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만신'과 '노예12년'이 무언가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는 다큐멘터리였고, 하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영화였다. 이 두 영화를 연달아 본 것도 무슨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일요일 내내 할 일이 없었을 뿐이었고, 류현경과 문소리가 좋았다. 또 워낙 고전무용을 배우고 무속신앙에 대해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어서 그냥 '만신이 보고 싶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다 보자.'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시상식 이전부터 아카데미 기획전을 통해 작품들을 꾸준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치않게 연달아 보게 된 이 두 영화!! 묘하게 연결해주는 연결고리들이 있다.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버릴 정도로 독특한 이 연결고리. 국적도 성별도 그리고 살아온 시대도, 살아온 내용도 전혀 다른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는 묘하게 닮아있었다.

▶ 묘하게 빠져드는 한 사람의 인생이야기
넘새([만신] 김금화 만신의 어릴적 이름)도 노섭([노예12년] 주인공 이름, 솔로몬 노섭)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넘새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여자였고, 일제강점기였으며,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이미 신이 통하는 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넘새라는 이름을 받아야 했고(너를 딛고 넘어야 아들이 태어난다는 뜻으로), 본인도 모르게 예언을 해대서 친구들을 잃어야 했고(너희 아버지는 일찍 가시겠다.. 등등), 위안부를 피해 시집을 가야 했다.

노섭은 의지가 충만한 삶이었지만 인신매매를 당하는 그 순간부터 그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주권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늘 포기해야 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편지마저 태워버렸다. 그리고 그는 동료 노예의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노래를 부른다. Roll Jordan Roll, Roll Jordan Roll~

▶ 건너야 하는 요단강 Vs. 흘러가는 요단강
사실 노섭이 Roll Jordan Roll을 부르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노예 12년]에서 명장면으로 꼽을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노예12년]을 본 사람이라면 이 노래만으로도 이 영화를 완전히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인상 깊은 노래와 장면이다. 그런데 바로 이 노래가 [노예12년]과 [만신]을 묘하게 엮어주고 있다.

김금화 만신은 무당으로 사는 삶을 살며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긴다. 특히 인천으로 내려올 때 김금화 만신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고 이때 그녀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때 김금화 만신은 죽더라도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몸에 바라를 묶는다. 그러는 와중에 옆에서는 찬송가를 부르더란다. 김금화 만신은 아마 그 노래가 찬송가였는지도 몰랐을 것이고, 심지어 요단강이 무엇인지도 몰랐단다.

그 때 들려오던 찬송가를 전부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가사가 기억이 나는데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였단다. 물론 각자의 종교에 기대었을 때 그 찬송가 역시 상황에 매우 적절한 노래다. 아마 나였어도 하느님께 기도를 했을테니 말이다. 김금화 만신은 요단강이 뭘까.. 라는 생각을 했다는데… 무속 신앙과 개신교가 같은 상황에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서로 너무나 다름을 상상했을 때 묘하게 웃음이 났다. 죽음을 앞두고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동시에 한 공간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그런 요단강이 [노예12년]에서 다시 등장했다. 목화를 따던 동료 노예가 죽었다. 노섭은 그저 그 시체를 묻는 일에 집중한다. 노섭에게 동료의 죽음은 그저 그가 처리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이 신에게 기도하며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Roll Jordan Roll Roll Jordan Roll I want to get to heaven when I die to hear Jordan roll

노섭은 이 장면에서 처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노섭은 종교와 관련해서 처음부터 그때까지 일관되게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보이는 종교는 노예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위로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농장주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혹은 자신들이 흑인들을 감화시킨다는 자기 위안의 수단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은 현재의 삶에 대한 위로를 종교를 통한 내세의 삶으로 받았다. 노섭은 그런 태도가 싫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갑자기 노섭이 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그리고 한이 가득한 목소리로. 점점 더 크고, 격렬하게 부른다. 아마도 노예로서 사는 삶을 자신이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영원히 노예로 살다가 이렇게 죽지 않을까? 라는 불안감과 슬픔이 그를 엄습했고, 그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 아닐까?

