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음악이란 기쁨이자 고통이다. 평생 짊어지는 멍에다"

   
 
'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드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국민 성악가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최고 테너 '임웅균'은 연세대학교 성악과 졸업를 졸업하고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수학, 이탈리아 오시모 아카데미 오페라과 졸업한 뒤 뛰어난 기량을 바탕으로 방송, 문화, 예술계 전반에 성악과 한국가곡을 널리 알려왔고, 특히 한국가곡을 정리하여 교육시킨 공로로 한국 작곡가 협회에서 상을 받았다. 
 
또 그는 한국에서 자칫 없어질 뻔한 어린이날을 지켜낸 공로로 미국 대통령상을 수상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성악가 임웅균은 학교폭력대책국민협의회 공동대표를 겸하며 예술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목소리를 강하게 내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예술의 요람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과장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를 만나 첫 질문부터 음악에 대해서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자존심이 강하다. 1985년 대회에서 심사위원인 파파로티에게 대들어"
"나는 연인원 1,000여 명을 관리해야 한다. 나는 그게 체질"
"전국적으로 오페라 운동을 대한민국에서 펼치지 못한 것이 아쉬워"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 대비 음악대학이 가장 많아…그런데 한국의 가곡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는 훌륭한 인재들이 많은데 수요가 없어 문제"
"예술가들이 돈만 밝히게 되면 사회는 썪을 수 밖에 없다. 돈 없으면 예술 못 배우는 것처럼
호도하니 걱정"
"이제는 거대한 문화국가 중국 시장을 바라봐야. 그런 중국에 진출하는 예술인이 가난해야 될 이유는 없다"

"노래가 정말 좋다면 계속 해라고 말하고 싶다. 음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악가 임웅균에게 음악이란? 
ㄴ 참 어려운 주제다. 인간의 근본을 다루는 이야기 인 것 같다. 음악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호 중 하나이고, 사회에 필요하고, 종교적인 주제도 담고 있다.
 
나에게 음악이란 기쁨이자 고통이다. 평생 짊어지는 멍에다. 인간의 생로병사와 함께하는 음악, 소리가 잘나면 정말 하늘을 나는 것처럼 엔돌핀이 셈 솟지만, 배고픈 직업이다. 영향력이 없이 이름만 알리는 직업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예술가의 능력을 펼쳐서 사회에 공헌하기 힘들다. 
 
내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건 고등학교 때 '나는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암기도 잘하고 기획도 잘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내 어릴 적에 동네 사람들이 내 목소리가 집에서 200M 떨어진 구멍가게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내가 잘하는 음악을 해보는 게 어떨까?'는 생각이 들어 잘하는 것을 하자 생각해다. 감사하게 은사님을 만나 음악레슨을 받고 연세대학을 수석 입학할 수 이었고 수석 졸업했다.
 
사담을 하자면 음대를 다녀도 나는 장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장교의 아내였던 어머니가 극구 반대 하여서, 비록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성향이 군인에 가깝다. 예술은 공감예술이 있고 정복형 예술이 있는데, 나는 군인형 예술가다.
 
노래를 한다는 것은 어느 날은 기쁨의 직업이고, 어느 날은 정말 힘든 직업이다. 우리가 아는 공자님도 무술가이자 음악가였다. 궁술과 '생황'의 대가였다. 그는 천하를 주유하며 떠돌아 다녔지만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다. 이렇듯 공자님을 본받아 큰 호연지기를 가졌지만, 내가 성악가 인데 전국적으로 오페라 운동을 대한민국에서 펼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아쉬운 점이 있지만, 자랑을 하자면 한국 가곡은 '임웅균'이기에 할 수 있었다. 서양음악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85년 아펜젤러 박사가 제물포에서 들어오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서양음악이 130년 역사가 되었고 음악 대학이 250여개가 생겼다. 전 세계적으로 인구 대비 음악대학이 가장 많은 나라다.
 
