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한지에 써진 글을 모아 말아낸 후, 칼로 쪼개면 글이 선이 된다. 선을 동양화처럼 긋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선이 작품에 들어 있게 된다. 그리고 서양화처럼 그 작업을 프레임 속에 넣어 구성한다."
 
   
▲ 지난해 아트파리 전시에서 서정민 화백의 작품이 소개됐다. ⓒ 서정민
서정민 작가의 그림은 독창적이다. 평면과 입체가 하나의 화면 위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그리고 평면 위에 도드라진 입체적 구성의 주된 재료는 우리의 한지다. 조선대학교 순수미술학부 회화과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한 그의 초기 작업은 다른 화가들과 비슷한 유화였다.
 
그러나 15년 전, 유화 작업의 한계를 발견한 그는 우리의 전통 한지와 서양화의 회화적 조형성을 결합해서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하겠다고 결심하고 우리의 재료인 한지를 선택했다. 그는 "한지는 그 특성이 질기고 부드러우며 은은함과 치밀한 섬유질은 그야말로 우리의 민족성을 꼭 닮은 재료"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준비된 작품으로 그는 프랑스, 미국, 독일, 싱가포르, 터키, 캐나다, 대만, 스위스 등 국제무대에서 전시와 아트페어를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받는 작가가 됐다.
 
현재 9월 뉴욕 초대전을 앞두고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서정민 작가를 만났다. 어떻게 이러한 작품을 만들게 됐는지, 그의 작품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확인해본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있나?
ㄴ 국내보다 거의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9월에 뉴욕에서 초대전이 있고, 10월 한국의 노원문화예술회관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다. 올해는 크게 두 전시를 축으로 연말까지 5~6개 정도의 아트페어에 참가한다. 내년에는 다섯 번의 해외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보통 4월부터 10월까지 작품을 준비하고, 이후 외국에서 전시하는 시스템으로 활동 중이다.
 
자신의 작품을 소개한다면?
ㄴ 대학 시절은 주로 유화를 중점적으로 하는 서양화 전공이었다. 지금은 서양화의 구조와 동양화의 감성이 느껴지는 부조 형태의 조형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의 한지를 오브제로 하여 캔버스에 촘촘히 붙여 입체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유화 작업을 약 15년 정도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유화가 가진 표현의 한계점과 우리네 정서를 드러내는데 부족함을 느꼈다. 우리네 정서의 먹과 벼루, 연적 등을 한지 위에 먹물로 철학을 담아내었다. 이러한 재료의 특성을 바탕으로 서양화의 회화적 표현 방법과 동양의 철학적 개념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회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 ⓒ 서정민
 
매우 독창적인 작품들인데, 이런 작품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ㄴ 급변하는 시대 앞에서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온전히 창작이 세상으로부터 관심과 이목이 쏠리고, 또 세계화 된 현대미술에서 세계미술계로부터 작품성 하나만으로도 인정받게 되는 시대가 이미 도래 되었다.
 
컴퓨터가 출현하면서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글로벌화 되면서 그림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다. 과거엔 국내 전시가 전부였다면, 현대미술로 재무장한 지구촌 미술시장, 즉 무수히 많은 국제 아트페어가 문화예술의 기존 풍토를 뒤집어 놓았다. 세상에서 단 하나만 존재해야 하는 독창적 세계를 끌고 나가는 확고함으로 작품이 바뀌어야만 했다. 
 
재료로 한지를 선택한 이유는?
ㄴ 나무의 나이테에서 출발했다. 한지는 닥나무로 만들어진다. 사용하고 폐기된 한지를 다시 수거해서 나이테의 결로 작품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은 순환이었다. 조선시대 외규장각 도서 등을 보면 수백년이 지난 한지였는데 지금도 보존성이 좋다. 이렇게 천년의 세월을 이겨온 좋은 재료가 있음에도 우리는 왜 도외시하고 있었나 싶었다.
 
본래 한지가 닥나무 껍질의 연한 섬유질만 채취하여 만들었기에 질기고 부드러우며 ,은은하고 습기에도 강하다. 한지는 우리에게 일상이었고, 그것은 때로는 공예품으로, 문인들의 서지로, 겨울에 창문의 찬바람을 막아주는 창호지로 항상 삶 속에 함께했던 우리네 정서였고 희로애락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감성을 표현하기에 가장 친숙하고 좋은 재료로 한지만 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선택했다.
 
