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35 존 카니 감독의 '싱 스트리트'

   
▲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이번에도 음악 영화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음악이라는 매개체. 존 카니 감독 영화가 가지는 큰 틀이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은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인물의 목소리로 가사 읊고, 그로써 내면을 음악화, 문자화한다. 그런데 (감독은 몰랐겠지만) 가사를 자막으로 보는 관객에게 인물의 감정은 문자로 중계되는 중이다. 이러한 전달은 너무 직설적이고 정직한데, 인물의 감정은 '설명'되고 있으며, 이는 덜 영화적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싱 스트리트'의 화법은 촌스러웠다.
 
촌스러운 화법을 가졌음에도 '싱 스트리트'는 매혹적이고, 인상적인 영화였다. 귀를 때리는 음악이 영화의 만듦새를 가리고, 또 관객의 감정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을 웃고 울게 하는데 성공한다. 연기와 영상, 음악이 관객을 무너뜨리는 이 조율, 조화는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이는 음악과 영상의 조합을 이해하는, 그리고 음악이 배치될 타이밍을 잘 인지하고 있는 존 카니 감독의 역량일 것이다.
 
   
 
 
뮤직비디오, 뮤직 무비
뮤직비디오의 영화화라고 해야 할까. 이변 영화의 각 시퀀스는 특정 곡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과정을 담고, 그 영상이 완성됨으로써 완결된다. '원스', '비긴 어게인'이라는 '음악' 영화를 만든 감독이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소년을 소환한 것은, 자신의 아바타를 소환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그는 이 페르소나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비긴 어게인'으로 자신의 세계가 더블린을 떠나서도 안정적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 감독이 이번에 선택한 공간은, 뜻밖에 다시 아일랜드다. 그리고 80년대라는 과거를 무대로 배치한다. 자신의 뿌리에 다시 돌아온 존 카니. 그가 '싱 스트리트'로 관객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뭘까. 단순히 복고풍의 좋은 '음악'이 주는 파괴력을 떠나, 그의 작가적 방향을 읽어보고 싶었다. 이 작품 이후에도 더 확장되고 두꺼워질 존 카니의 세계를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Track 1. Brown Shoes
존 카니의 카메라
'싱 스트리트'는 태양이 숨어 있는 듯한 영화다. 빛이 존재함에도 물 먹은 수건처럼 처진 느낌. 우중충한 대기가 이 영화를 지배한다. 활기가 없는 무채색의 공간. 존 카니가 소환한 아일랜드의 80년대는 그랬다. '코너'를 연기한 페리다-윌시 필로의 연기가 인상적인 이유 중 하나는, 아무리 기쁜 상황에도 아일랜드의 그 우울한 기운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드러난다는 데 있다. 무채색 도시의 빛을 잃은 아이. 그게 '코너'다.
 
   
 
 
감독은 이 도시를 아름답게 담는 데 관심이 없다. 허름하면 허름한 대로, 공허하면 공허한 대로 거칠고 리얼하게 이 공간을 담았다. 한 평론가가 이 영화를 관람한 뒤 '빌리 엘리어트'를 언급했는데, 영화의 플롯(소년의 성장)뿐만 아니라, 어딘가 빛을 잃은 삭막한 공간을 재현했다는 점에서도 동의한다. 밴드가 무대에서 연주할 때 등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싱 스트리트'의 카메라는 다큐멘터리 풍의 날 것의 느낌을 준다.
 
영화의 시점인 카메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 '싱 스트리트' 속의 거칠고 흔들리는 카메라는 불안한 아일랜드 대기 분위기를, 그리고 불안정한 아이들의 심리를, 또 그 속에서 꿈꿔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아이들의 상태를 담기 위한 적절한 선택이었다. 물론, '싱 스트리트' 만의 카메라 워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원스', '비긴 어게인' 때도 존 카니는 핸드헬드를 자주 사용했으니까. 이젠 그의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카메라의 워킹은 그가 만든 음악적 세계와 성장하는 인물을 포착하는 데 뛰어나다.
 
