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수, 아무에게도 알린 채 홀로 마지막을 보낸 고독한 승냥이

▲ 경기 전 필승을 다짐하는 홍익대 선수단. 25년 전까지만 해도 홍익대 야구부는 강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손경수 입학과 함께 도약을 꿈꿀 수 있었다. 사진ⓒ김현희 기자

[문화뉴스 MHN 김현희 기자] (애틋한 전설, 92학번 멤버의 추억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임선동과 조성민, 손경수는 92학번의 그 어떠한 멤버들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소속 고등학교에서도 에이스 역할을 했던 이들이었다. 대전고 정민철, 부산고 염종석을 포함하여 공주고 졸업 이후 한양대에 진학한 박찬호도 있었지만, 그래도 92학번 전국구 스타들 가운데 트로이카는 단연 저 세 사람이었다. 당시 OB 베어스에서 프런트 및 스카우트팀장을 역임했던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92학번 세대에 대해 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 순서가 아니었나 싶다. 박찬호는 당시만 해도 볼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좋지 않아 평가가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92학번 투수들 대부분 비슷하면서도 다른 강점을 지니고 있어서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는 무리였다." 구 총장의 회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OB가 빅3 가운데 평가가 가장 낮았던 손경수를 지명했던 것은 상당 부문 이례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애틋한 전설, 92학번 故 손경수를 말하다

따라서 당시 손경수는 누가 봐도 OB 입단을 선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손경수는 OB가 제시한 계약금이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 넉넉한 장학금을 제시한 홍익대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연세대 임선동, 고려대 조성민과 함께 대학 무대에서 새로운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손경수의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어려운 가정 사정과 함께 본인의 개인사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결국 어려운 집안 생계는 오롯이 대학생 손경수의 몫이 되어야 했다. 이때부터 숙소 이탈도 잦았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져 학교 측으로부터 문제 선수라는 낙인이 찍혀야 했다. 당시 홍익대 사령탑으로 재직 중이었던 박종회 전 설악고 코치는 "(손)경수가 오랫 동안 숙소에 붙어 있지를 못했다. 숙소에 들어오면, 이틀 있다가 도망을 가는 바람에 나도 아버지에게 알리고 경수 거기 있느냐고 수시로 물어 볼 정도였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여 몸이 불편했던 손경수의 아버지는 아들의 잦은 숙소 이탈에 몇 번이나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고 한다.

▲ 야구 인명 사전에 등재된 손경수의 사진.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사진이기도 하다.

어려운 가정사에 아버지까지 부양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손경수는 '자기 발로' 다시 OB를 찾았다. 어떻게든 하루 빨리 야구로 돈을 벌어 아버지를 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하여 홍익대에 '생계곤란'을 이유로 '자퇴서를 제출하였지만, 홍익대는 평소 손경수의 불성실한 선수 생활을 이유로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3년 12월 OB는 '불미스러운 일로 대학을 중퇴한 선수는 2년간 프로에 등록할 수 없다.'라는 규정을 뒤로한 채 계약금 7,800만 원, 연봉 1,200만 원에 손경수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OB는 제 발로 걸어 들어 온 손경수에 대해 이전보다 싼 몸값에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고, 또 홍익대가 자퇴서를 수리하지 않더라도 정상적으로 졸업한 것과 같은 1996년부터 쓰면 된다는 계산도 있었다. 당시 KBO 역시 OB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계약 체결 바로 다음 날 손경수의 신인 선수 등록 완료를 공시했다.

거칠 것 없어 보이던 손경수였지만, 이번에는 병마가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평소 술을 자주 입에 가까이했던 것에서부터 불행의 싹이 튼 것이었다. 그렇다. 간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손경수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훈련장을 이탈하고 다시 술을 찾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결국 손경수는 1군 마운드에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채 1995년 말 임의탈퇴 신분이 되어 팀을 떠나야 했다. 이후 다시 두산 사무실에 테스트를 받으러 왔다는 소식이 전달되었을 뿐, 야구판에서 손경수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이제까지 알려졌던 손경수의 행보였다.

야구판을 떠난 이후 손경수의 행보에 대해 많은 이들이 다양한 추측성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었다. 부모님의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 운수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이 있었지만, 취재 결과 모두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2008년 화물차 연대에 올려진 명단 중에서 동명이인이 기재되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을 뿐, 그 이가 진짜 손경수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운수업 종사설은 아마 여기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손경수를 봤다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야구판을 떠난 이후 막노동일을 전전했다."라는 이야기를 전해 오기도 했다. 그리고 친한 이들에게는 지갑 속에 OB 유니폼을 입은 그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과거 프로선수였다는 이야기도 같이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두산 퇴단 이후 어렵게 살아 왔던 것은 분명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4년 전, 아주 오랜만에 손경수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대전 서구 리틀야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필자도 즉각 대전 서구 리틀야구단 감독에게 연락을 취하여 손경수의 인터뷰 가능 여부를 타진해 보기도 했다. 결과는 거절이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매스컴에 거론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필자도 다음을 기약하면서 손경수의 건강을 기원했다. 대전 서구 리틀야구단 코치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중견 스포츠 용품 회사에서 근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에게 한 통의 메일이 전달됐다. 경기도 독립야구단 '용인스탤스' 창단 과정에서 이광권 감독을 도와 지원자를 모집하는 가운데 전달된 것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일과 야구를 병행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A씨는 사회인 야구 시절 故 손경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는 내용을 같이 전달해 오기도 했다. 故 손경수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에 필자는 즉각 A씨에게 연락을 취하여 사실 여부를 파악했다. 안타깝게도 손경수의 별세 소식은 사실이었다.

"손 코치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셨는데, 돌아가신 지 1~2년 정도 되신 것으로 안다. 평소 좋지 않았던 간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당시에도 본인에게 이야기한 것이, 언론에 노출 되는 것이 싫다고 하셨다."

한때 손경수와 한솥밥을 먹었던 대전 서구 리틀야구단 코칭스태프도 뒤늦게 그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확한 사망 시점과 장지를 아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뒷이야기까지 전달해 주기도 했다. 박종회 감독과 구경백 총장 역시 손경수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다만, 두 이도 손경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은 똑같았다. 구 총장은 "2년 정도 됐다고 들었다. 슬하에 아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3인방 중에서 벌써 둘이나 세상을 떠났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 동안 왜 아무 소식도 전달되지 않았는지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92학번 세대를 언급할 때 늘 거론되었던 손경수. 결국 그의 전성기는 고교 시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가정법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과거나 현재, 미래를 가정할 때 쓰이는 것이지만, 그래도 "만약에 손경수가 경기고 졸업 이후 바로 OB에 입단했다면?" 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렇다면, 적어도 임선동, 조성민처럼 프로 1군에서 한 번 정도는 정점을 맛보지 않았을는지. 그러한 점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라도 매스미디어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故 손경수(경기고-홍익대-OB 베어스)
185cm, 85kg
포심 최고 구속 146km, 평균 145km(이상 당시 스카우트팀 스피드건 기준)
1995 임의탈퇴(이후 잠시 구단 복귀 TEST 후 최종 은퇴)
대전 서구리틀 야구단 투수코치
각종 사회인 야구단 인스트럭터
2016년 별세

- 애틋한 전설 92학번 멤버의 추억 ③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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