그런데 그런 나라에서 한국의 가곡을 가르치지 않는다. 자기나라의 노래 가르치지 않는 대학이 무슨 상아탑인가. 한예종에는 4학점 과정의 한국가곡 프로그램이 있고, 한양대는 학교 창립자인 김연준 학장이 음악가였기에 2학점 프로그램이 있지만, 다른 대학은 성악과에서 한국 가곡이 선택이다. 한예종의 프로그램을 내가 들어오면서 그것을 정립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 국민성악가 임웅균과 박리디아 (사진 왼쪽) ⓒ 신일섭 기자
 
 요즘 근황은 어떠한가?
ㄴ 경제 위기 이후 예술계가 힘들다. 클래식이 전멸 상태다. 가요계, 공연계도 힘든 것으로 알고 있다. 연주회가 거의 80% 가까이 사라졌다. 내가 이 정도면, 다른 예술가들은 어떠하겠나? 나름대로 클래식의 명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학교에서 내가 성악과 주임 교수가 다시 돼서 오페라 작품를 연속으로 9개나 올린다. 지난 해 모차르트의 마적 '마술피리', '라트라비아타', '춘희', 6월에 페스티벌에 사랑의 묘약 '라보엠', '피가로의 결혼'  5개, 이번 아시안게임 위원회에 초청받은 '돈 조바니', 내년 1월 '니골레토', '잔니스키키', '까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총 9개의 오페라를 올릴 예정이다. 
 
보통학교에서는 3년에 한번 작품을 올릴까 말까다. 3일에 걸쳐서 오페라를 3개를 올린 적은 역사적으로 없다. 그런데 나는 군인스타일이니까 (웃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 가능하다. 
 
오페라가 진행될 때 500석 안팎의 소극장에서 진행됐다. 라보엠 같은 유명한 오페라는 입석만 200명이였다. 소극장이다 보니 몰입도가 높아져 사람들이 감동받아 울더라. 오페라 라보엠의 마지막 부분에서 테너가 주인공 미미의 죽음을 앞두고 노래를 부르니 사람들이 감동 받아 눈물을 흘리더라. 내가 30년 오페라 가수 생활을 했었지만 우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왜냐면 보통의 오페라는 2천석 3천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하다 보니, 가사가 잘 안 들리고, 이탈리아어가 외국어다 보니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른다. 자막을 띄운다고 해도 몰입하기가 힘든데, 소극장에서 하니 사람들에게 오페라로 감동을 줄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내가 정년까지 오페라 운동을 다시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을 많이 벌리고 있고, 요즘 집에 저녁 늦게 들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힘들어도 즐겁다. 오페라하는 임웅균은 즐겁다.
 
옆에서 보기에는 힘에 부쳐 보인다. 연속해서 9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데 열정은 어디서 얻는가?
ㄴ 옆에서는 걱정을 한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나?", "힘들지 않냐?" 사실은 나 하나만 바쁘다. 무슨말 이냐면 오페라 배우는 그 역할만 제대로 맡으면 된다. 오케스트라는 자기가 맡은 파트의 그 곡만 잘 연주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연인원 1,000여 명을 관리해야 한다. 나는 그게 체질이다. 난 꿈이 총사령관이였다.(웃음) 어느 나라 대학에서 재학생 80%이 작품에 발탁되나?. 한예종이니까, 임웅균이니까 가능하다. 나는 그게 너무 즐겁다.
 
결국에는 즐거움이 이끄는 것인가?
ㄴ 그렇다 힘든 부분이 있지만, 즐겁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장군님이 '진사천수'라고 했다. 진땀나게 일하고, 열심히 사회에 공헌하고, 천박하게 살지 말고, 몸을 아끼라는 뜻이다. 그게 요즘 나의 원동력이다.
 
그런데 요즘 문화를 보면 날이 갈수록 천박해 지는 것 같다. 대학에서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 천박한 행동을 하니, 힐링 사업이 번창하는 것 아닌가? 종교인들과 예술인들이 정말 반성해야한다. 신앙과 인문학이 당연하게 힐링이 되야하는데 말이다. 
 
