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키즈 1세대 멤버와 함께 되돌아보는 92학번 레전드, 1편

▲ 후배 박용진 감독(사진 우)과 함께 한 안계장 감독(사진 좌). 안 감독은 휘문고 사령탑 시절 92학번 세대들의 고교 시절을 모두 지켜본 이다. 사진ⓒ김현희 기자

[문화뉴스 MHN 김현희 기자] 한동안 KBO리그에서는 입단하자마자 바로 전력에 투입하는 선수들이 드물어 신인왕 레이스에서 이른바 '중고 신인'이 압도적인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지난해 이정후(넥센)가 순수 신인으로는 아주 오랜만에 신인왕에 등극하자 프로야구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수 신예건 중고 신예건 간에 젊은 선수가 1군이라는 큰 무대에서 장기간 살아남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이다. 초반에 반짝 활약을 펼칠 수는 있지만, 6~7월의 무더위를 견뎌 낸 이후 체력적인 한계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이 고비를 넘기는 이가 신인왕에 가까워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올해에는 작년 이정후 못지않은, 다양한 재주를 지닌 신예들이 많이 등장하여 또 다른 신선함을 주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장면을 그대로 보고 야구를 시작한, 이른바 '베이징키즈 1세대'들이 프로 무대에 입성했기 때문이었다. 강백호(KT)를 필두로 한동희(롯데), 양창섭(삼성), 박주홍(한화), 곽빈(두산) 등이 개막부터 꾸준히 활약을 펼치고 있으며, 박신지(두산), 오영수(NC), 김유신(KIA)도 제한적으로나마 1군 무대를 밟은 바 있다. 각 구단마다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많은 숫자의 신인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KBO리그에서 꽤 보기 드문 일이기도 하다.

신인들의 대거 등장, '국보급 멤버'
92학번 세대의 애틋한 추억

이렇듯 2018년도를 기점으로 빼어난 프로스펙트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더 많은 신예들이 대거 등장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 유명했던 92학번 세대가 그러하다. 이들의 면모는 당시 고려대 멤버였던 마해영 성남 팬더스 감독의 저서, '야구본색'에도 '국보급 멤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992년에 대학에 입학한 이후 각종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선수들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바로 프로에 합류하여 10대 돌풍을 일으킨 이들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이는 임선동(휘문고-연세대), 조성민(신일고-고려대), 손경수(경기고-홍익대) 등 이른바 '92학번 빅3'였다.

그렇다고 해서 92학번을 대표하는 선수가 3명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까치' 설종진, 꾸준함의 대명사 송지만, 투-타 올라운더 박재홍, 대전고가 배출한 우완 에이스 정민철과 부산을 강타한 10대 유망주 염종석도 있었다. 당시 주목을 받았던 이들은 100% 프로에 진출하여 해당 구단의 한 축을 맡았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전남고등학교에서 생물 교사로 근무하며 야구부를 창단한 안계장 감독은 당시 고교야구에서 몇 안 되는 지장(智將)이었다.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면서 크고 작은 전국 무대를 여러 차례 경험한 안 감독은 1988년에 휘문고 감독에 부임했다. 안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휘문고는 동문 출신에게 사령탑을 맡기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 전통을 깨고 선린상고 출신의 안 감독을 영입한 것은 그만큼 휘문고가 전국 무대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었다. 고교 최초 4연타수 홈런의 주인공 故 박정혁(前 LG)을 비롯하여 전형도, 류택현, 임선동 등은 휘문고 감독 시절 안 감독이 중용했던 인재들이었다. 특히, 임선동을 1학년 때부터 중용했을 만큼, 안 감독은 당시 92학번 세대들을 모두 직접적으로 지켜봤던 이였다.

"그때 서울 지역에서 주목받던 이가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였는데, 각자 개성 있고 장점도 뚜렷하던 이들이었어요. 임선동은 몸이 유연했고, 제구가 좋아서 1학년 때부터 중용했죠. 또 당시 조성민은 제구가 조금 불안했지만, 변화구 각이 좋았습니다. 그러다 불안했던 제구도 학년이 갈수록 또 나아지더군요. 손경수는 파이터적인 투구와 파워가 있었습니다." 안 감독의 회상이다. 서울지역을 수놓았던 세 이는 고교/대학 때에도 간혹 맞대결을 펼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다만, 당시까지만 해도 선수들이 프로보다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시기였기 때문에, 1차 지명권을 행사하게 될 LG나 OB(현재의 두산) 모두 이들의 대학 졸업 이후를 감안한 전략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LG의 임선동 선택, OB의 손경수 선택이었다. 당시를 회상한 조성민은 생전에 "고려대에 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지만, OB의 선택이 내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고 나서 자존심이 상했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한 아쉬움은 선수 은퇴 후 두산 코치로 영입되면서 다소 해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92학번들 가운데서 가장 빼어났다는 세 명은 이들보다 평가가 박했던 다른 유망주들에 비해 너무 일찍 선수 생활을 마쳤고, 가진 재능을 100% 발휘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92학번 세대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때 '애틋함'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 프로 입성에는 성공했고, 그 중에는 '레전드'로 불릴 만한 성적을 거둔 이도 있었지만, 국보급 멤버라는 명성에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인 이들이 많기도 했다.

- 애틋한 전설, 92학번의 추억 2편에서 계속 -

eugenephil@mhn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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