아동 청소년 대상 성범죄 처벌을 강화하고, 유사강간죄를 신설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와 반의사불벌죄가 폐지되었다. 즉 성범죄에 관하여 피해자의 직접 고소가 없거나 가해자와 합의하더라도 가해자 처벌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따르면 2013년 6월 이후에 일어난 간음, 추행에 대해서는 지금 고발해도 처벌이 가능하다.

연출가 이윤택이 여배우들에게 저지른 행위가 형사상 처벌가능한 성범죄라는 사실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2013년 이전의 성범죄는 모두 친고죄였고, 친고죄에는 6개월의 고소기간이 있었다. 따라서 성범죄 사실이 발생한 지 6개월 이내에 피해자가 직접 신고하지 않았다면, 법적으로 처벌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

같은 이유로 현재 ‘미투(Me Too)' 열풍을 타고 폭로되고 있는 대부분의 성추문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처벌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사건 당시의 증거를 수집하지 않았다면, 피해를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장만으로 논란이 불거졌을 경우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로부터 명예훼손 등으로 피소를 당할 여지도 있다.

때문에 지난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폭로된 각계각층 성추문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당시의 죄를 인정하고, 근신하거나 사과하는 대처를 하고 있지만, 시효가 지났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또 한번 상처를 줄 가해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일이다.

 

당장의 처벌보다 중요한 것, 반복 근절과 재발 방지

이윤택 연출가의 사과 중 "지난 남성중심 시대의 못된 행태"라는 부분이 있다. 최근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는 폭로들은 모두 ‘그 시대’가 만든 명백한 결과물인 셈이며, 때문에 ‘미투 열풍’은 당분간 꾸준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범죄 피해의 상처는 결코 쉽게 아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참회하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행위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폭로가 나올 때마다 해당 사건의 가해자를 처벌하는데 주력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반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같은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근절하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여자이고 사회적 약자이기 앞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도 보장할 수 없을 정도의 ‘위계 질서’란 사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도록, 모두가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미투 열풍' 역시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금세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에디터(ARt'ietor) 이슬기. 경북대학교 법학과 및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이슬기 변호사는 여성과 가정의 기준에서 사회를 통찰한다. 헌법재판소 경험과 함께 '전국청년대표자 연합 여성분과 위원장', '네이버 지식인 이혼상담변호사', '한국가족법학회 정회원' 활동을 호기롭게 이어가고 있다. 특히 사회적인 약자 변호라는 큰 장점을 무기로 현재는 중앙헌법법률사무소에서 가사전담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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