외국 가곡과 비교하자면 현재 한국 가곡의 위치는 어떤가?
ㄴ 위치란 없다.(웃음)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몇 곡을 배울 뿐이지만, 지금은 부르는 사람이 있나? 가요는 100곡을 불러도 가곡은 전혀 없다. 방송에서 틀어주지 않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봤나? 시인이 없는 사회에서 가곡은 살지 않는다. 현재 대중음악에 시인이 있나? 시인은 없고 기획사 사장만 영향력이 있다. 방송사 사장과 PD들은 반성해야 한다.   
 
생각이 깨어 있다는 진보적이라는 평을 있다. 오페라 과정에 연기과정이 있다
ㄴ 나는 합리주의다. 오페라에서는 노래도 중요하지만 결국 감정을 전달하는 부분에서 연기도 중요하다. 테너가 노래를 하며 연기를 해야하는 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완성이 되겠나? 왈츠도 배우고, 눈빛 연기도 배우고, 펜싱도 배우고, 궁중무술도 배우고, 분장도 배운다 그래서 집어넣었다. 그렇다 보니 본교 학생들의 연기력이 훌륭하다는 평을 받는다. 이런 커리큘럼이 오페라의 세계에서 통한다고 본다. 
 
   
 임웅균교수 ⓒ 신일섭 기자
 
학교와 현장의 개연성에 대한 소신이 있나?
ㄴ 링컨센터에 줄리어드 음대가 있듯이 모름지기 무엇이든 가까워야 생각이 난다. 예술하는 사람이 현장에 있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본교의 위치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현학이 맞아 떨어지니 훌륭한 학생들을 배출하지 않나 싶다. 콩클만 20년간 천여 명이 입상했다. 이제는 훌륭한 인재들이 많은데 수요가 없어 문제다 (웃음).
 
그래서 이제는 중국 시장을 바라봐야한다. 중국은 거대한 문화국가다. 그런 중국에 진출하는 예술인이 가난해야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카소와 크림트, 시벨리우스 등 예술가들이 대우 받지 않나? 예술가들도 초반에는 고생하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 정도 대우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예술 기획사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황무지에서 문화한류를 펼쳐서 순수 예술을 진출할 길을 정말 잘 만들어 놓았다. 정말 칭찬하고 싶다. 중국에 순수예술을 수출하는데 기여하도록 학교 교육 또한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학교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 된다는 말인가?   
ㄴ 그렇다. 그런 것도 있고, 한국에는 인재들이 많고 땅이 너무 좁다. 미국은 56개주에서 한 번씩 순회를 하는데 2년이 걸린다. 중국도 마찬가지 50여의 민족이 사는 곳을 다 돌려면 2년이 넘게 걸린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대중 예술이 작품성은 있는데 너무 빨리 소모하여 희소성과 작품성을 스스로 낮추지 않았나 싶다. 중국에 가서 2년 동안 활동하고 사람들이 요즘 뭐하나? 싶을 때 다시 좋은 콘텐츠로 나와야 대중 예술의 희소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05년에 청소년지원 사업관련해서 미국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야기를 하자면?
ㄴ 당시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을 했었는데,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휴일이 너무 많아서 휴일을 줄이자 해서 식목일과 어린이날을 없애자는 운동이 있었다. 나는 68개 어린이 관련 단체들의 공판장을 가지고 정부 종합 청사에 가서 엄청 따지며 토론했다. 엄청난 대립각 속에서 결국 어린이날을 지켜냈다. 그래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는 소문이 미국 대통령실에 청소년위원회까지 흘러들어가게 됐다. 그래서 청소년위원회에서 추천이 돼서 미국 대통령상 골드 메달을 받았다. 
 