하나 더 말하자면 롱 테이크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이 롱테이크는 '비긴 어게인' 때보다 더 많은 빈도로 활용하고 있기에 지난 영화와의 변별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두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선, '에먼'(마크 맥케나)의 집에서 연주하는 아이들을 담은 롱 테이크. 이 장면에서 아이들 주위를 부유하는 카메라의 롱 테이크는 밴드 연주의 리듬을 깨지 않은 채 그들을 담으려 애쓴다. 인위적 컷이 침투해 밴드의 조화에 균열을 가져오지 않으려 했다. 밴드가 결성되고 드디어 하나가 되었듯, 카메라는 하나의 테이크로 그들을 묶어낸다.
 
다른 하나는 '코너'와 '라피나'(루시 보인턴)가 걸을 때 사용한 롱 테이크다. 이는 감독이 두 사람이 만드는 대화의 리듬을 방해하지 않으려 한 것이고,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관객은 두 사람이 만드는 리듬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그들의 표정과 반응에 몰입한다. 컷이 인위적으로 봐야할 것을 주입하지 않기에, 강요하는 정서가 없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촬영을 극대화로 사용한 감독 중 하나는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으로, 그 역시 인물이 만들어낸 날 것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무채색 도시, 붕괴한 가정의 소년들
다시, 무채색 도시로 돌아오자. '코너'가 새 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 교장은 갈색 신발을 검은색 신발로 바꿔 신으라 '명령'한다. 교칙이 허가하지 않는다는 명목을 내세워, '코너'가 가진 유일한 색깔을 뺏는다. 이후 밴드에 몰두하며 '스타일'을 추구하던 '코너'는 또 한 번 교장에게 '염색'한 걸 되돌리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지만 교칙에 없는 항목임을 내세워 '코너'는 저항했다.
 
소년의 저항은 타당했지만, 교장은 폭력으로 그의 색을 또 한 번 뺏는다. 이 학교에서 고유의 색을 갖는 것은 폭력보다 나쁜 것이다. 무채색의 도시는 아이들의 개성을 억압한다. 관대하지 않은 색 없는 도시. 아이들은 색을 잃었고, 그만큼 병들고 시든 것 같다. 그렇게 소년은 무채색 도시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때쯤 관객은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우중충한 먹구름 같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게 이 죽은 도시, 공간의 컨셉이다.
 
이 도시의 가정조차 아이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코너'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고, 아이들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는다. 붕괴한 가정의 아이. 여기서 어른들은 자신의 히스테리를 아이들에게 투사하고, 신경질적인 면을 드러낸다. 이렇게 색을 상실한 아이에게 가정은 그 어떤 안정과 활기를 되찾아 주지 못했다. 소년이 발 딛고 있는 공간엔 꿈과 희망이라는, 따뜻한 색이 존재할 곳이 없다. 아이들은 무너진 가정의 균열 사이로 침전할 뿐이다.
 
   
 
 
'코너' 외의 밴드 원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먼' 등의 아이들 집에 엄마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내 카메라 밖으로 사라지거나, 아이들에게 어른다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 하려는 아이에게 돈 버는 일을 잊지 말라 닦달만 하고, 자신의 욕망에 탐닉,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재미있는 건 카메라가 '에먼' 등의 밴드 원들의 집에 갔을 때, 늘 아버지가 부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아이들에겐 전통적 의미의 가장이 부재한 듯하다. 굳이 가부장적으로 풀지 않더라도, 남자아이들은 자신의 역할모델로 모방할 남자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방황은 필연적인 과정이 아닐까.
 
'코너' 외에 아버지가 등장하는 건 일진 배리 뿐이다. 그런데, 배리네 아버지도 정상은 아니다. 아이를 때리는 폭력적 어른의 괴팍하고, 추한 꼴을 보인다. 존 카니는 배리가 왜 그 따위 삶을 살고 있는가에 관한 답을 제시했다. 비정상적 가정이 배리를 일탈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무채색 도시, 병든 가장들 아래 아이들도 병들고 있다는 차가운 시선을 엿보게 한다. 후에 '코너'가 배리에게 밴드의 경호를 부탁하는 것에서 존 카니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붕괴한 세상을 지연시키고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은 소년들의 연대라는 감독의 생각이며, 병든 아이마저도 끌어안으려는 감독의 따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가정이라는 공간, 빈집을 채우고 있는 존재가 이 도시의 미래인 '아이들'이었다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한다. 역할 모델을 상실한 아이들이 빈집을 채운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방황이 필연적인 이 아이들도 그들의 아버지처럼, 병든 가장의 자리를 물려받지 않을까. 그래서 그 빈집은 또 다른 미래의 아이들, 다음 세대의 가장을 잃은 아이들로 대체되지 않을까.
 
