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어떤 글을 보면 '피난'과 '피란'이 섞여 나오고, 어떤 때는 '피난'이나 '피란'이 하나만 보이기도 하는데 '피난'이 '피란'같고 '피란'이 '피난'같기도 하다는 알쏭달쏭한 기분이 드는 건 무엇일까?

'피난'과 '피란' 때문에 혹시 많이 놀라거나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혹시 이 두 낱말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두음법칙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한 적은 없는가? 그리하여 '피난'은 잘못 됐고 '피란'이 옳은 표기라는 생각이 들진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면 '피난'과 '피란'은 둘 다 올바른 표기다. 그리고 뜻이 약간 다르다. 뜻이 달라서 성격과 활용도 다르다. 즉 '피난'과 '피란'은 다른 낱말로서 따로 존재한다.

'피난'과 '피란'은 결코 두음법칙 때문에 '난'과 '란'이 뒤섞여 쓰이는 말이 아니다. '난'과 '란'이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난'은 '어려울 난(難)', '란'은 '어지러울 란(亂)'을 쓴다. 이 두 낱말 가운데 두음법칙이 적용되는 건 '란'이다. '란'은 낱말의 첫머리에 놓이면 '난'이 되지만 낱말 중간이나 뒤에 놓이면 '란'이 된다. 본래의 소리값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避難'은 '피난', '避亂'은 '피란'이 된다. 이 둘의 차이는 천재지변 등 인간이 아닌 다른 자연 현상의 변동으로 생긴 '재난'이냐 인간에 의해 인위로 발생한 '난리'냐에 있다.

이들 한자가 생긴 때는 지금과 같이 전투기나 장갑차 등 무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자연 재해를 하늘의 조화로 여기고 있던 때였다. 지진도 많이 일어났고, 화산도 곳곳에서 활동하던 그때였다. 가뭄이 장기간 지속되면 먹을 것이 부족했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간에 폭우가 줄기차게 쏟아지고 하던 그때 인간들은 자연 재해를 천명으로 여겼다. 이처럼 어려울 때는 며칠이고 굶주려야만 했다. 폭군이나 탐관오리가 있었다면 폭정이나 지나친 세금으로 등골이 휘도록 고생해도 생계를 이어 나갈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산적이나 비적이 되기도 했다.

홍수나 지진 등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그 일대에서는 먹을 것은 물론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재난 지역에서 벗어나 먹을 것이 많고 살기 좋은 곳으로 떠나야만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재난 지역은 살기가 어려워서 좀 더 나은 곳으로 피해야 했다. 이리하여 '어려운 난'이 등장하면서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풍요로운 곳으로 피하는 것을 '피난'이라고 한다.

종종 산에서 활동하던 산적이 마을을 습격하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국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와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목숨을 앗거나 납치하기도 했다. 말을 타고 돌아다닐 때면 흙먼지가 일고, 적군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집에 불을 놓고 골목골목을 들쑤시고 하면 몹시 어지러웠다. 양민 등 일반인들은 혹시나 잡혀서 곤욕을 치르지나 않을까, 말발굽에 짓밟히거나 칼 혹은 창에 찔리지나 않을까 하며 정신이 몹시 어지러웠다. 말 그대로 혼비백산했다. 이러한 대소동이 벌어지면 '어지러울 난'이 활개를 쳤다. 그리하여 힘도 없고 싸울 수도 없는 양민들은 이렇게 어지러운 지역에서 안전한 장소로 급히 몸을 숨기거나 멀리 도망을 쳐야 했다. 이것을 '피란'이라고 한다.

'피난'은 인간의 힘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해일 등 천재지변이나 팍팍한 도시 생활,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주택 공급, 기나긴 가뭄으로 인한 수돗불 공급 중단 등은 인간의 힘이 직접 작용한 어려움이 아니다. 이때 '난'을 사용한다. 이에 비해 전쟁, 쿠데타, 무법천지, 폭력배 난동 등 인간들의 무차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 때에는 '란'이 된다.

예를 들어 '임진왜○'에서는 전쟁이라는 어지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란'이 쓰인다. 그렇다면 이를 줄인 '임진○'에서는 무엇이 쓰일까? 마친가지로 '란'이 된다. 이때 '임진'과 '왜란' 및 '란'을 띄어 쓰게 되면 각각 '임진 왜란', '임진 난'이 된다는 점에 주의가 요망된다. '란'이 띄어 쓰기가 되면서 낱말의 첫머리에 놓이거나 홀로 되면 두음법칙이 적용돼 '난'이 되기 때문이다.

'전세○', '인력○'과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직접 개입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난'을 써서 각각 '전세난'과 '인력난'이 된다. '난'은 본 음가가 '난'이기 때문에 두음법칙과 상관없이 낱말의 머리에 놓이거나 중간 또는 뒤에 위치해도 변함없이 '난'이 된다.

한편 '난민'이라는 낱말이 있다. '피난'과 '피란' 두 상황 모두에서 쓰인다. 그러나 활용에서 한자가 다르다. '피난'의 뜻으로는 '難民', '피란'에서는 '亂民'이 된다. '난민' 때문에 '피난'과 '피란'의 파생어인 '피난민'과 '피란민'을 혼동하면 안 된다. '피난민'과 '피란민' 역시 '피난'과 '피란' 각각의 뜻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문화뉴스 조진상 기자 ackbarix@mhns.co.kr

[도움말] 가갸소랑 우리말 아카데미(http://www.soranga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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