   
▲ 본지 박리디아 부사장(왼쪽)과 서정민 화백(오른쪽)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작품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어떻게 되나?
ㄴ 땀의 흔적으로 쌓아 올려진 작은 한지조각들의 집적된 시간은 인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저런 대작은 보통 6~8개월 걸린다. 6m x 3m의 크기는 8개월가량 준비한다. (한 작품에 그 정도 걸리는가?) 작업하면서 한 작품만 할 수는 없다. 5~6개를 쭉 펼쳐놓고 한다. 
 
외국 전시에서 반응이 좋았을 것 같다.
ㄴ 지난 베니스비엔날레(팔라죠벰보)와 작년에 아트파리 전시 때 프랑스에 사시는 교포들이 찾아와 감동과 사랑을 듬뿍 안겨주어 매우 행복했다. 대작 하나에 작은 한지 조각이 수십만 개 들어간다.말아서, 풀로 붙이고, 쪼개고, 작업한 후, 일정 부분을 다시 자르고 쪼갠다. 커터 칼로 하나하나 잘라내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작두를 쓰면 지질의 표면이 무뎌져서 재료의 예리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작업인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나?
ㄴ 엉덩이가 짓물러야만 탄생되는 작품들이다. 큰 작업을 거의 마칠 무렵쯤 되면 참을성에 한계를 드러내며 그냥 포기하고 싶을 때도 다반사다. 주저앉아 엎드려서 작업하기에 목에 디스크가 와서 깁스하기도 했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기도 했다.
 
어쩌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작업이었기에 아직 세상에서 내 몫으로 남아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구상했던 생각을 화면에 스케치로 옮긴 후 한참 작업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상태로 작업에 몰입하게 된다. 의식으로 시작해 무의식으로 반복되는 작품의 결과물을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처럼 의식을 심고 있다. 무의식에 침몰당한 의식이 켜켜이 쌓여져있는 것이다.
 
   
▲ 서정민 화백이 본인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서정민
 
한지 작품에 담긴 철학을 듣고 싶다.
ㄴ 비록 나 자신은 현대에 살고 있을지라도 문화의 근간은 조선 시대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이미 조선의 문화는 유교사상을 근간으로 모든 정신적 배경이 공자나 맹자의 철학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지금도 그 사상적 배경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우리네 정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서예 하시는 분들이 습작한 후 폐기되는 서지를 수집한다. 이미 효용을 다하고 폐기되는 서지를 수집한 후 펴서, 말고, 자르고 풀을 먹여 하나의 견고하고 의미 있는 재료로 만든다. 서예 하시는 분들이 먹으로 쓴 미완의 작품인 서지를 압축하고, 분쇄하여 작가는 새로운 에너지로 생성해서 화면에 집적한다. 
 
서예가는 글로 작품을 표현하지만, 화가는 시각적 형태를 빌어 작품으로 드러낸다. 글을 모아서 말아낸 후에 칼로 쪼개면, 글이 선이 된다. 동양의 회화에서 글과 그림이 한 번도 따로 이야기되어 본적이 없다. 그림이 보이면 화제가 붙고, 화제 속에는 명상이 따른다. 쪼개진 한지토막에서 드러난 먹선이 동양화처럼 긋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선이 작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노자의 도가를 회화 속에서 이제 막 끄집어내려 한다. 동양의 고전이 단순히 한 시대의 화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대의 회화 속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가치를 표현하고자 했다. 노자의 무위자연, 인간이 본받아야 할 중요한 근원인 천명을 회화로 구현해보고자 함이다. 
 
서양의 합리적이고 논리적 표현만으로 동양의 철학를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마치 서양식 논리로 이해될 수 없는, 본질을 직관으로 통찰하는 깨우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겉으로 당장 드러나지 않지만, 세월을 낚아야만 비로소 깨우쳐지는 실체가 우리에게 열려 있는 기회의 가능성이라고 생각된다.
 
   
▲ ⓒ 서정민
 
왜 노자의 자연사상이었나?
ㄴ 노자의 도는 어쩌면 현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조화의 개념이 아닌가 생각해서였다. 지극히 당연한 세상의 근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연사상, 노자는 이를 가장 이상적인 대안으로 유무상의 경계에서 세상을 보려고 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화가 또한 항상 치우치지 않는 경계에서 화폭에 정신적 가치를 담아내기에 노자의 사상이 적합했을지도 모른다.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서양의 어떤 느낌이 들어가 있는가?
ㄴ 공간을 형성하는 것은 서양의 '모더니티'에 가깝다. 미니멀리즘처럼 단순하면서도 화면을 구성하고 처리하는 것도 추상적 느낌이다. 하지만 한 발 더 다가가서 좀 더 세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개념들을 촘촘히 심어 놓았다. 겹겹이 쌓아 올린 작은 한지조각에는 동양이 추구한 언어들이 셀 수 없이 집적되어 있다. 마치 우리네 감성을 죄다 쏟아부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이는 서양에서 결코 해낼 수 없는 오직 먹 속에서 우주를 공유하고자 하는 우리네 오천년의 유구한 세월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본다.
 
