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연희단거리패의 이윤택 작 연출의 백석우화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글] 문화뉴스 박정기 (한국희곡창작워크숍 대표)
pjg5134@mhns.co.kr 한국을 대표하는 관록의 공연평론가이자 극작가·연출가.

[문화뉴스] 백석(白石, 1912~1996)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명은 기행(夔行) 또는 기연(基衍)으로 불리었다. 작품에서는 거의 '白石(백석)'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그 뒤 8·15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함흥 소재)·여성사·왕문사(일본 동경) 등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다. (한때 북한에 남아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 않음) 백석은 그 시대 어느 문학 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한다. 이를 계기로 <마을의 유화>·<닭을 채인 이야기> 등 몇 편의 산문과 번역소설 및 논문을 남기고 있으나, 실제로는 시작(詩作) 활동에 주력한다.

1936년 33편의 시작품을 4부로 나누어 편성한 시집 <사슴>을 간행함으로써 문단 활동이 본격화된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기까지 60여 편의 시작품을 자신이 관여했던 <여성>지를 비롯하여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다.

1937년 겨울, 백석은 두 해 동안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려고 함경도로 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게재한 산문 <가재미·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 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표현된다. 이후 연작시를 주로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은 분단된다.

백석은 토마스 하디의 <테스>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을 번역하기도 하고, 꾸준히 시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분단 이후의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백석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그의 시가 실린 잡지는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토속성과 모더니티 시기 <구인회>를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의 서구적 취향과 달리 백석은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이면서도 또 다른 향토 시인 김소월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 속에 북녘 지방의 토속 방언들을 꽉꽉 채워 넣었다. 이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 힘든 북쪽 지방의 방언들을 백석은 시 속에 아름답게 녹여낸다. 백석의 현저한 토속어 지향의 시 세계는 한국인의 얼과 넋을 황홀할 정도로 빼어나게 담아낸다.

   
 

사랑은 시의 자양분이듯, 백석의 작품도 그를 스쳐간 아프고 애틋한 사랑에서 완성된다. 당대 인기가 컸던 모던 보이 백석은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다. 노천명(1912~1957)과 최정희(1906~1990) 등 당대 주요 여류 문인도 백석에 대한 애정을 작품으로 표현할 정도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로 시작하는 노천명의 대표작 <사슴>의 사슴은 백석을 가리킨다.

이런 인기에도 백석의 사랑은 늘 비극적이다. 백석이 '란(蘭)'이라 지칭한 경남 통영 출신의 박경련은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한 여인이다. 백석은 이화고녀를 다니던 박경련을 보고 한눈에 반했지만 박 씨 집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된다. 박 씨가 그의 친구이자 조선일보 동료 기자였던 신현중과 결혼하자 충격을 받고 백석은 함흥으로 떠난다. 박 씨를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았던 기억은 시 <통영>등과 <남행시초>연작으로 남게 된다.

북에서 남쪽의 친구 신현중에게 써 보낸 시의 제목이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 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이다.

요정 대원각의 주인으로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 씨와의 사랑이야기도 회자가 되곤 한다. 실연의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던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보 회식에서 만난 기생 김 씨와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김씨를 '자야'라 부르며 잠시 동거하기도 했지만, 1939년 백석이 만주로 떠나며 헤어지게 된다.

자야는 1938년 발표한 백석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 속 나타샤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백석과 헤어진 뒤 그녀는 백석을 그리며 평생 홀로 살았다고 한다. 자야는 책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이 사귄 다섯 여자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야였고, 자신 또한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백석은 몇 작품을 제외한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는 극도의 절제를 발휘한다. 바로 이런 것이 백석을 모더니즘적 시인으로 불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별하게 하는 특징이다. 반 도시(反都市)적, 산촌(山村)적 성격은 백석의 시를 더욱 독특하게 보이도록 한다.

시집 『사슴』에는 총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도시 문명 또는 도시 감각에 바탕을 둔 시는 한 편도 없다.

흔히 백석 시에 나오는 시골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안온하고 풍요로운 전원으로 비춰진다. 때론 이런 그의 시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판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삭이려는 시인의 힘겨운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대는 신문사의 편집실도 되고 북한문화예술위원회가 되기도 한다. 왼쪽에 책장과 긴 탁자와 의자가 놓이고, 오른편에는 소형 피아노가 놓여있다. 그 앞쪽으로 의자가 놓여있다. 배경벽면에 당대의 상황과 문인들 약력이 영상으로 투사되고, 백석의 시가 나열되고 작곡자가 소개되기도 한다.

연극은 도입에 북과 채를 든 소리꾼이 등장해 백석의 시를 소리하듯 읊는다. 작중인물들이 해설자 역할을 하고, 당대의 문인들과 백석과 연관이 있는 여인들이 등장해 독창과 합창으로 관객을 음악시극 속으로 이끌어 들인다. 피아노 연주자의 기량은 출중하기 그지없고 백석역의 배우는 실제 모습이 백석에 방불하다. 6 25 동란 중에도 백석은 고향을 떠나지 않지만, 북에서는 억지춘향으로 붙인 불온 시인이라는 명목으로 백석은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된다. 거기서 마지못해 백석이 쓴 북을 칭송하는 글로 한동안 대접을 받고 명목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시작 발표대신 동요나 동화에 손을 대고, 백석이 소개한 이솝우화와 연관된 사건으로 해서 그는 삼수갑산으로 유배를 당하고, 그의 전 작품이 폐기 처리된다.

향후 30년 가까이 삼수갑산에서 지내며 백석은 시작을 했어도, 자신이 쓴 글을 곧바로 불쏘시개로 사용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그의 말년이자 한때 남북교류가 행해지던 당시, 고향후배의 자손이 남한에서 출판된 백석의 시집을 들고 방문한다. 백석이 가족과 함께 놀라고 기뻐하는 모습을 기념 촬영하는 장면과 소리꾼의 창과 출연자 전원이 백석 시를 합창하는 장면에서 연극은 끝을 맺는다.

   
 

오동식, 김미숙, 이승헌, 강호석, 김아라나, 이동준, 허가예, 이혜선, 신명은, 서민우 등 출연자 전원의 1인 다 역으로서의 성격창출과 호연, 그리고 열연과 열창은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는 역할을 하고 갈채를 이끌어 낸다.

음악 권선욱, 작창 이자람, 작창협력 이지숙, 서도소리 강효주, 정가 박진희, 안무 박소연, 무대제작 김경수, 조명감독 조인곤, 의상 김미숙, 무대감독 김한솔 등 스태프 전원의 기량이 조화를 이루어 연희단거리패의 이윤택 대본구성 연출의 <백석우화(白石寓話)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 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을 연극사에 기록될 한편의 명작음악시극(音樂詩劇)으로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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