죽음을 앞에 두고 두 영화 모두 요단강이 등장했다. 하나는 다시 만나기 위해 건너야 하는 강이었고, 또 하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강이었다. 요단강의 의미 자체를 몰라도 상관없다. 이 두 영화의 각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현실을 수용하고, 그에 대해 준비를 한다. 자신의 느낌을 전달한다. 요단강, 그 죽음에 대한 태도가 그리고 죽음과 언제나 연결된 삶에 대한 태도가 두 영화를 묘하게 엮어주고 있었다.

   
 


▶  결국은 모두 한의 소리
[노예12년]에서 Roll Jordan Roll을 부르는 노섭의 목소리는 정말 마음 깊이에 새겨졌다. 그의 내면에 있는 모든 감정들이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분노, 억울함, 공포, 수용, 슬픔 등등이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가 Soul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장르들, Soul 뿐만 아니라 흑인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 음악들은 정말 그들의 영혼이 담겨있기 때문에 감동적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많은 고통을 노래로 풀어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이 평범하게 불렀을 노동요에도 그들의 한이 서려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의 대표 정서라고 하는 한은 정말 단지 우리 민족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한은 노래를 통해 흥이 된다. [노예12년]에서도 한이 가득한 노래가 결국 그들을 위로하고, 그 노래를 통해 삶에의 의지를 조금이나마 얻게 되고, 흥이 된다.

[만신]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 금화가 무당이 되고, 여러 신을 모시고, 굿을 하며 배웠어야 할 노래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데 그 노래와 춤사위들 역시 신이 들어오지 않고, 흥이 없으면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찌 그 몸짓과 목소리에 한이 없겠는가? 어린 나이부터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기면서도 그 직업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해야만 하는 그녀의 운명, 그녀의 한이 어찌 노예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한을 노래와 몸짓으로 풀어내고, 그것을 흥으로 바꾸어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녀 역시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고, 그 수용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노래를 배우고, 노래한다.

결국 노섭의 그 슬픈 노래도, 김금화 만신의 노래도 삶에 대한 한의 소리이고, 그 한을 흥으로 엮어내는 소리 아닐까?.

▶ 바라보는 시선
이렇게 관찰자 입장에서 두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 또 있다. 이 두 영화는 우리를 영화를 단순하게 관찰하는 기존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_진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만신]의 마지막 장면은 어린 넘새가 걸립을 다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넘새의 곁을 실제 김금화 만신이 지나간다. 걸립이라는 것은 마을에서 내림굿을 받을 무당이 마을에서 쓰지 않는 쇠붙이를 모으는 행위인데 이때 모은 쇠붙이들을 모두 녹여 새 무당이 쓸 무구를 만든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을과 무당은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넘새의 걸립에 동참하는 인물들이 참으로 흥미롭다.

넘새의 걸립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김금화 만신이 만난 사람들이다. 넘새를 죽이려 했던 군인의 총, 넘새의 마을에 살던 아저씨의 쓰지 않던 놋쇠 숟가락, 넘새가 시체를 찾아준 아저씨의 동전 등이 넘새에 치마에 담긴다. 즉, 김금화 삶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 걸립을 통해 김금화 삶에 하나로 녹아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은 넘새의 어깨를 통해 걸립을 받던 시선에서 벗어난다. 박찬경 감독은 넘새의 어깨를 따라다니는 촬영 장면을 우리 모두에게 노출 시켜버린다. 여전히 우리는 영화 밖 관찰자이지만 우리는 그 장면을 관찰하는 또 다른 카메라를 통해 제2의 관찰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반전이 있다. 넘새이 걸립에 다시 넘새가 동참한다. 새만신 역을 한 류현경, 그리고 만신 역할을 한 문소리가 걸립에 동참한다. 그리고 어린 넘새가 걸립을 마치고 처음 대낮에 달은 본 자세로 눕자 걸립에 동참한 모든 이들이 넘새를 내려다 본다. 문소리도, 류현경도, 그리고 심지어 김금화 만신도 어린 넘새를 내려다 본다. 문소리, 류현경이야 배우이다 보니 그들은 자신의 연기를 때로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본다는 의미에서 아마 문소리, 류현경도 새로운 경험이었을지 모른다. 다만, 가장 궁금했던 것은 김금화 만신의 감정이었다. 실제 본인 자신은 아니지만 어린 넘새를 바라보는 김금화 만신의 감정이 궁금하다.

