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 김솔 인터뷰

 

   
지난 20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김솔 디자이너를 만났다

[문화뉴스] "공연 포스터를 만드는 일이 '보통현상'이 되도록, 그리고 나아가서는 '특별현상이 되도록"

지난 달 4일, 제3회 서울연극인대상에서 연극 '수갑 찬 남자'의 포스터로, 김솔 그래픽 디자이너가 '스태프상 시각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창극 '아비, 방연', 연극 '환도열차', '프랑켄슈타인',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벚꽃동산', 짙은&김지수 콘서트 '겨울날' 등의 포스터를 디자인한 김솔 디자이너는 현재 공연기획사인 '아이디서포터즈'와 공연 전문 디자인회사인 '보통현상'의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20일 대학로에서 만난 김솔 디자이너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공연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일만으로도 생계가 유지될 수 있는 '보통의 직업'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숱한 관객들이 공연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경로가 바로 '포스터'를 통해서가 아닐까 한다. 공연의 인상, 곧 공연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포스터를 만드는 이들의 고충. 주목하지 않았던, 또한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이 분야에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무심했는지 김 디자이너와의 대화를 통해 발견하게 됐다.

당연하다고 해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포스터를 만드는 작업은, 또 다른 창작의 작업이었다. 공연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연을 이미지화 시킨다는 일은 결코 쉽거나 단순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포스터 디자이너가 이 공연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리고 그 해석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어떻게 표현해낼 것인지 고민하는 작업들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포스터는 그렇게 탄생했다.

흔하지 않은 직업, 그러나 여느 직업들과 같은 '보통의 직업', 앞으로는 '특별한 직업'이 될 공연 포스터 디자이너. 그리고 이곳에서 잔뼈 굵어진 베테랑 디자이너 김솔이 궁금해졌다면, 아래 글을 더 읽어보자.

 

 

   
 

디자인만 공부하지 않고, 공연을 배우기도 하고 실제로 공연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공연 포스터 디자이너다. 공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다.
ㄴ 어릴 때는 내성적이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못 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인 그림을 하게 됐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연극 동아리를 하게 됐는데 정말 새로운 느낌이었다. 연극은 '공동 작업'이다. 내 상상과 남들의 상상을 조율하며 실현하는 것이 재밌었다. 그래서 연극을 더 하고 싶었는데 연극을 만드는 쪽에는 재주가 없었다. 여차여차하다 보니 결국엔 공연 포스터 디자인을 하게 됐다.

 

공연 포스터 디자인 파트만 '따로 맡아서 한다'는 자세가 아니라, 연극을 '만드는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는 것 같다.
ㄴ 무대 디자인을 하든 배우를 하든, 작품을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의견을 조율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건물 짓는 것이나 다른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건물주와 얘기하며 조율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중요한 건 내가 '뭘 하고 있느냐'다. 예전에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과연 내가 '연극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디자인은 거의 하지 않고 연극 포스터만 디자인하고 있다. 게다가 연극 대본을 보고 해석해가는 과정이 기존의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이제는 내가 하는 것이 '연극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 작년 11월 26일부터 12월 5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 창극 '아비, 방연' 포스터 ⓒ 김솔

공연 포스터는 공연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완성되지 않은 공연을 이미지화 시키는 작업, 곧 포스터를 만드는 작업은 주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나?
ㄴ 사실 아직도 어렵고, 고민이 많다. 제일 좋은 건 대본을 읽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뚜렷이 생기면 좋은데 그런 건 만나는 작품 10작품 중에 2편 정도밖에 안 된다. 대본을 많이 읽으면 답이 보인다고들 한다. 확실한 것은 연출가나 프로듀서들은 나보다 대본을 많이 읽은 분들이다. 그래서 공연에 대한 나의 생각을 그분들께 말씀드리고, 답을 구하기도 한다. 그분들의 대답을 들으며 수용하기도 하고 조율하면서 작업이 진행된다.

