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을 파는 게 아닙니다. 문화를 판매합니다

풋풋한 농부들 정우진 대표

곶감을 파는 게 아닙니다. 문화를 판매합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로 진입하고도 한참이 지났다. 굽은 길의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감나무 잎이 흩날리는 길을 쫓아가다 보니 드디어,외진 길의 끝에서 내비게이션 안내가 멈췄다. 원시의 공간 같았다.네모난 간판에 '풋풋한 농부들'이라고 쓰인 이정표를 보고서야 제대로 찾았다며 안도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정우진 대표가 나왔다. 미소를 머금은 채 꾸벅 인사했다. 팽글팽글 보조개 아래 생기가 도는 표정에서 정 대표의 열정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힘찬 걸음걸이는 고요한 땅 위에 활력을불어넣었다.

"풋풋한 농부들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를 더 알아보기 위해 커다란 문을 밀고, 문명의 공간인 사무실로발을 옮겼다.

 

곶감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 발붙일 땅 없었다

"제 고향은 서울 성수동입니다. 성장기를 보낸 청주가 마음의 고향이고요"

정 대표는 정착을 하기 위해 상주로 내려왔지만 상주와는 심적 거리가 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상주에 사셨기에 상주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외부인이라는 인식과 텃세로 인해 상주에 정착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서럽던 차에 오해일 수 있는 일도 있었어요. 먼저 퇴직하신 분의 이야기라 실명은 공개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한국농수산대학재학 중 기관 실습을 위해 관련 부서에 인사를 드리러 갔었을 때였습니다. 직원 한 분이 저를 제외한 다른 실습생들에게는 어느 집 자제인지 알아보고 이름을 물었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인사만 가볍게 건넬 뿐 이름을 묻지 않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았죠. 그래서 그다음부터 매일 그분께 캔커피를 사 들고 찾아가 제가 누군지 인사드렸어요"

기반이 없던 정 대표는 농사일을 하시는 분들께 무시를 받기도 했다. 화가 날 법도 했지만 더 신경 써서 잘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안면을 트고 나니 좋은 결과가 생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돌파구였죠. 의기소침하기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인상을 심은 것 같아요. 이런 경험 덕분에 저와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엎친 데 덮친 격.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 극복해야 할 숙제

기반 없이 농사를 짓겠다는 열정만 가득했던 그는 밭을 빌려 아삭이고추 농사를 처음 시도했다. "어르신들께서 고추 모종은 고라니가 먹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경험이 없으니 당연히 어르신의 이야기를 정설로 새겨듣고 삶의 연륜과 경험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모종을 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사고가 생겼어요. 1,650㎡에 심은 아삭이고추 모종 전부를 고라니가 다 먹어 버렸어요"

정 대표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멧돼지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어요. 늦은 저녁 곶감 건조실 전기를 점검하러 농장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씩씩거리며 지나가는 멧돼지 16마리와 차창을 두고 마주쳤어요.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 차에서 내리지도 못했습니다"

정 대표는 다음 날 간신히 면사무소에 찾아갔다. "따로 개체 수 조절 기간이 있는 것을 알긴 했어요. 하지만 고작 6명이 사는 동네에 멧돼지 16마리가 함께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구조 요청을 했습니다. 사태 파악에 나선 환경 관리자들도 멧돼지들이 남긴 발자국 크기에 엄청 놀라워했죠"

정 대표는 동물 때문만이 아니라, 습한 날씨를 버티지 못하는 곶감의 특성 때문에 몇천만 원이나 손해를 본 적도 있다. 살뜰하게 깎아 건조하던 곶감 위에 곰팡이가 자란 것이다. 그때의 우여곡절을 경험으로 개발한 것이 지금의 차별화된 곶감 건조실이다.

 

차별화된 시선으로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다

"곰팡이가 피는 조건은 온도, 습도, 산소 공급, 자외선, 영양분입니다. 산소와 영양분은 차단할 수가 없어서 이로 인해 피어오르는 곰팡이는 막을 수 없어요. 하지만 온도와 습도 중 하나만 조건이 맞지 않아도 곰팡이는 자라지 않습니다. 따라서 장마 기간에 습도가 높아지면 보일러를 돌려 습도를 없애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죠. 저는 그 상식을 응용해서 비가 오거나 습기가 많은 날 온도를 높여 주는 건조실 제안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사실에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어요"

정 대표는 곶감 건조실이 꼭 필요한 시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주에 삽 한 자루 들고 내려왔던 정 대표였기에 건조실을 만들 자본도 없었고,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곳도 전혀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마침 한국농수산대학에서 졸업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졸업생 영농·영어정착 우수과제 공모 지원사업'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고 신청했지만 선정되지 못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지독한 가을 감기에 걸려 비를 맞고 병원에 가던 중 교수님으로부터 추가로 선정됐다는 전화가 다시 걸려 왔죠. 갑자기 감기가 확 나은 듯했습니다"