박찬경 감독의 [만신]의 절정은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우리는 제 1관찰자였다. 그러나 화면에 카메라 및 촬영장면이 노출이 되면서 제 2관찰자가 되고, 넘새를 내려다보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제3관찰자가 된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결국에는 객관적인 관찰의 입장이지만 어느 정도는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자꾸 시선이 멀어지면서 어떻게 보면, 우리는 3번의 의도를 거치면서 '우리 스스로 객관적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김금화 만신의 이야기도 그녀의 이야기지 '우리가 절대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라는 메시지 같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엔 넘새를 바라보는 넘새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이 이야기는 무당에 대한 무당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_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스티브 맥퀸 감독은 노섭의 이야기를 매우 담담한 시선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의 고통을 극대화 시켜 보여주려 노력하지도 또 너무나 남의 이야기처럼 보여주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감독은 롱테이크 기법으로 노섭의 고통을 우리가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노섭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장면, 그가 장례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펫시를 때리고, 펫시가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 등등 꼽자면 수도 없다. 그런데 딱 한 장면, 이 모든 규칙을 깨버린 장면이 있다.

브래드피트가 떠난 뒤 이어지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관객은 정말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노섭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화면 한 가득 그의 얼굴과 하늘이다. 그는 왼쪽부터 천천히 하늘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카메라를 본다. 정확히 카메라를 본 것인지, 아니면 카메라 언저리를 본 것인지 알 수 없다. 노섭의 눈에 슬픔이 유독 가득했던 것도, 분노가 가득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는 바라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너무도 부끄러웠고, 너무도 뜨끔했고,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주 예전의 일이고, 노섭과 나는 시대도 지역도 다른 사람이니 그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태까지 노섭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관찰만 했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 장면 이후 감독은 다시 우리를 관찰자로 만든다.

하지만 난 그 장면을 영화 끝까지 내내 잊을 수가 없었다. 단 한 순간이었지만 감독은 관객을 영화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노섭의 시선이 영화 안이 아니라 영화 밖을 향하는 순간, 영화를 보던 나의 시선은 변화했다.

▶ 선택할 수 없는 인생에서 찾아낸 삶에의 의지! 
두 영화는 사실 전혀 다른 시대의 전혀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디테일한 부분들을 설명했지만, 사실 가장 큰 공통점은 두 주인공 모두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김금화 만신은 결국 만신의 자격을 얻으며 무당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을 만들어 냈다. 무당의 여러 춤사위 및 의식들을 대중에게도 알렸다. 그녀는 행복한 무당의 삶을 살고 있다.

노섭 역시 풀려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을 만난다. 그리고 노예들을 위한 일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두 주인공 모두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테두리에서 끊임없이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이야기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무당의 이야기, 노예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나름대로 매일같이 사투를 벌이면 살고 있지 않은가? 하루하루가 엄청나게 치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당이라고 매일같이 치열했겠는가? 노예라고 매일 슬프기만 했겠는가? 다 매일 매일의 삶 안에서 슬픔, 즐거움, 분노, 기쁨이 다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지루함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도 큰일들만, 큰 감정들만 편집해 놓으면 한 편의 멋진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삶에서 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말이다.

우리의 삶은 지루한 삶이 아니다. 매일 같은 싸움이다. 더 행복해지자. 후에 내가 나를 내려다 보았을 때, 그리고 나를 지켜보는 관객들과 눈을 맞추었을 때 모두가 나를 향해 웃음지어 줄 수 있도록…

[글] 아띠에떠 해랑 artietor@mhns.co.kr

팝 칼럼 팀블로그 [제로]의 필자. 서울대에서 소비자정보유통을 연구하고 현재 '운동을 좋아하는 연기자 지망생의 여의도 입성기'를 새로이 쓰고 있다. 언제 또 다른 종목으로 여의도에 입성하게 될는지. 여전히 나의 미래가 궁금한 인간. 나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여자, 말 하는대로 이루어지는 여자'. 
* 아띠에터는 문화뉴스 칼럼니스트 그룹이다.


 

주요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