하지만 미래파 밴드, 싱 스트리트는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겐 음악과 동료가 있다. 이 시궁창 같은 공간을 잊게 할 음악. 존 카니는 음악으로 이 아이들에게 색을 입혀주고, 치유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라피나'다.
 
   
 
 
Track 2. The Riddle Of The Model, & Girl
'코너'가 '라피나'에게 끌린 이유는 과학이라 할만하다. 색을 앗아가는 학교에 의해 색을 상실해가는 '코너'와 진한 화장으로 강렬한 색을 뿜어내는 '라피나'. 색을 잃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라피나'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피나'는 싱 스트리트 밴드의 뮤즈였고, 이 뮤즈는 건조한 아이들에게 색을 선물한다. 그녀는 개성의 상징이고, 싱 스트리트는 이 개성을 포착한 뒤 프레임에 담으면서, 그들 자신을 치유한다. 소년들은 동력을 얻은 것이다. 그들은 하루하루 변하는 다양한 스타일만큼, 다양한 색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그들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 밴드의 구성원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데, 이 역시 소년 개개인의 정체성 확립과 다양한 개성의 발현, 조화라 할 만하다.
 
또한, '라피나'는 소년을 성장하게 한다. 학교에서는 억압을, 가정에서는 방치된 소년은 좀처럼 변화를 꿈꿀 수 없다. '코너'는 '라피나' 덕에 음악에 몰두하고, 그녀를 위해 밴드를 만들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곡을 쓰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간다. 질투하고, 몰두하고, 아파하고, 더 잘나 보이려 애쓰며 소년은 성장한다. 남과 여라는 사고관의 확장 및 감정의 폭을 '라피나' 덕에 증폭 시킨다.
 
   
 
 
끝으로 '라피나'는 소년에게 아일랜드 탈출을 꿈꾸게 한다. 무채색의 도시가 소년을 병들게 한다면, 흐린 구름 너머로 보이는 런던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다. '싱 스트리트'에서 아일랜드는 시들어 버린 땅이며, 런던은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동경의 공간이었다.
 
'코너'의 형 '브렌든'(잭 레이너)이 절망에 빠져 허덕이는 이유, '코너'의 엄마가 현관에 앉아 햇빛을 갈망하는 이유. 이 모두가 아일랜드라는 공간에서 탈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그들은 병들었고, '코너'도 이 땅에 머문다면 그 병이 전염될 것이다. 이들과 달리 '라피나'는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에서 빛나는 모델이 되려 하고, 그 꿈이 이 여인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 '코너'가 '라피나'에게 끌렸다는 것은, 그 탈출의 욕망에도 끌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라피나' 외에도 그를 아일랜드 밖으로 내보내는 존재는 있다. '브랜든'이라는 현재는 '코너'의 미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말한다. '코너'는 브랜든이 닦아 놓은 길은 누리기만 했을 뿐이라는 말에 미안함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느낀다. 자신은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코너'는 미래를 위해 뭔가를 시도하려 했고, 배의 키를 잡는다. 그의 어린, 소년성을 대변하는 것만큼이나 작은, 그리고 위태로는 배를 타고 바다로 향한다. 브랜든의 꿈과 밴드의 미래까지 싣고서, '코너'의 배는 세상으로 발을 내딛었다.
 