당시를 회상하자면 정부입장에서는 어린이들이 약자였을 것이다. 약자인 청소년들과 어린이들 대상으로 정치인들이 이런 행동을 보였기에 소리 좀 냈다. 정치인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정책적이고 재정적인 지원은 안한다. 그러면서 뉴스에서 청소년 문제가 나오면 기성세대들은 "요즘 아이들은 왜이래?"라고 한다. 정말 어이가 없다. 방송에서는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대중문화만 보여주고, 청소년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만 가르치는데 아이들 마음이 어떻겠나?  당시 내가 정부종합청사에서 연판장을 가지고 민원을 접수하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울리니, 사람들이 다 대피하고 경찰들도 오고 난리가 났었다.(웃음)     
 
어린이가 정말 중요하다. 이와 관련 된 어머니 이야기를 하자면,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 잠깐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을 하나 먹었는데 어머니가 집에서 파출소까지 나를 개 패듯이 패고 나를 질질 끌고 갔었다. "남의 것을 훔쳤으니 너 같은 사람은 콩밥을 먹고, 감옥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무시무시하게 맞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남의 것은 정말 손도 대지도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었다. 
 
그 어릴 적 내가 배운 것이 나를 올바른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예술은 음탕해 질 수밖에 없는 분야다. 성경적 관점에서는 예술분야는 사탄이 관장하는 분야이다. 그래서 예술의 길을 걷다보면 욕심이 많아진다. 어머니가 내가 어릴적에 올바르게 자라도록 해주신 것에 감사한다.  그래서 어린이가 올바르게 자라나야 사회가 올바르게 된다고 본다. 본인의 것 이외의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질 것 같다. 
 
 
   
 
 
오페라 성악가를 하게 된 계기?
ㄴ 어릴적 부터 목소리가 컸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독서실 주인이 좋은 바리톤이었다. '오 나의 태양'등 노래를 부르는 것이 너무 멋있어서 쫒아다녔다. 내 어머니가 신문기자였는데 예술을 하고 싶어서 성악을 하셨다. 그런데 나를 출산하면서 포기 하셨다고 한다. 그런 영향이 있다.
 
유학 생활이야기를 하자면?
ㄴ 한마디로 거지 생활을 했다. 같은 옷으로 3년을 지냈다. 유학생활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해서 연명하고 살았다.  한 사람의 후원으로 겨우 살아남아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가가 됐다.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리자면 돈이 떨어져서 버틸 수가 없었는데 명지대학교 설립자이신 유상근 박사님이 지금은 작고 하셨는데, 한 달에 25만원씩 도움을 주셨다. 내가 명지고에서 학생회장을 한바가 있어 편지를 쓰니, 명지재단의 인재에게 장학금을 못주겠냐며 흔쾌히 주셨다고 한다. 
 
지금 나에게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당시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돈이였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부자들이 돈을 쓸데가 없다지만 그 돈을 정말 예술하는 사람에게 지원하면 앞으로의 미래가 정말 달라질 것이다.
 
국민 성악가라는 타이틀에 기대하는 점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ㄴ 과찬이다. 유인촌씨가 열린음악회에서 나를 소개하면서 국민 성악가로 불러주어 지금까지 국민 성악가로 불리고 있다. 감사를 드린다. 등산을 갔을 때 40대 이후의 등산객들이 내 노래를 듣고 노래를 통해서 전율이 일기는 처음이라고 삶의 기쁨을 알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정말 좋아해주더라. 관객 사랑해주시는 만큼 더 겸손하게 노래하겠다.  
 
다른 성악가와 다른 테너 임웅균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ㄴ 나는 자존심이 강하다. 1985년 대회에서 당시 심사위원인 파파로티에게 대들었다. 나에게 악보대로 부르지 않는다고 지적을 하길래 순간적으로 욱해서 따졌다. 당신은 이탈리아 사람이기에 이탈리아 가곡을 쉽게 부르지만, 나는 한국가수이며 이탈리아 가곡은 아니더라도 한국가곡은 내가 전 세계 최고라고 따졌다. 그러자 옆에 심사를 보시던 내 스승님이 파파로티를 말렸다. 파파로티가 나더라 '시칠리아 마피아'같다며 혀를 찼지만, 나중에는 내 목소리가 골동품 같은 매력이 있다고 칭찬하더라. 
 
