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햇빛샤워' 리뷰

 

   
 

[문화뉴스] 장우재의 시뮬라시옹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일 년 전 우연히 마주했던 '햇빛샤워'는 눈이 부셨다. 한 해가 가고 재연으로 돌아온 '햇빛샤워'는 빛이 바랠 법도 하건마는, 일 년 간 우리 세계가 변화보다는 정지의 상태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햇빛샤워'라는 시뮬라크르를 여전히 눈부시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 장우재 연출가

장우재 연출은 지난 21일 진행된 '대담 프로그램'에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관련된 영상을 소개했다. 그 영상은 '사람과 사물의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느껴지는 대로 그리는' 화가 피카소를 언급한다.

장 연출은 이에 "기승전결이라는 구조, 메시지를 명확히 제시하는 구조로 매번 작업을 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잡을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며 "우리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아는 대로 그려야 하고, 그래야 삶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덧붙여 "삶은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될 수 있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얘기했다.

 

   
 

프랑스 철학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을 '시뮬라크르(Simulacre)'라 지칭한다. 그에 의하면 현실 세계는,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인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지배하고 대체되는 곳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실체를 모방하는 단계가 사라져버린 상황을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 부른다.

연극 '햇빛샤워'를 통해 재현과 실재의 관계가 역전되고 있었다. 현실이라는 시공간(실재)에서 파생된, 즉 현실을 모방하고 있는 '햇빛샤워'(재현)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광자와 동교의 죽음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관계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말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 가상의 현상들이 그 어느 것보다 삶의 본질을 잘 담아내고 있다.

왜냐하면 삶은 논리와 상식으로 설명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를 덮치고 있는 숱한 비극적 상황들이 어째서 이런 양상을 띠며 전개되고 있는지 우리는 아무도 완벽하고 완전한 논리로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오히려 비논리와 모순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논리와 질서가 현실을 지탱하는 메커니즘이라고 굳게 맹신하며 살고 있다.

 

   
 

'광자'는 눈이 부셨다. 광자는 이름에 집착하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아무하고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다.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녀에 대해 제각각으로 증언한다. 또라이, 순수한 사람, 이기적인 여자, 근태가 성실했던 사원, 젊고 생기발랄한 처녀, 기억 안 나는 평범한 점원 등으로 증언 되는 '광자'. 우리는 도저히 그녀를 단 한 가지의 단어만으로 소개할 수가 없다.

극중 '과장'은 광자에 대해 '카피할 수 없는', '고유한', '가장 카피하고 싶은' 존재라 설명한다.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광자에게는 '전형'이랄 것이 없었고, 그녀의 칼부림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었다. 동교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설명할 수 없는 광자였지만, 동교의 삶에 가장 깊이 관여하고 있던 것이 바로 광자였다.

 

   
 

동교는 '아무 관계도 아닌 채로 살다가 아무 관계없이 가는 게' 목표인 소년이다. 세상과 관계 맺는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그 소년은 '햇빛'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왜냐하면 햇빛은 '세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똑같이 하루 몇 시간씩 햇빛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반면, '가난은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 주변이 불편한 것'이라 말하는 광자. 그녀의 삶은 '관계'를 배제하기 힘든 삶이다. 그녀는 '돈 없고 빽 없어서' '아무 남자하고도 잘 관계'한다.

광자와 동교는 무어라 정의내릴 수 있는, 명확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동교의 죽음에 아무 관계없던 광자는, 결국 극 말미에 스스로 동교와의 아득한 관계를 인정한다. 동교의 부모를 향한 그녀의 칼부림은 어떤 당위성이나 명분도 없는 것이었지만, 관객들은 그들의 관계성을 감각할 수 있다. 연극은 '이해'나 '인지' 대신 '감각'으로써 관객들을 광자와 동교의 세계에 깊이 관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삶은 부모에게서 버림받았고, 그들의 죽음은 세상에게서 버림받았다. 광자와 동교라는 존재는 '싱크홀(sink hole)'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무색하리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세계,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불행한 존재들을, 아니, 이 현실적인 존재들을 '현실'이라는 냉혹하고 비현실적인 이름으로 내팽개치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을 재현하는 '햇빛샤워'는 현실 안에서는 도저히 발견하기 힘든 그 본질들을 묘사하고 있다.

작년에 비해 더 생기발랄해진 광자, 본인의 존재 의미와 죽음의 과정을 더 강력히 설득하는 동교, 그리고 한층 더 비참한 '싱크홀'을 남기고 있는 무대. 연극 '햇빛샤워'는 올해도 눈이 부시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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