 

 

   
▲ 제 3회 아이디페스티벌 불후의명작 ⓒ 김솔

현재 공연 기획사인 '아이디서포터즈', 공연 전문 디자인회사 '보통현상'의 대표로 있다. 우선 '아이디서포터즈'가 무슨 회사인지 궁금하다.
ㄴ '아이디서포터즈'는 이동근이라는 책임 프로듀서로 인해 만들어진 회사다. 이 피디는 원래는 연극을 하고 싶어 했지만 집안 반대 때문에 잠시 꿈을 접어뒀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연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케이스다. 이 피디가 예전에 사고를 당해 전신화상을 입은 적이 있다. 당시 생명이 위급한 상태에서 삶을 되돌아보며, 자기가 죽더라도 꼭 하고픈 게 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단다. 그때 떠오른 게 연극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모아 어렸을 때부터 같이 연극을 꿈꿨던 친구들, 혹은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뮤지션들을 모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사진 찍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 강의하던 사람, 배우 등 각기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공연기획사'라고 표현은 하지만, 우리가 같이 꿈꿔왔던 멋진 공연을 만들어가자는 모임이다. 어렸을 적 우리에게 감흥을 줬던 멋진 공연들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그런 감흥이나 감동을 줄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목표다. 당장은 우리가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연을 기획하는 것부터 제작하는 과정까지 모두 경험을 쌓아가는 중이다. 회사 차린 지는 6개월 정돈데, 현재 10작품 정도 참여했다.

 

그렇다면 '보통현상'은 무슨 회사인가?
ㄴ 이동근 피디가 처음 모였을 때 각자의 꿈을 말해보라고 했다. 당시 나는 '분명 남들이 볼 때는 성공한 디자이넌데 왜 가난하지?'라는 고민이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았으면 하는 꿈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연극 포스터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다른 연극 포스터 디자이너들도 비슷한 상황이니까 먹고 살기 위해 다른 포스터도 겸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목표가 생겼다. 연극 포스터 디자이너가 '보통의 직업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통현상'이라는 공연 전문 디자인회사가 생겼다.

홍영화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는 내가 롤모델이라고 했다. 그때 참 불편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같이 일하고 싶은데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롤모델로 비춰지려면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들이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같이 하자고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보통현상'이 잘되고 나면 '특별현상'을 만들려고 한다. '보통의' 직업을 넘어서 '특별한' 직업이 되기를 바란다.

 

 

   
▲ 오세혁 작가와 악연이 될 뻔한 사연은? ⓒ 김솔

극단 걸판의 연극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지켜줄 거야 친구야' 때문에 극작가 오세혁과 악연이 될 뻔했다고 알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었나?
ㄴ 당시 서울연극협회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연극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 오세혁 작가가 '연출의 글'을 주지 않고 있었다. 글 좀 써달라고 12시가 되어서 문자를 보냈다. 4시까지 준다고 답장이 와서 기다렸는데 또 안 줬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 '왜 안주냐. 당신만 안 줬다'고 말했다. 주변에 오세혁이라는 극작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더니 모두들 천재라고 했다. 나는 '대단하면 다야? 왜 글을 안줘?'라 생각하던 차였다. 이후 오세혁 작가가 문자로 딱 한 줄 넘겨줬다. 다른 연출가들 A4용지 반 장은 채워주는데 말이다(웃음).

나중에 오세혁 작가에 대한 앙심(?)을 품고 그의 연극을 이 악물고 봤다. 절대 웃지 않을 거라며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웃음이 터지더라. 그래서 신나게 웃다 왔다. 공연 끝나고 뒤풀이에 따라가서 오세혁 작가한테 말 걸어보고 싶었는데 역시나 인기가 많았다. 기다렸다가 작가와 말하며 오해를 풀었다. '이 작품 포스터를 다르게 만들면 어떻겠냐' 물었다. 그러나 오 작가는 돈이 없어서 그러기 힘들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럼 나중에 포스터 제작 여건이 생긴 공연을 맡게 되면 나와 해 달라'는 조건을 걸고 그 공연의 포스터를 다시 제작했다.

 

작가 하나만 믿고 무료로 제작을 한 건가?
ㄴ '무료'가 아니라 '투자'다. 나중에 반드시 돌려받을 거다. 나는 명확한 사람이다. 절대 '그냥' 해주는 것은 없다(웃음).

