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 출입 통제된 지역으로 백범의 흔적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화제

[문화뉴스 MHN 김재정 기자] '인천은 내 일생에 있어 뜻깊은 곳이다. 21살에 인천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23살에 탈옥 도주했고, 39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었다'(백범일기 中)

ⓒ 연합뉴스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의 의미있는 흔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白凡) 김구 선생(1876-1949)이 투옥되었던 인천 곳곳에 남긴 발자취가 재조명되었다.

백범은 백범일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천에서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며 독립운동과 관련한 흔적을 많이 남겼다.

그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육군 중위를 처단한 혐의로 1896년 인천 감리서(監理署)에 투옥됐다가 사형 집행을 직전에 고종의 명으로 살아난 극적인 사연은 영화 '대장 김창수'로도 제작돼 널리 알려졌다.

백범은 수감 2년 만인 1898년 탈옥했지만 독립운동 중 1911년 체포돼 1914∼1915년 인천분감에서 다시 옥고를 치렀다.

오늘날 인천시 중구 내동에는 처음 투옥되었던 인천 감리서 터가 남아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인천 감리서에 수감되자 인근 물상객주 집에 기거하며 옥바라지를 했다고 전해진다.

인천에 남은 백범의 여러 발자취 가운데 내항 1부두는 두 번째 수감인 1914∼1915년 동안 강제노역에 동원돼 쌓은 것으로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더 뜻깊은 장소다.

ⓒ 인천시 시사편찬위원회 역사자료관

백범은 조선인 죄수들과 축항공사에 강제동원되어 뻘과 흙을 파내고 이를 지게로 나르며 내항 1부두를 세우는 혹독한 노역을 했다.

1883년 외세에 의해 개항할 당시만 해도 인천항은 자연과 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제물포'라는 어촌 포구였다.

그러나 일제는 서울과 가까운 항만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의 인천 내항 1부두 자리에 최고 10m에 달하는 조수간만의 차와 관계없이 배를 댈 수 있는 인공항만시설을 지었다.

1918년 완공된 국내 최초의 근대적 갑문식 항만시설인 인천항 제1선거는 4천500t급 선박 3척과 2천t급 선박 4척을 동시에 댈 수 있었고 이는 일제의 침탈에 활용되었다.

백범은 강제노역의 참혹한 상황에 대해 "아침저녁으로 쇠사슬로 허리를 이어 매고 감옥과 공사장을 오갔으며 흙짐을 나르다 보면 반나절 만에 어깨와 발이 부어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100여 년 전 백범이 강제노역으로 쌓은 석축은 아직도 내항 1부두 북측 벽에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해방 후 우리 정부가 최대 5만t급 선박까지 접안이 가능한 인천항 제2선거를 새로 건설하고 1974년 현재의 인천항 갑문이 세워지면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갑문은 철거됐지만 견고하게 쌓아진 1부두 석축은 아직도 원래 모습이 남아 있다.

ⓒ 연합뉴스

이곳에는 당시 배를 묶어두는 역할을 한 계선주도 녹이 슨 상태로 곳곳에 남아있다.

철거되거나 사라진 백범의 다른 흔적과 달리 100년 넘은 내항 1부두가 그대로 보존된 것은 이곳이 보안시설인 항만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는 이에 인천대공원에 건립된 백범 동상을 인천항 인근 월미공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백범과 별다른 연고가 없는 인천 대공원보다는, 강제노역을 한 인천항과 가까이 있는 월미공원에 동상이 있는 것이 교육 취지에 더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초기 인천 축항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백범의 흔적이 남아있는 내항 1부두 석축을 문화재로 등록해 보전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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