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34 하네스 홀름 감독의 '오베라는 남자'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심술이 얼굴에 개기름 번지듯 흐르고, 불만은 여드름 터지듯 괴팍하게 분출된다. 그런데도 정이 간다. 어르신께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귀엽다는 인상마저 준다. 오베는 그런 사람이다. 호랑이 같던 노인이 실제로는 심장만 호랑이만큼 컸던 고양이였다는 진실을 깨닫게 될 때 즈음엔,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오베, 당신이 늘 화를 내는 이유는 뭐죠?'
 
오베(롤프 라스가드)의 삶에 깔린 분노를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는 소냐(이다 엥볼)였다. 그녀의 죽음 이후 오베는 분노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태로 삶을 지속한다. 그 폭탄은 세상을 향해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폭발할 대상이 없을 때, 오베는그 폭탄을 자신을 향해 겨눈다. 그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려 했고, 그로써 소냐의 곁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가 가진 분노는 어디서 오는 걸까.
 
   
 
 
행복을 향한 경계, 분노
행복을 줬다가 금방 빼앗는다. 좀 좋아진다 싶으면, 아픔을 준다. 오베를 두고 밀당을 하는 인생이라는 녀석. 오베는 이런 운명이란 것에 분노를 가질 만하다. 인생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 두 극점 간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이 대척점 사이의 거리는 멀 것 같지만, 생각보다 꽤 가까웠다. '오베라는 남자'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인생의 아이러니, 두 극점 간의 간격을 보여준다.
 
아들의 성적표를 보고 기뻐하던 오베의 아버지. 그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이에 오베도 마음을 놓고 장밋빛 미래를 그리려 하는데....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기차에 부딪혀 생을 마감한다. 수년 동안 했던 일, 수없이 걸었던 철도에서, 대낮에 익숙한 기차에 '방심'하다 부딪혀 맞이한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럽다. 그리고 오베가 아버지를 기쁘게 했던 일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돌아온 것도 당혹스러운 아이러니다.
 
이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순간 찾아온 작별이며, 잔인한 보상이다. 더구나 아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 기뻐하던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그의 죽음은 아들마저도 철길에 묶어둔다. 아들은 아버지의 공간을 물려받았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공간에 갇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오베에게 찾아온 다음 아이러니엔 만남과 이별이 맞물린다. 임신한 소냐의 배에서 아이의 발길질을 느끼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오베. 그런데 아이와의 첫 만남으로 기쁨이 극대화된 바로 그 순간…. 버스는 길을 이탈해 추락한다. 오베는 그렇게 아이와 처음이자 마지막 작별을 한다. 만남과 이별이 동시에 일어나는 아이러니. 이 사고로 아내는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고,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오베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잠시 화장실에 갔던 것이 그렇게 큰 대가를 내야만 하는 일인가.
 
최고의 순간과 함께 찾아오는 최악의 순간. 이 아이러니 앞에 오베는 운명이라는 잔인한 존재에 분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오베처럼 최고의 순간 다음에 최악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면, 차라리 행복을 거부해버리는 편이 덜 상처받는 방법이 아닐까. 그 정도로 그의 삶은 만신창이었다. 불행을 만나지 않기 위해 행복을 경계하는 몸부림. 덜 아프기 위해 언제나 분노하는 오베의 저항. 운명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인간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태도가 분노일 수 있음을 오베를 통해 본다.
 
   
 
 
약자를 위한 분노
불행한 사고 이후 하반신을 잃은 아내를 위해 오베는 특별한 선택을 한다. 아내를 세상에 적응하게 돕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아내에게 맞게끔 바꿔버린다. 집의 인테리어를 낮게 개선하고, 아내가 쉽게 이동할 수 있게 집안의 문턱도 다 없앤다. 세상이 제시한 기준을 아내에게 맞는 기준으로 다 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아닌, 아내와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된다. 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도, 사고 전과 다를 것 없이 능동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했다.
 
세상의 기준을 바꾼다는 것은 기준 밖에 있는 소외된 자들을 위한, 그리고 수없이 많은 편견과의 싸움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다리가 불편한 상황에서도 소냐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어렵게 그녀가 맡게 된 반에는 학업 성적이 많이 뒤처지거나, 문제아라고 평가받는 학생들이 있었다. 소냐는 누군가에게 문제아라 평가받는 학생들에게 다가갔고, 아이들도 그녀에게 마음을 연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녀만이 그 특별한 반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그 학생들과 눈을 맞출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위에서 그들을 내려 보면서 낙인을 찍고, 사회와 격리하려 했지만, 소냐는 휠체어에 앉아 그들과 동등한 높이에서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소냐 스스로가 사회의 편견과 싸워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소통이 더 원활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다른 선생님들이 하지 못한 일을 다리가 불편한 소냐가 해냈다.
 
이런 소냐의 영향을 받은 오베는 사회의 약자, 소외당한 자들을 무시하지 못한다. 온갖 짜증을 다 내면서도 이사 온 타국의 이민자, 아이들, 동성애자, 집 없는 고양이, 장애를 겪는 친구 등을 위해 따뜻한 면을 숨기지 못한다. 그는 이들을 위해 큰 목소리를 내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여기서 오베의 분노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태도이며, 그들에게 따뜻하지 못한 세상을 향한 나무람이다. 세상이 그들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라는 꾸짖음이기도 했다.
 
   
 
 
와이셔츠 입은 것들을 향한 분노
'오베라는 남자'에서 오베가 폭우 속에서 경사로를 만드는 장면은 뭉클함을 준다. 세상이 아내에게 관심을 둬 주지 않고,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때, 오베는 아내를 위해 직접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직접 만든다. 소냐도 이 사회 속에 살아가는 하나의 구성원이고 존중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은 국가 혹은 사회가 직접 나서 해줬어야 하는 일이었다. 오베가 행정적 절차를 걸쳐 많은 청원을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경사로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이렇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행정가들은 오베에게 '와이셔츠 입은 것들'로 분류되는데, 오베와 이들의 악연은 꽤 골이 깊다.
 
과거 자신의 집을 철거하려고 했던 공무원부터 시작해서, 경사로를 만들어 주지 않은 이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친구 루네를 병원에 데려가려는 이들. 오베의 주변엔 꽤 다양한 부류의 와이셔츠 입은 것들이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책상에 앉아 일할 줄은 알지만,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는 무관심한 이들이라는 데 있다.
 
뭔가 점잖게 일은 하고 있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을 전혀 개선시키지 못하는 이들. 이들은 서류 등으로 세상을 정리, 정의하고, 분류한다. 오베는 이런 탁상행정이 약자와 소외받는 이들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자신과 소냐를 도와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약자를 위해 대체 무엇을 했는가.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수많은 서류와 절차 속에 그들은 숨어버린 것이 아닌가. 오베는 그런 점들에 분노했다.
 
'오베라는 남자'가 우리 사회에 던질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재미있게도 최근 선거가 끝났고, 많은 대표들이 선출되었다. 이분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들의 상처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와이셔츠 입은'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사회 구성원과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추며 고민을 들어주지 못한다면, 서류 속에 묻혀 진짜 삶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오베가 자신을 '와이셔츠 입은 것들'로 분류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그의 날선 분노가 자신을 향하지 않게 주의하시길. 오베의 분노 앞에 쩔쩔매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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