 

 

   
▲ 김솔 디자이너의 인생을 바꿔준 연극 '여기가 집이다' ⓒ 김솔

인생을 바꾸게 해준 특별한 인연의 포스터 두 작품을 '여기가 집이다'와 '환도열차'로 꼽았다. 극단 이와삼과 장우재 연출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나? 아니면 작업 과정 중의 특별한 사연이 있나?
ㄴ 연극 '여기가 집이다' 작업을 맡았을 때가 인간적으로 인성이 가장 망가졌을 때다. 너무 일하기 싫었다. 한 달에 열 작품을 맡다 보니 거의 쉬지 못했다. 하루에 두 세 시간만 자고,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며 밥 먹는 생활을 2년 정도 했다. 그런데도 돈은 여전히 안모이고, 몸은 점점 안 좋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을 보러 다니는 것이 힘들었다. 극단들에게서 여유가 없다는 말을 들으며 작업을 의뢰받곤 했는데, 그런 말을 듣기도 싫었던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여기가 집이다' 대본을 받았다.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다. 무대 디자이너로서 봤을 때, 무대에서 고시원을 구현하는 게 참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시원 안에서 세 커플이 성교하는 걸 고등학생이 지켜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납득이 안 됐다. 열심히 하기 싫었다. 그래서 연습도 안 가고 대충 했다. 공연도 안 보려고 했다. 어쩌다 시간이 생겨서 공연을 보게 됐는데, 공연을 보자마자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때 '내가 정말 큰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이후 5번을 내리 보며 계속 울었다.

 

   
▲ 김솔 디자이너의 인생을 바꿔준 또 다른 연극 '환도열차' ⓒ 김솔

공연 이후 장 연출님께 인사드렸다. '내가 이 작품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며 다른 작업 때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드렸었다. 죄송한 일이지만, 이후에 연출님이 같이 작업하자고 연락 왔지만 바빠서 못했다. 그러고 나서 장 연출님이 다음 작업을 같이 하자고 또 연락을 주셨다. 보통 작업 의뢰는 한 달 전 즈음 연락을 주곤 하는데, 이 작업은 6개월 전부터 연락을 주셨던 것이었다. 그게 '환도열차'다.

그 동안 소극장에서만 작업하면서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일을 했다. 그러나 '환도열차'를 통해 예술의전당이라는 큰 극장과 처음 작업하게 됐다. 페이도 대학로에서보다 두 배 정도를 받았다. 그런데 난관이 있었다. 보통 대학로 공연은 한 달 전부터 홍보하면 됐었는데, 여기는 세 달 전부터 홍보가 들어가니 대본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포스터를 만들게 됐다. 이때 정말 고생했다. 시안도 50개나 만들었다.

이후 다른 작업할 때 자꾸 예술의전당에서의 작업이 떠오르더라. '그때는 돈을 많이 받았다고 열심히 했었는데, 이건 돈이 안 된다고 작업들을 대충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들. 돈을 위해서만 일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이후 작업부터는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시안도 많이 만들고 공을 더 들였다. 그러더니 작품 질이 좋아졌고, 이후부터는 큰 작품들도 많이 맡게 됐다.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

 

 

 

   
▲ 작년 7월 9일부터 26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 '햇빛샤워'. 올해 재연으로 돌아온 이 연극은 오는 5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다시 공연된다 ⓒ 김솔

연극 '햇빛샤워' 포스터 촬영의 숨은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다.
ㄴ 너무 작업을 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원래 관단체에서는 업체와 계약하기 때문에 당시의 나 같은 개인 디자이너는 고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산예술센터와 같이 작업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아는 분이 남산예술센터에 AD로 계셨다. 그분이 연락을 주셔서 '햇빛샤워'의 작업을 같이 하게 됐다.

당시에 영화 미술팀에서도 일하고 있었는데, 사고로 5년 동안 쌓아온 자료를 모두 날리게 됐다. 남산 측에 시안을 제출하고 계속 남산과 같이 일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장 며칠 내로 시안을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도저히 영화 쪽 일을 같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그만두고, PC방 야간 정액권을 끊어서 '햇빛샤워' 포스터 작업에 몰두하게 됐다. 다행이도 그 시안이 잘돼서 남산과 계속 일하게 됐다.

