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의 기저에 존재하는 팬들의 입장료, 가볍게 보시겠습니까?

▲ 지난해 황금사자기에서 선배들에게 사인을 받는 군산상고 선수들. 2~3년 후에는 이 자리가 뒤바뀔지 모를 일이다. 사진ⓒ김현희 기자

[문화뉴스 MHN 김현희 기자] 지난해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에서는 꽤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일반 야구팬들이 고교야구를 많이 봐 주러 와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은퇴선수협회 멤버들이 사인회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많은 숫자의 팬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종범, 조성환 등 왕년의 프로야구 스타들은 다가오는 팬들의 사인과 사진 촬영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다음 경기를 앞둔 군산상고 선수단도 사인을 받으러 왔다. 그 중 조성환 코치는 "오히려 우리가 너희들한테 사인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로 후배들의 기를 살려주기도 했다. 뜻하지 않게 왕년의 스타들에게 사인을 받아 간 야구팬들은 좋은 추억을 안고 귀갓길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 역시 아마야구 현장에서 펼쳐진 훈훈한 장면을 알리면서 꽤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을 보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필자에게 "이왕이면 저도 목동구장 갈 걸 그랬네요." 하면서 아쉬운 목소리를 전달해 온 야구팬도 있었다. 그리고 제보자가 보내 온 동영상 한 편은 하필이면 당시 공중파 방송 9시 스포츠뉴스를 통하여 공개된 씁쓸한 장면과 매치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팬이 없는 프로스포츠가 의미 없는 이유?
텅 빈 운동장=프로스포츠 운영 포기가 가능하기 때문

제보자가 보내 온 동영상에는 모 프로구단 선수들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의 목소리를 매정하게 거절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때마침 그 자리를 지나치던 A코치에게 제보자는 "코치님! 선수들이 사인 요청해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가요. 속상해요."라고 이야기하자 "뭐라고요? 정말 그랬어요? 아니 이 녀석들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공중파 방송 뉴스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방송됐다. 경기가 끝나고 버스에 오르려는 선수들만 가득할 뿐, 팬들의 사인 요청에 제대로 응해 주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의 고사리손을 매정하게 뿌리친 일부 선수들의 모습이 담기기도 했다. 작년에도 이렇게 씁쓸한 장면이 연출됐는데, 얼마 전 KBS에서는 작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수들의 모습을 또 다시 담아냈다. 이미 공중파 방송을 통하여 '사인 거부'에 대한 공론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단/선수들은 탈(脫)권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선수들을 향하여 무례하고 상식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거창한 요구를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정의 제지가 필요하다. 팬이라는 가면을 쓰고 선수를 괴롭히는 사례가 있기에 선수들도 거리낌 없이 팬들에게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에 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신(一身)의 피곤함을 앞세워 어린아이들의 고사리손도 뿌리치는 사례에 대해서는 프로야구 선수로서 분명히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운동선수라면, 팬서비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야 한다. 본인들이 받는 연봉의 기저(基底)에도 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기업 지원이 절대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러한 모기업이 투자의 정당성을 갖추기 위한 전제 조건도 결국은 경기장 입장료이기 때문이다. 국내 재계를 이끄는 기업들이 적자폭을 감수하는 이유도 프로야구단에 드는 돈을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야구단을 운영함으로써 해당 기업 전체의 매출액이 늘어날 수 있다면, 경영학원론적인 입장에서 이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돈을 들여서 야구를 보러 와 주는 팬들에게 감사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다만, 자신들의 연봉을 직접 주는 주체가 팬이 아닌 구단이기에 일부 선수들은 이러한 점을 '지나칠 정도로' 간과하고 있다. '팬들이 야구장을 찾지 않는다 → 입장 수입이 줄어든다 → FA 과열 경쟁 등으로 선수들의 몸값은 계속 오른다 → 모기업 의존도가 높아진다 → 적자폭이 늘어난다 → 프로야구단을 포기하는 기업이 늘어난다'라는 논리는 언제든지 성립될 수 있다. 프로야구단 운영에 기본 전제조건이 되는 팬들을 무시하는 순간,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는 단어를 빼 버려야 한다.

현재 모 학교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선수도 초등학교 시절 본인이 좋아하는 연고팀 선수의 사인을 받으러 팬북까지 내밀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제가 이러한 일을 당했으니, 향후 프로에 입성하면 저 같은 아이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팬서비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애써 그 상처를 감췄다.

▲ 2009 청룡기 선수권 직후 김동엽을 만나러 온 어린이 야구팬. 김동엽의 팬이라며 야구공 사인을 요청하는 어린 선수의 요청에 김동엽이 흔쾌히 응한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진ⓒ김현희 기자

어찌 보면, 이러한 팬서비스에 대한 응대는 학교야구부 시절부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팬서비스에 철저한 전직 농구선수 서장훈도 대학 시절 최희암 감독으로부터 이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에 '그라운드 안팎에서 모두 진짜 프로'라는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교/대학 시절 팬서비스에 철저했던 선수들이 대체로 프로에 가서도 잘 한다. 2009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패하고도 "팬이예요!"라며 사인을 요청한 어린 야구팬의 고사리손을 외면하지 않았던 김동엽(SK, 당시 천안북일고 3)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팬들이 정중하게 선수들에게 다가가면, 프로라는 타이틀을 지닌 선수들도 당연히 정중하게 팬서비스에 응하는 것이 맞다. 몸이 다소 피곤하다 해도 "내가 받는 연봉 값에 팬서비스는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철저하게 믿는 이들일수록 이에 더욱 적극적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대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사인에 다소 인색하다고 알려졌던 모 선수에 대해 한 야구 원로가 했던 따끔한 일침을 마지막으로 본 고를 마감하고자 한다.

"중고시장에서 본인 사인볼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고 상처받아 사인을 잘 안 하게 됐다고? 그럼 그러한 일이 안 생기도록 네가 더 많이 사인해 주면 되잖아! 오죽 안 해 주면 그런 일이 생기겠냐고!"

eugenephil@mhn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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