주요 작품 이름이 '선들의 여행'인 이유는?
ㄴ 생로병사나 순환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순환원리와 같다. 게다가 윤회나, 무심 등 불교적 의미까지도 포함한다. 동양과 서양, 문화의 두 축이 서로 충돌하면서, 예술은 새로운 지향점을 유발한다고 보인다.
 
그래서 서양의 시각적 구성과 동양의 개념을 구체화하여 '선들의 여행'이라는 타이틀로 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 선은 감성의 본질을, 여행은 시간, 또는 세월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하는 현실에 확고한 신념을 부여한다면, 자신이 찾고자 했던 새로운 세상도 그동안 꿈꾸어 왔던 유토피아도 그리 멀리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 서정민
 
'나의 작품세계'를 말한다면?
ㄴ 미술 이론적으로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아직은 덜 정립된 개념이고 현재 진행형이기에, 이후에 내가 평가를 받을 수 있고,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 같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회화에서 평면의 한계를 이야기했다. 회화는 자신으로부터 모두 타버리고 끝났다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무엇인가 남아있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타버린 회화의 잿더미 속에서 작은 불씨나마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면에서 입체를 동시에 드러내어 개념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집착처럼 반복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최근 미술계에 안 좋은 일들이 대중의 도마 위에 올랐다.
ㄴ 조영남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본다. 앤디 워홀은 그가 비교하고 동급으로 합리화될 예술가가 아니다. 워홀은 철저히 대중 속으로 뛰어든 화가로 이미 미학으로 자신의 논리를 변론할 수 있도록 정신 무장이 되어 있다. 표피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이다. 앤디 워홀은 어쩌면 뼛 속까지 팝 아티스트였는지도 모른다.
 
동양의 고전인 유가와 도가의 사상 철학들은 이미 진시황 대에 이르러 불타 버렸다. 그러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다고 정신마저 소멸한 것은 아니다. 혹시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에 와서 더욱 빛나는 보석으로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동안 앞서갔다고 생각했던 유럽의 문화가 이제 막 정점을 끝내고 동양으로 관심이 넘어오고 있지 않나? 그들의 합리주의와 논리적 변론은 어떤 한계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점에서 동양이 추구해왔던 철학적 사유들을 회화로 전환하여, 우리만이 풀어낼 수 있는 독창적인 예술사조가 탄생하는 기폭제가 되면 좋겠다.
 
   
 
 
후학양성은 하지 않는가?
ㄴ 현재는 작업만 하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가르치는 것은 선생님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전업 작가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면 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거의 매일 15시간 정도 일하는데, 작업실 출, 퇴근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작업실 위에 거주공간을 마련했다. 
 
앞으로 계획을 듣고 싶다.
ㄴ 내가 수집하는 재료는 언어다. 언어가 선으로 바뀌고 선은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화면 위에 구성된다. 동양의 고전 이야기가 당분간 지속할 것 같다. 또 앞으로 다양하게 나오겠지만, 지구 위에서 홀로 남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아픔과 심각한 우리의 현실을 회화적 관점에서 국제사회에 관심의 메세지로 전달하고 싶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우리의 미래 대체산업은 문화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술에서 국가적 지원체계나 작가 개인적 자생력마저도 갖춰지지 못한 한없이 취약한 구조로 되어 있다. 아직 대중화가 되지 못한 상황 또한 현재의 열악한 경제구조와 맞물려 있다. 말이 한류의 세계화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보인다.
 
게다가 최근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몇 가지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그나마 조금이나마 꿈틀거렸던 미술 시장 마저 꽁꽁 얼어붙어 있는 상태다. 정부가 틈만 나면 강조하는 창조경제의 가장 중심은 문화예술이라고 본다. 이제부터라도 정부와 사회 그리고 기업들은 정책적 차원에서 문화예술에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서정민 화백이 독자들에게 인사말과 당부의 말을 남겼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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