남산에서 작업하게 됐을 때 전폭적으로 밀어주셨다. 바로 '세트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건 거절당했다(웃음). 결국 세트는 포기하고, 이 작품을 누드 컨셉으로 진행하게 됐다. 김정민(연극 '햇빛샤워' 광자 役) 배우와 일주일동안 사진 찍으러 다녔다. 내가 생각한 구도는 반 지하 자취방에서 한 여자가 혼자 창가에 옷을 벗고 햇빛을 쬐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욕하는 것이었다. 여담인데, 사실 웃긴 상황이다. 자기 집에서 옷을 벗든 무얼 하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인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 모습을 엿보고 욕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웅크린 자세를 요청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모습은 섹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의를 입고 사진을 찍게 됐다. B컷 중에 거울을 배경으로 한 사진도 있었다. 누구나 다 자기 안에 '썅년'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배우의 얼굴을 노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장 연출님의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노출을 안했다. 그러나 올해 포스터는 (얼굴) 노출을 하셨더라(웃음).

 

 

   
 

본명은 '김재혁'이다. '김솔'이라는 예명을 쓰는 이유는?
ㄴ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이름이다. 고등학생 시절까지 늘 모범생 같은 삶을 살았다. 내성적이니까 친구도 없고 혼자 그림 그리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그러다보니 내 인생이 그려졌다.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삶.

학교에서 수업 빠지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백일장에 나가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글짓기로 나가다가 고등학교 때부터는 그림으로 나갔다. 상도 타고 칭찬도 받았다. 선생님께서 당시에 미술을 본격적으로 해보는 것 어떻겠냐고 물어보셔서, 마음이 혹했다. 부모님께도 미술로 가면 더 좋은 학교를 갈 수 있다고 설득하게 돼서 가게 됐다.

이름을 버리고 싶었다. 업적위주의 상징을 버리고 싶었다. 처음에 지은 예명은 '백화솔'이었다. 거꾸로 하면 '솔화백'이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담겼다. 그런데 이름 같지 않아서 그런지 모두 그렇게 불러주지 않았다. 결국 '김솔'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왜 '솔'인가?
ㄴ 그림을 그리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도구 중에 '붓(솔)'을 생각하게 됐다.

 

최근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영화 포스터들이 비슷비슷해서 헷갈린다는 평이 돌고 있다. 공연포스터 디자이너로서 이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ㄴ 현재 영화 포스터디자인은 '프로파간다'라는 회사가 대세다. 프로파간다에는 포스터에 미친 분들이 모였다. 영화뿐만 아니라 주요 대학들의 포스터까지 섭렵하고 있다. 그들의 디자인이 워낙 좋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포스터) 시장이 작기 때문이다. 잘하는 디자인을 따라할 수밖에 없다.

나보다 공연 포스터 디자인계에 먼저 계셨던 분이 노운 씨가 있다. 나도 초반에는 그분을 많이 참고했다. 요즘에는 내 디자인을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앞선 사람의 작품을 참고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어느 과정이 지나면 극단이나 공연의 색깔에 맞추게 돼 있다.

 

 

   
▲ 지난 4일부터 다음 달 12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에서 공연되는 연극 '만리향' 포스터 ⓒ 김솔

문화뉴스 독자들에게 제일 소개하고 싶은 포스터가 있다면?
ㄴ 지금 하고 있는 공연 중에, 연극 '만리향' 포스터를 소개하고 싶다. '가지고 싶은' 포스터를 만들도록 노력한 작품이다. 한편으로는 '레미제라블'처럼 브랜드화 시키고 싶어서 심플하게 냈던 작품이다. 예전에는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도난당한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연극이 지금보다 큰 시장이었을 때 이야기다. 이제는 그런 사례가 없다.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그런 기분을 맛보고 싶다. 내가 디자인한 작품의 포스터가 도난당했을 때의 기분 말이다. 누군가 떼어갔으면 좋겠다. '만리향' 포스터 많이 찍어놨으니 많이 가져가셔도 된다(웃음).