나는 국적성이 강하다. 한국 노래를 좋아한다. 내 히트곡이 밀양아리랑이다. 우리 노래라도 성악가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국악의 표현기법인 노래의 반음을 내린 농현(弄絃)이라고 해서 우리의 음악적 기법을 잘 살려서 부른다. 성악가가 노래를 부른다고 항상 성악의 발성만 사용하지 않는다. 
 
당신은 벨칸토 창법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들었다. 벨칸토가 뭔가? 
 ㄴ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웃음). 나는 세계가 인정한 벨칸토 학자다. 파파로티도 인정했다. 남들이 10년 동안 해결 안 되는 것을 나는 10분 안에 해결한다. 길면 9개월 이다. 벨칸토라는 '아름다운 소리'라는 뜻의 이탈리아 말이다. 파파로티가 40년 전에 벨칸토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기독교 신자니 벨칸토는 '하나님과 대화'라고 말하고 싶다. 내 롤 모델이 성경의 다윗이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사이에 전수되는 '비기'다. 전 세계에서 아무도 기록되어 내려오지 않는다. 소리를 내려면 일단 충분하게 몸이 열려있어야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소리를 밑으로 내려야지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나머지는 창법과 관련된 테크닉이다.  

[▶] 300년 만에 베일을 벗다…임웅균이 밝히는 '벨칸토 창법 6가지 원칙'

 
이것을 모두 깨닫고 시작하는 아티스트가 얼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짜 최고의 아티스트는 몇 명 없는 것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좋은 성악가가 나오기 힘들 것 같다는 전망이다. 방송에서도 클래식을 잘 틀어주지 않고, 점점 순수 예술이 사장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좋은 성악가와 예술가들을 구경하기 힘들어 질 것이다.  
 
   
 임웅균 교수 ⓒ 신일섭 기자
 
임웅균은 이런 사람이라고 표현 한다면?
ㄴ '임웅균은 애국자다. 임웅균 남자다. 임웅균은 여자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임웅균은 애국자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가곡을 학교에서 커리큘럼화 시켰다. 그래서 공로패도 받았다. 군대를 다녀와서 민족의 보호 임무에 충실했다.

임웅균은 남자다. 여자를 울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내 배우자와 딸 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임웅균은 여자다. 나는 굉장히 예민하고, 삐지기도 잘한다. 여자 이상이다. 앙탈도 부리고 성질도 부린다. 딸들이 말하기 "우리 집에는 남자 3명과 여자 1명이 산다"고 표현할 정도다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ㄴ "노래가 정말 좋다면 계속 해!"라고 말하고 싶다. 좋아하는 것을 못했을 때 한이 되지 않겠나? 그렇지만 한국 성악에 미래는 밝지 않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세계최고의 '벨칸토 창법'을 정확히 구사하는 국가인 우리나라는 세계, 이탈리아와 견줄 만하다. 하지만 지원이 없으니 미래가 없다. 그래서 재능 있는 사람들이 해외로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곳이 몇 곳이나 있는가? 내가 알고 있기로는 거의 전무한 걸로 알고 있다. 대기업이라고 할 수 없는 린나이에서는 관현악단인 '린나이 팝스 오케스트라'가 있고, 금호그룹에서 잠깐 쿼텟을 운영한 적이 있는 걸로만 안다. 
 
기업별로 스포츠 구단은 있으면서 오케스트라는 없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면서 체육시설은 많아졌다. 그러면서 사회 분위기가 남성적으로 변하면서 사회가 결국 폭력적으로 변했다. 이건 내 이론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동론에서 나오는 말이다. 체육이 발달하면 예술도 발달해야하는데 인문학적 균형이 맞지 않는다. 예술도 상업예술이 판을 치고 있다. 육체적이고 섹스어필이 차고 넘친다. 이런 균형이 맞지 않기에 한국 예술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의 사회적 배경에서 미래창조와 창조경제에 대해 아쉬운 점이 많다. 주위에서 문화융성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나라는 국립오페라하우스조차 없다. 국립오페라단의 단장이 6개월 동안 공석이다. 오스트리아는 세계대전이후 국민회의를 거쳐서 최초로 건축을 한 것이 바로 비엔나극장을 증·개축한 것이다. 
 
