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러한 말은 남겼다.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제 침략, 동족끼리의 전쟁 등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곳곳에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 곳도 많이 있지만 구석구석 들여다 보면 슬픈 역사의 현장을 간직한 공간도 많이 존재한다.

관광객들은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을 방문해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교훈을 얻게 된다. 이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 부르는데,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 또는 ‘그리프 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역사교훈여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다크 투어리즘’. 그 대표적인 장소를 뽑아봤다.

1. 동족상잔의 비극을 담고 있는 '제주 평화공원'

ⓒ 클립아트코리아

사실 많은 관광객들이 제주도하면 흔히 한라산, 검은 오름, 올레 길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제주도에도 아픈 역사는 남아있다.

지난 2월 18일 방송된 JTBC ‘효리네 민박2’에서는 이효리가 “제주를 관광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아픔이 있는 땅”이라며 간접적으로 4.3사건을 언급했다. 이어 이효리는 지난 4월 3일 ‘제 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의 사회자로 나서며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들을 보여왔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일본제국의 패망 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이 발단이 되어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소설가 현기영의 작품 ‘쇠와 살’ 중에서 “전대미문이고 미증유의 대참사이다. 인간이 인간을, 동족이 동족을 그렇게 무참히 파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다. 짐승도 그런 떼죽음은 없다”며 당시 참혹했던 제주 4.3사건을 묘사하기도 했다.

ⓒ 한국관광공사, 위령비

제주의 아픈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평화공원에는 ‘위령제단’, ‘봉안관’, ‘행방불명인 표석’ 등 당시 제주의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많은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 '제주 4.3 평화공원' 홈페이지

그 중 ‘제주 4.3 평화기념관’은 제주 4.3의 역사적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설치된 복합문화 공간이다. 이곳에는 ‘제주 4.3 사건’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고, 관련 애니메이션 동영상이 있어 아이들도 재미있게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 군항제 뒤에 가려진 침략의 역사 ‘진해’

ⓒ 클립아트코리아, 벚꽃으로 유명한 진해

매년 봄철이 되면 진해에서는 전국 최대 축제인 ‘군항제’가 개최된다. 만개한 벚꽃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기 때문에 전국의 많은 관광객들은 벚꽃을 감상하기 위해 진해 군항을 방문하지만, 진해가 일본 침략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관광객들은 많지 않다.

진해는 1910년 일제 계획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쓰기 위해 개발이 진행되었고,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도시이다.

1902년 일본이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된 진해의 구도심은 중원 로터리를 중심으로 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중원로터리 남쪽으로는 남원, 북쪽에는 북원로터리가 설치되어 있다.

ⓒ 한국관광공사, '진해 우체국'

중원로터리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 있는데 바로 진해 우체국이다. 사적 제 291호로 지정된 진해우체국은 러시아풍의 건물로 진해와 가까운 마산의 러시아영사관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으며, 일제는 태평양 전쟁 말기 진해우체국의 지붕과 난간에 사용한 동판과 동재를 이용해 무기를 생산하기도 했다.

ⓒ 한국관광공사, 장옥거리

일본인 상가들이 밀집했던 장옥거리는 191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붕을 길게 이어 지었으며 칸칸이 벽을 두고 사용했다. 주로 1층은 상가로 이용했으며 2층은 가정집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다. 일제가 자국민들이 살기 위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진해에 살고 있는 주민 2천여 명을 이주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3. 근대 시간여행의 중심지 ‘군산’

군산에도 일제 강점기 시절의 가슴 아픈 역사가 남아있다. 개항 이후부터 군산에는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그 배경에는 일제의 척식 정책에 따른 농장 설립을 통한 미곡 생산과 무역을 독점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들은 농업 경영에 뜻을 두고 군산 지역 토지를 매입하며 대형 농장들이 설립되었고 본격적인 대한민국 수탈이 일어나게 되었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효시헤이가 설계하여 122년 신축된 은행건물이다. 당시 일본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장학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건물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는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구 18은행 군산지점 현 군산 근대미술관

군산 근대미술관은 과거 일본 18은행 군산지점으로 운영되던 곳으로 일본 나카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이다. 숫자 18은 은행 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하며 군산지점은 조선에서 7번째 지점으로 1907년에 설립되었다. 2008년 2월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보수와 복원을 통해 현재는 군산 근대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4. 근대 역사의 현장 ‘서대문 형무소’

ⓒ 클립아트코리아, 서대문형무소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항거하는 의병들과 애국계몽운동가 등이 증가하자 한국인들의 저항을 종식시키고 한국을 조기에 식민지화 하기 위해 1908년 설립된 대규모 감옥이다.

1923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수감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일제는 기존 건물을 신축하여 수용인원 3000여 명의 감옥으로 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대규모 감옥으로 사용되던 서대문 형무소는 1998년 자주 독립정신과 평화수호 정신을 기리는 교육현장으로 운영하기 위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하여 현재까지 운용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 내부에는 ‘사적 제 32호’ 독립문을 비롯해 연은문 주초, 독립관, 순국선열추념탑, 3.1 독립선언기념탑 등이 있다.

ⓒ 한국관광공사, 독립문

독립문(獨立門)은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다. 설계는 서재필 구상아래 독일공사관의 스위스 기사가 도와 세부설계도를 작성하였고, 공사감독은 조선인 심의석이 맡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 한국관광공사, 독립관

독립관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갑오경장 이후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건물을 고쳤고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되었다. 자주민권과 자강사상,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시민대중을 계몽하는 집회장으로 사용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지만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현재는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은 국가적 불행한 사건을 잊지 않고,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한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더운 여름철 시원하고 재밌는 휴가를 계획하는 것도 좋지만, 마르크스의 말처럼 비극으로 반복될 역사가 아닌 희극으로 반복될 역사를 위해 역사적 아픔을 공유하고 교훈을 얻는 휴가를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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