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할리 퀸'이 여자로 보이니?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에디터 이호양 ctiger661@mhns.co.kr 습작가 겸 대중문화소비자이자 작가.
[문화뉴스] 최근 사회를 달구는 소위 성별 논쟁에 대해, 필자는 이것이 취미의 영역까지 미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필자는 '수어사이드 스쿼드' 3차 예고편이 이러한 대립을 취미까지 끌고 들어오는 현실을 목격하게 되고야 말았다.
 
바로 DC코믹스의 유구한 전통을 가진 악당, '할리 퀸'에게 '수어사이드 스쿼드' 예고편에서부터 '오빠' 소리와 함께 존댓말을 사용하게 만든 모 번역가 덕분이다. 조용히 영화를 즐길 수 있나 싶었더니 아예 그른 모양이다. 아니, 성별 논쟁을 떠나서 이것은 '할리 퀸' 캐릭터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 오는 8월 개봉 예정인 '수어사이드 스쿼드' 3차 예고편.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공식 유튜브

 

필자는 DC 코믹스 영화와 관련하여 그 자막에 대해 이미 한 차례 분노를 표한 바 있다. 왜냐고? 누구도 극장에 들어가서 대사 시작 1분도 지나지 않아 폭소를 터뜨리고, 영화 내내 자막 때문에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고행을 겪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모 번역가는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BvS)'에서는 필자의 관람을 초장부터 속된 말로 '잡쳤다.' 자막만으로도 너무 복장이 터지는 나머지 "in the Rockland"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최근 나온 '수어사이드 스쿼드' 3차 예고편 자막을 본 필자의 심정은 '돈 안 줘도 되니 작업물만 주면 내가 완성해서 넘겨주겠다, 일 하지 말고 편안히 돈 받아라.'라고 제안하고 싶을 정도다. '할리 퀸'이 남자에게 '오빠' 소리를 하고, 존댓말을 한다고? 차라리 '슈퍼걸'이 '슈퍼맨'을 '칼-엘' 대신 '오빠'라고 부른다는 소리를 믿겠다(지구로 오며 나이가 역전되었지만, '슈퍼걸'은 '슈퍼맨'의 사촌 '누나'이다).
 
   
 
 
 
오빠? 1992년에 그녀는 이미 최소 20대 중반을 넘겼다!
'할리 퀸'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우선 소개를 하겠다. 1992년, '배트맨 디 애니메이티드 시리즈(Batman: The Animated Series, 배트맨 TAS)'에 처음 악당으로 출현했다. 그녀는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다른 캐릭터들과는 이례적으로 만화책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에서 처음 출현한 캐릭터이다. 이후 애니메이션에서 얻은 높은 인기를 기반으로 역으로 만화책에까지 등장하며 오늘날에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할리 퀸', 본명 '할린 퀸젤'은 - 과정이 좀 수상하다는 의혹은 있지만 - 심리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까지 딴 우수한 인재이다. 그녀는 박사 학위 취득 이후 고담 시의 정신병원 '아캄 어사일럼'에서 인턴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그러나 '조커'의 상담을 하던 중, '조커'의 술수에 휘말려 점차 '조커'에 대한 동정,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상담사와 내담자의 애정 관계는, 발각될 경우 대부분 임상심리 단체가 자격증을 박탈할 정도로 엄격하게 금지하는 행위이다.)
 
결국 그녀는 반쯤 미친 상태로 '조커'의 탈옥을 돕고, 이후 '할리 퀸'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며 조커의 사이드킥 내지 연인으로서 빌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체조 선수였던 경력이 있어 뛰어난 유연성과 민첩성, 그리고 힘을 자랑한다.
 
   
 
 
 
그녀의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폴 디니(Paul Dini)와 브루스 팀(Bruce Timm)이 합작한 DC코믹스 단편만화 "The Batman Adventures: Mad Love"와 이를 영상화한 '배트맨 TAS'의 후속작 '뉴 배트맨 어드벤처(The New Batman adventure, 배트맨 NBA)' 동명의 에피소드를 참고할 수 있다. 만화책의 경우 1994년 Eisner Award "최고 단편 이슈" 분야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비록 80주년을 바라보는 '슈퍼맨', '배트맨', 그리고 '플래시'와 같은 히어로는 아니더라도, 그녀는 최소 20여세로 출연해 20여년은 묵은 캐릭터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는 그간 애인이자 선배(?) 캐릭터인 '조커'에게조차 '오빠' 소리를 한 적이 없다. 애니메이션 내내 그녀는 조커를 'J-맨', '푸딩' 등의 별명으로 지칭하며, '배트맨' 역시 비슷하게 'B-맨'이라고 부르는 등, 자신의, 그리고 오직 자신만의 별명을 창조하여 부르곤 한다.
 
이렇듯 탄탄한 배경, 전통과 역사, 인기까지 갖춘 캐릭터가, 그보다도 '급 낮은' 악당, 혹은 이름 없는 병사 1, 2에게 '오빠' 소리를 한다고? 차라리 '아만다 월러'가 그들 모두를 언니, 오빠라 부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물론, 당연히, 진짜 옳다는 소리는 아니다. 예컨대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에게 오빠라고 불러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남성('오빠'에 상응하는 호칭이 존재하는 문화권 출신의)이 있다면, 필자는 그의 용기를 아주 높게 칠 듯하다.
 