   
 
 
Track 3. Drive It Like You Stole It
영화가 선택한 뮤직비디오라는 매개체에 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MTV 세대 라고 불리는 영화 속 소년들은 현란한 카메라 워크, 빠른 편집과 화려한 영상미에 빠져들었던 세대다. 이미지의 범람과 더불어, 세상을 이미지로 재해석하는 시대. 더 중요한 건, 그들의 취향대로 세계를 해체하고 조립한다는 데 있다. '코너'는 그런 문화의 최전선에 있던 소년이다. 그런 그가 뮤직비디오를 만들며 담은 것은 사랑, 저항, 그리고 그들 밴드의 청년기로 요약할 수 있겠다.
 
''라피나''를 담기 위해 시작한 뮤직비디오. 이 뮤직비디오는 구애의 언어였고, '라피나'의 아름다움, 즉 이상형을 복제하고 소유하려는 시도이자 욕망의 결과물이다. '코너'는 그의 사랑을 가사에 담고, 영상으로 물질화시켜 '라피나'에게 바쳤다. '라피나'를 담던 카메라 시선의 주체도 '코너'의 것이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은 '코너'가 그린 스토리 보드에 있다. 스토리 보드는 영상의 의도이고, '코너'가 보고 싶은 것을 담으려는 시도이자 목적이다. 그리고 이 스토리 보드의 중심엔 늘 '라피나'가 있다.
 
'라피나'를 담는 동시에 싱 스트리트 밴드의 뮤비는 시대를 향한 저항 정신도 포함하고 있다. 이 밴드가 뮤직비디오에 담는 것은 개성적 스타일을 가진 소년들의 색다른 모습이며, 무채색을 강요하는 이 사회에게 보란 듯 외치는 사자후다. 그들이 입고 싶은 것을 입고,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그들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뮤직비디오. '교장, 보고 있나?'
 
마지막으로, 이 뮤직비디오는 그들 청년기를 박제해 영원히 보존한다. 그들이 음악으로 소통하고, 세상에 시비를 걸고, 그들의 색을 추구했던 시기가 온전히 영상에 기록된다. 그렇게 그들의 소년 성은 영원히 저장된다. 소년들에게 꿈이라던 게 있던 환상적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존 카니가 이 영화로 보고 싶었던 것도 자신의 청년기가 아닐까 상상하게 되는 부분이다.
 
   
 
 
존 카니의 미래파 아이들
'우리는 미래파에요'라는 '코너'의 대사. 이 미래파 청년이 말한 미래가 2016년 우리의 시대라면 어떨까. 이는 존 카니에게 특별한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원스' 이후, '비긴 어게인'은 잘 재련된 영화였으나, '원스'가 보여줬던 그만의 색(어쩌면, 아일랜드라는 지역색)이 바랜 영화였다. 그런 그가 미래파 소년을 소환해 듣고, 보고 싶었던 것 결국 자신의 초심이 아닐까. '싱 스트리트'는 그런 면에서 '원스'와 '비긴 어게인'의 중간 쯤, 그러니까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 변증법적 영화로 볼 수도 있겠다.
 
또, '싱 스트리트'는 묻는다. 80년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금, 여러분의 시대는 '코너'가 살던 우중충한 아일랜드와 얼마나 다른가. 당신들은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는가. 현재는 그 시절 미래파가 그리던 환상적인 시간인가. 폭력과 억압의 시대를 초월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시대는 도달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코너'가 큰 바다로 나가며 끝나버린 '열린 결말'에 대한 대답으로 이어진다. 관객 개개인의 현재는 '코너'의 항해, 즉 '미래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에 관한 답이다.
 
재프 니콜스 감독의 '머드'에서 주인공 '머드'(매튜 매커너히)도 큰 세상으로 항해를 시작하며 그의 이야기를 닫았다. 여러 가지 갈등을 해결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배의 키를 잡은 '머드' 앞엔 뜨거운 태양과 거대하고 잔잔한 물이 펼쳐져있다. 광대하면서도 조금은 희망차보이는 미래가 '머드'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싱 스트리트'의 '코너'가 대면하는 물은 그에게 매우 적대적이다. 비와 파도가 그와 '라피나'를 때리고, 잿빛 구름은 그들의 미래에 인상을 쓰고 있다. 그는 무사히 아일랜드를 탈출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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