이것이 정상이다. 사람이 정신이 먼저 발전해야 하는데 사회지도층들은 물질만 추구하니,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낮아지는 것이다. 나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문화예술이 발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도, 종교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지 못해서 힐링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이런 것을 해결 못하는 시국에서 우리나라의 미래창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의 수준이다. 이렇게 사회지도층의 수준이 낮으니 과거 나라를 빼앗겼다. 일제강점기 때를 보자. 일진회의 송병준, 그 사람은 '기생 아들'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룸살롱을 이 사람이 지었다. 을사오적 이완용 이 사람은 양반가문의 양자로 가난하게 살았다. 이들 모두 배움이 부족하고 물질만 추구해서 그렇다.
 
앞으로 문화예술뿐 아니라 국운을 걱정해야 되는 시대가 됐다. 인구대비 음악대학은 많고, 재능 없는 사람을 재능 있다고 해서 레슨하게 하고, 예술가들이 돈만 밝히게 되면 사회는 썪을  수 밖에 없다. 돈 없으면 예술 못 배우는 것처럼 호도하니 우리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나?
 
대한민국을 이끄는 100대 그룹 중에 진정한 오페라단, 오케스트라, 음악극장, 소극장있는 곳이 몇이나 되나? 음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부 대기업들은 음악은 힘드니 미술관을 가지고 있다. 뉴스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듯이, 이들은 큐레이터 몇명 고용하고 그들을 착취하면서 뒤편에서 미술품으로 비자금을 조성한다고 한다.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우리나라가 정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성악국가인데 말이다. 이것으로 우리나라가 먹고 살수도 있는 것 인데, 정부에서는 이것을 모른다. 그런데 가수들은 알고 있었다. SM, YG, JYP 이들이 알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K POP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들의 노고에는 정말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대중문화를 사로잡으니 순수예술은 다 사멸하게 됐다.
 
요즘 가곡을 들어봤나? 대기업 행사에서 클래식 음악을 하나? 전혀 아니다. 아이돌중심의 대중문화가 발달하면서 그들의 노래에서는 저급한 가사밖에 안나온다. 그러면서 요즘 아이들의 학교폭력문제, 왕따 문제를 거론하면서 "요즘 아이들은 왜 그래?"하며 이해를 못한다. 그러니 애꿎은 것만 제한하고 있다. 문화가 썩었는데, 정신은 안 썩겠나?  
 
앞으로 예술가로서 목표가 있다면?
ㄴ 나는 이만큼 살면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노래도 열심히 했고, 가곡도 살렸고, 어린이날도 앞장서서 지켜냈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남긴 했다.
 
나는 기독교를 다닌다. 그래서 앞으로 찬송가 668장 전 곡을 오케스트라로 녹음을 해서 전 세계에 보급하고 싶다. 예산은 약 30억 정도에 기간은 2년 정도 걸린다. 내가 총 감독을 할 것이다. 왜냐고 물으면 전 세계적으로 교회가 줄어들고 있고, 교회에서 반주자가 없는 교회가 태반이다. 반주자가 없으니,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노래방 기기로 찬송을 한다. 이건 아닌 것 같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소리로 찬양한다면 좀 더 멋진 일 아니겠나?  이것을 해보는게 내 마지막 목표다.
 
문화뉴스에도 한마디 부탁한다 
ㄴ 이 혼란한 경제의 논리로 대세가 이뤄지는 세상에서 돈도 안 되는 문화, 그 문화를 취급하는 뉴스가 예술적인, 인문학적인, 감성적인, 웰빙적인, 힐링적인 좋은 뉴스를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잘 공급해 달라. 브라보 문화뉴스! 
 
   
 ⓒ 신일섭 기자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신일섭·김윤지 기자 invuni1u@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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