   
 
 
 
이 캐릭터에게 오빠라고 불러 달라 하는 자, 애완 하이에나에 물어뜯길 준비를 해라.
필자도 안다. 캐릭터는 그 캐릭터의 주된 설정에 따르고, 캐릭터의 역사가 곧 나이는 아니다. 당장 '수어사이드 스쿼드'만 해도 마고 로비가 열연한 '할리 퀸'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오빠' 소리나 할 평범한 여자로 보인다면, 위에 언급한 'Mad Love' 에피소드를 보고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결코 보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아래에서 그녀의 캐릭터성을 설명하겠다.
 
설정상 '할리 퀸'은 (대부분의 대중 문화 캐릭터가 선남 선녀이듯) 늘씬한 금발 미녀이다. 하지만 미모, 혹은 몸매는 결코 그녀의 무기가 아니다. 그녀는 '조커'의 사이드킥 '할리 퀸'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조커와 유사하게 온 얼굴을 짙은 분장으로 가리고 다닌다.
 
앞서 말했듯 체조 선수 출신으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자랑하며, 무기는 '배트맨 TAS'에서는 거대한 망치를 사용하여 발군의 괴력을 자랑한다. 그녀의 애완동물은 거대한 하이에나 두 마리인데, 그녀 외에 이 하이에나들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으며, 그녀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그녀의 공격보다도 하이에나의 이빨에 먼저 물어뜯길 것이다.
 
이것보다 더 위협적인 모습은 그녀에게 없을까? 당연히 있다. 바로 DC코믹스가 소속된 워너 엔터테인먼트에서 주도하여 낸 게임 타이틀 '아캄' 시리즈에서 나온 모습이다. '아캄 어사일럼', '아캄 시티', 그리고 '아캄 나이트'로 이어지는 내내 부하들은 웬만해서는 그녀를 탐내지 않는다. 혹여라도 그녀를 '여성'으로 보고 덤비는 부하가 있다 해도 그녀가 친히 도륙을 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이 게임 시리즈에서 오히려 그녀에 대한 부하들의 충성심 내지 공포는 다른 악당 세력에 비해 높게 묘사되는 편이다.
 
이렇게나 강력한 캐릭터가 어째서,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악당, 혹은 병사들을 '오빠'라 부르고 존댓말을 해야 하는가? 속칭 '캐릭터 붕괴(캐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아직도 그녀가 '여자'로 보이는가?
더불어, 혹시라도 '강력한 여성'이기 때문에 그녀가 '예외적으로' 오빠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금까지 한 사람이 있다면, 필자는 그 생각에도 반대한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그녀가 성별 관계 없이 다른 캐릭터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오빠' 호칭과 존댓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조커'와 '배트맨'마저 자신이 원하는 별명으로 부른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소한 것에서조차 세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미쳐버린' 자신에게 맞게 조절하여 해석하는 캐릭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한 강력한 능력과 개성, 자신만의 세계관을 갖추고 있고, 이것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등장하는 다른 어떤 악당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과연 다른 캐릭터들에게 자발적으로 존댓말을 쓸까? 애초에 '존댓말'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영어권 캐릭터가?
 
백 번 양보해 그녀의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 조커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여성'이라 치자. 그렇다면 여성 캐릭터가 동급, 혹은 그 이하 남성에게도 존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가? 'BvS'에서 '원더우먼'이 '배트맨', 혹은 '슈퍼맨'에게 존댓말을 했다면 당신은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설정상 한 정체(entity)의 공주이자 뛰어난 외교관이, 고작 망나니 재벌, 혹은 신문 기자에게 존댓말을 한다면 말이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총책임자 '아만다 월러'가 그에 소속된 어떤 악당에게 존댓말을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이것이 비교불가하다고 하지는 말아 달라. 수 년 간 DC코믹스의 애독자였던 사람으로서 말한다. 강렬한 캐릭터성과 파워로 볼 때 할리 퀸의 존댓말과 '오빠' 호칭은 그 정도로 옳지 못한 일이다.
 
DC코믹스, 그리고 '할리 퀸' 캐릭터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호칭이 아니라면, 이번 예고편 자막은 번역자의 창작물 내 성역할 편견에 의한 명백한 오역이다. 그렇다. 오역이다.
 
   
 
 
 
3차 예고편을 본 필자의 계획: 영어 듣기 연습 잘 하겠습니다
DC코믹스와 관련하여, 필자는 번역본을 사지 않는다. 영상물 역시 한국 사이트를 통해 산 적이 없다. 필자 하나의 수요라도 줄어들어 절판이 되어야 이런 식으로 번역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할 것 같아서이다. 만약 번역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필자와 같이 영어 공부를 해서라도 원서를 읽는 사람은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아주 긍정적으로 전망한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자막이 개선될 여지가 없을 경우에 대해 필자는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현재 필자는 아시아 모 국가에 체류 중이며, 이 나라 언어에 대한 지식은 문자를 겨우 외운 수준이다. 하지만 필자는, 읽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도의 영어 듣기는 할 수 있다.
 
'할리 퀸'을 '귀여운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한국식 자막을 보느니, 차라리 알아볼 수 없는 자막을 보며 영어 듣기 연습이나 잘 하다 들어갈 계획이다. 모국이 아닌 해외에서 돈을 쓰게 하고, 영어 연습을 할 기회를 준 일부 번역자(아니, 오역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주요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