정 대표는 굉장히 치열하고 절박한 백지상태에서 커다란 구상에 대한 답을 받은 것이다. "2,500만 원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때 체감한 금액은 2억 5,000만 원이나 다름없었어요. 농사에 대한 의욕이 마구 솟구쳤죠. 병원에서 집까지 비를 맞으며 다리에 스프링을 달기라도 한 것처럼 껑충거리며 내달렸어요"

 

곶감은 문화였죠. 단순 작물이 아니었어요

예전의 상주 곶감은 고부가가치 작물이었다. 지금은 가격이 많이 무너졌지만 주 작목으로 시작할 무렵엔 곶감 사업이 기계화도 덜 됐고 규모도 작을 정도로 흔치 않았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곶감은 문화라고 생각했어요. 곶감을 평소에 먹기 위해 구입하는 고객보다 명절 선물 등을 위해 구입하는 고객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지금도 저는 곶감이 매력적인 문화상품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정 대표는 곶감을 주 작목으로 선택하기 전 참깨 농사를 짓고 있었다. 부모님은 농업에 종사하지 않으셨고 할아버지가 지역 특산물이었던 곶감을 아주 작은 규모로 지으셨다. 정 대표는 곶감을 지으신 할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참깨 농사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곶감으로 정착해 확장시켰습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성과가 빠르게 나타나지 않았어요. 오랜 정성을 쏟아야 얻을 수 있는 '한 작물에 대한 노하우'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정말 더디게 성과가 오르더라고요. 드디어 작년 설에 처음 완판을 했습니다. 구체적인 결과가 눈에 보이니 너무 기뻤습니다. 앞으로 이 결과를 토대로 더 많은 정성과 곶감에 대한 지식을 쌓아서 한 걸음씩 발전하고 싶습니다"

 

일반 현황

나만의 성공노트

성공 노하우

저는 빵점짜리 농업인입니다. 어르신들만큼 부지런하지도 않고 끈기도 없어요. 하지만 그렇기에 전혀 새로운 마인드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맞는 철학으로 새로운 시도를 쉽게 합니다. 선입견 없이 도전하기 때문에 창의성이 따라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획 중인 아이디어도 모두 색다른 시선에서 찾은 발견입니다.

미래 계획

한국농수산대학 동기들과 ‘풋풋한 농부들’이라는 팀을 꾸렸습니다. 저를 포함해 총 5명의 인원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각자 작목을 갖고 있죠. 곶감이 그랬듯 문화 사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획 중입니다. ‘풋풋한 농부’ 학교를 만들어 제반 환경으로 인해 시도하지 못했던 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야생동물 기피제 사업도 준비하고 있어요. 제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부분이죠.

경험자 조언

실습을 단감 농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배웠던 것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힘들었던 과정이었죠. 그때 배운 것이 업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 삶의 태도가 생기겠지만, 조금 더 빨리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경우에는 물려받은 게 별로 없어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이라고 봐도 무방했거든요. 승계를 받지 못했어도 새로운 시선으로 사업에 대한 고민을 해 본다면 답은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청년농업인,

그것이 알고 싶다!

Q. 언제부터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A. 진로를 일찍 정했다. 한국농수산대학 진학 전에 농고를 진학했지만 당시 농고에 가게 된 계기가 유쾌하진 않았다. 막상 농고에 진학하고 나니 개인적인 성향과 맞는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합이 잘 맞는 일이 농사라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뚜렷한 목표가 없었는데, 옆 반 선생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관심을 주셨고 뜬금없이 한국농수산대학 브로슈어를 가져다주셨다. 그때 한국농수산대학이 아니면 안 가겠다는 생각으로 입시 준비를 했다. 그리고 수시에 합격했다. 농고를 졸업해도 영농에 종사하는 경우는 0.1% 정도인데, 나는 처음부터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Q. 다른 사업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A. 자본 없이 시작하다 보니 자금 확보가 가장 절실했다. 지금 부대사업에 대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농업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되 도움이 될 만한 사업을 도모하고 있다. 농한기 때에 같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시너지 효과를 만들 수 있는 일을 더 찾아볼 계획이다.

Q. 현재 참여하고 있는 커뮤니티가 있다면 어떤 곳인가요?

A. 한국농수산대학에서 지원받았던 창의력 제고 사업과 상주시 4H회 회장을 맡고 있다. 나의 캐릭터가 레벨업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 모두 농업을 시작하면서 얻은 성과다. 점점 발전하고 시야가 넓어지는 자신을 확인할 때마다 스스로 신기하게 생각한다. 언뜻 들으면 조직 이름 같지만 ‘재경이파’라는 한국농수산대학 출신의 커뮤니티에도 참여하고 있다. 대구경북동문회 회장을 지낸 선배님 이름을 따 만든 모임이다. 한국농수산대학 인맥은 큰 보물이다.

이 인터뷰는 문화뉴스와 내일날씨가 공동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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