 

 

   
▲ 제3회 서울연극인대상에서 연극 ‘수갑 찬 남자’의 포스터로, 김솔 그래픽 디자이너가 ‘스태프상 시각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 김솔

제3회 서울연극인대상에서 연극 '수갑 찬 남자'의 포스터로, 스태프상 시각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이후 본인 SNS 계정에서 "이 상을 받기 전에 부끄러운 지난날에 대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페이스북이든 오프라인에서든 저는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라는 수상소감을 남겼는데, 과거의 김솔은 어떤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이었나?
ㄴ 문제는 돈이었다. 나는 열심히 작업하는데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다. 원래는 무대 디자인이나 연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걸 할 수 없어서 포스터 디자인을 하고 있던 차였다. 냉정히 말하자면, 고깃집 전단지 만드는 게 돈이 더 된다. 훨씬 편하게 돈 벌면 배우든 뭐든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왜 연극 포스터를 만들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던 때였다. 연극하는 사람은 누구나 힘든데,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는 것도 미안하고 힘들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정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있어도, 돈 주면 해야 한다. 그게 힘들었다.

나도 연극을 만들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화가 난 상태였다. 내가 하는 일이 하찮은 일 같았다. 그러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없었다. 포스터에 포스터 디자이너 이름을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스태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극단 산수유에서 처음으로 디자이너 이름 넣는 것을 허락해줬는데, 무슨 단어로 나를 설명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화가' 김솔로 했다. 그러다가 인쇄 디자이너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서,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말을 찾게 되고, 이제는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말을 많이 쓰고들 있다. 상을 타면서 우리도 하나의 스태프로 인정받아 매우 기쁘게 생각했다.

 

 

   
 

더불어 "이 상이 제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공연 포스터를 만드는 일이 하나의 스태프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라는 소감도 밝혔는데, 공연 포스터 디자이너로서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ㄴ 이 상을 또 받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른 디자이너들이 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디자인도 사진도 야매로 시작해서 자신감이 없었다. 많은 디자이너들도 상황이 비슷할 것이다. 포스터 디자이너들은 인터파크에 스태프로 등록이 안 되고, 예술인으로도 인정받지 못 하기도 한다. 나중에 꼭 공연 포스터 디자이너들끼리 일 년에 한 번 전시회를 열어 포스터를 '전시'하고 싶다.

또한 대학로에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다. 대학로에 공연 전문 스튜디오가 없다. 연극 '햇빛샤워' 때부터 생각했던 것인데, 스튜디오가 있다면 충분히 양질의 포스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명동에서 '빛의 제국' 포스터를 봤다. 프로파간다가 맡은 포스터였다. 이 포스터는 목정욱이라는 작가가 사진을 찍었다. 충무로에서 제일 핫한 작가다. 입체적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적어도 조명 기기를 열 대 정도 사용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사람부터 차량까지 조명에 들어가는 돈이 꽤 커진다. 대학로에 아는 작가들 모여서 장비 공유할 수 있다면 장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포기했던 작업들을 다 같이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부심이 없으면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자부심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하는 일이 내 생계를 책임질 수 있도록 말이다. 나에게는 연극이 기회가 됐다. 연극을 통해 디자인을 모르던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고, 사진을 모르던 사람이 사진을 찍게 됐고, 작품을 해석하는 능력이 생겼다. 이런 과정처럼 뮤지컬이나 영화 시장에 진출하고 싶다. 또한 MD상품도 만들고 싶다. 공연관련 상품들을 대학로에 있는 다른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해 판매하고 싶다. 연극 포스터 디자인 비용을 제대로 받지 못하더라도, MD상품으로 판매 수익이 생긴다면, 일에 대한 자부심이 생길 거라 생각한다.

 

MD상품 기획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개인적으로 '공연을 무엇으로 남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많이 했다. 정말 좋아하는 공연을 계속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팬들이 가질 수 있는 관련 상품은 리플렛, 프로그램북 정도가 고작이다. 포스터는 구하기도 어렵고 말이다.
ㄴ 포스터를 간직하기 어렵다는 말은, 곧 포스터가 '예술'의 영역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포스터는 내 방 벽에 걸어놓을 수 있는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다. 아쉬운 점이 바로 그거다. 장기적으로는 포스터를 자신의 방 벽에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예술적으로 갔으면 한다. 그게 바로 앞서 말했던 '특별현상'이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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