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든 건 두 여자 델마와 루이스입니다.

 

무엇이 그녀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시간을 돌려보겠습니다. 델마는 남자와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알까요. 곧 자신의 배에 총알이 박힐 거란 걸. 즐겁게 춤추던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사건은 일어납니다. 살인을 저지른 두 여자는 도망가고, 죽은 자는 말이 없네요. 이번 주 시네 프로타주가 선택한 영화는 '델마와 루이스'입니다. 두 여자가 손에 피를 묻힌 이유를 알아볼까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앞서 말한 이야기엔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죽은 남자를 다시 살려 보겠습니다. 그는 델마를 겁탈하려 했고, 이에 분노한 루이스는 총을 쐈습니다. 이 사건의 전말을 전할 수 있었다면, 델마와 루이스가 향해야 했던 곳은 멕시코가 아니라 경찰서였겠죠. 하지만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걸 믿어줄 것 같아?" 결국, 델마와 루이스의 탈주는 범죄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시선 때문이었던 거네요.
 
영화 속에서 델마와 루이스가 느끼는 시선은 자연스레 그 사회가 여성에게 보내는 시선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선, 이 사회 내에서 그녀들의 위치를 봐야겠네요. 델마는 가부장적인 남편 옆에서 멸시를 받는 주부입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죠. 두 사람은 누군가의 '오더'를 받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거죠.
 
그래서일까요. 두 여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독특합니다. 마치 "여자 둘이서 지금 뭘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죠.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 혹은 유희의 대상으로 불쾌하게 바라보는 시선 등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델마와 루이스는 질주하고 있습니다.
 
   
 
 
 
델마와 루이스가 사회가 요구하는 시선을 이탈하게 되는 건, 온전히 사고였습니다. 특히, 나쁜 남자들이 그녀들을 탈주하게 하죠. 첫 번째, 성폭행범과의 만남은 델마와 루이스를 자신들의 삶과 공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두 번째, 잘생긴 빵 오빠는 델마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계기를 줍니다. 물론, 그게 범죄였지만 말이죠.
 
경찰에게 쫓길수록, 살던 곳을 벗어날수록, 그리고 범죄를 저지를수록 델마와 루이스는 자유로워집니다. 그들이 살던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그 규범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두 여성은 자신이 모르던 자아를 찾아가는 거죠. 두 여성의 자유가 범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사건이 있어야만, 여성이 자유를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자유로워진 델마와 루이스는 살인혐의를 지울 수 있다는 제안을 받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경찰의 말을 믿을 수 없던 걸까요? 아마도 그들에겐 지금 맛 본 자유가 원래 있던 곳으로의 귀환보다 소중했을 것입니다. 델마는 자신이 이렇게 일탈하게 된 걸 남편 때문이라 말하죠. 자신을 억압하는 남편, 그리고 이러한 남편들과 억압받는 여성을 재생산하는 사회로 돌아가기 싫었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여자의 삶을 악화시키기만 합니다. 기회를 뺐고, 편견으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죠.
 
델마와 루이스의 이야기가 길 위에서 이뤄진다는 건,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주체적 여성으로 두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없나봅니다. 쫓기는 두 여성을 보면, 그들의 자유란 범죄와 같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죠. 그래서 두 사람이 선택한 목적지는 길이 아닌 곳 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루이스가 텍사스에 가지 않는 건, 델마와 같은 일을 겪었던 공간이었기 때문이었죠. 아마 그녀도 피해자였지만, 사회의 시선에 의해 가해자가 되고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버린 사회에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거죠. 루이스가 텍사스에 가지 않는 것처럼, 길 위의 두 여자는 자신을 상처준 사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엔 없는 곳으로 가게 된 거죠.
 
   
 
리들리 스콧 감독은 두 사람이 탄 자동차를 하늘에 붙잡아 둡니다. 두 여자는 추락하지 않고 하늘을 날고 있죠. 그렇게 델마와 루이스는 영화 속에서 영원히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존재로 박제됩니다.
 
다양한 대중문화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델마와 루이스.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논할 때, 여전히 자주 언급되는 영화입니다. 하늘을 나는 그녀들이 여전히 소환되는 이유는, 지금의 사회에도 억압받는 델마와 루이스들이 많기 때문이겠죠? 지금까지 시네 프로타주였습니다. '시네 프로타주'가 올려지는 '시네마피아'는 문화뉴스와 함께 하는 영화 MCN 채널입니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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