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성지'...프랑스 역사 주요 변곡점 마다 함께한 '상징적' 건축물

[문화뉴스 MHN 한진리 기자]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15일 저녁(현지시간) 화마에 휩싸였다.

출처: 파리 AP

"우리의 일부가 붙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로 인한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15일 저녁(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큰 불길에 휩싸이면서 그간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성지나 다름없었던 대성당은 그 찬란했던 빛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16일 천주교주교회의 등에 따르면 파리 구도심 시테 섬 동쪽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는 물론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산실이다.

파리에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은 성당이 10여개 정도 있다. 이들 성당마다 '우리의 어머니(성모 마리아)'라는 뜻을 지닌 노트르담이라는 단어가 성당 이름의 앞자리를 차지하지만, 종교적으로나 건축미에서 단연 으뜸을 꼽는다면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처럼 노트르담 대성당은 강렬한 교회 건축인 유럽 초기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오랫동안 프랑스를 상징한 건축물인 노트르담 대성당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심하게 파손됐고, 비올레르뒤크(1814∼1879)가 19세기 중반에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현재 규모는 가로 48m, 세로 128m이며, 탑 높이는 69m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중요한 또 다른 건축 요소는 창문이다. 특히 '장미 창'으로 불리는 거대한 원형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하다.

출처: 연합뉴스

조 교수는 "중세 장인들은 넓은 창마다 기하학적 문양과 식물 문양 등을 냈으며, 각각의 세부 구획에는 다시 화려한 빛깔의 색유리 조각으로 성경 속 사건과 인물을 묘사했다"며 "촛불이라는 제한된 인공 광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밝은 빛은 그 자체가 신비하고 숭고한 존재이자 종교 예식의 중요한 동반자였다"고 전했다.

가톨릭계에서 대성당이라는 의미는 주교좌 성당을 의미한다. 파리교구장인 주교가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서울 명동대성당처럼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성당이란 뜻이다.

성당 내부에는 수백 년 역사 속 파리교구장들이 입은 제의나 포도주 잔 등 유서 깊은 성물이 다수 보관된 것으로 전해졌다.

1981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건태 신부는 "노트르담 성당은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는 점을 넘어 파리 교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당"이라며 "많은 왕이 대관식을 했던 곳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부활절을 앞둔 성주간에 이런 일이 생겨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신앙인으로서 조금 더 반성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전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출처: 연합뉴스

노트르담 대성당의 건립부터 현재까지를 돌아보면 파리, 프랑스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낸 '한국가톨릭대사전'을 보면 노트르담 대성당은 1159년 36세 나이로 파리 대교구장에 오른 모리스 드 쉴리에 의해 이듬해부터 건축이 계획됐다. 성당은 무려 185년이 지난 1345년 파리 중심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 루이 9세는 생 샤펠 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노트르담 대성당에 예수의 가시관을 안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1302년 필립 4세는 최초로 전국 삼부회를 노트르담에서 열었고, 1430년 영국 왕 헨리 6세의 대관식,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 회복을 위한 재판 등이 열리며 종교·정치의 중심에 선 곳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는 혁명군 보급 물자를 보관하는 곳으로 쓰였다가 1804년 교황 비오 7세 집전으로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현대사에서도 노트르담 대성당은 주요 장면을 차지한다. 1차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예식이 1918년 11월 17일 이곳에서 열렸고, 2차 대전 때 독일에 맞서 싸웠던 드골 장군의 예식도 1944년 치러졌다.

이처럼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프랑스 파리의 역사와 함께 숨쉬던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재로 인해 프랑스 전역은 큰 슬픔에 잠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재의 충격으로 인해 걷던 걸음을 멈추고 화재를 멍하니 지켜보거나 눈물을 흘리며 '인류의 유산' 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시민도 있었다. 전 세계 역시 침통한 심정을 밝히며 프랑스를 위로했다.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