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왜 광주였을까
518 민주화운동, 왜 광주였을까
  • 김재정 기자
  • 승인 2019.05.18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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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정권이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깨달음과 왜곡과 검열... '광주'이기에 특별했던 민주화운동
출처 : 5.18 기념문화재단
출처 : 5.18 기념재단

[문화뉴스 MHN 김재정 기자] 오늘은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39주년이다. 

이를 기념하여 광주에서는 추모식과 기념 행사가 진행되었고,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정계 인사들이 광주를 방문하였다. 

군부 독재와 쿠데타에 맞서 뜨거웠던 격동의 1980년, 왜 하필이면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과 같은 항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사실 당시 광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운 상황이었다. 

1979년 10.26 사태로 혼란을 틈타 집권한 전두환에 대한 분노가 전국적으로 치솟으며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가 주도하는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일어나던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1980년 5월 17일 전국 계엄령 선포로 더욱 활발해졌다. 

출처 : 5.18 기념재단
출처 : 5.18 기념재단

17일 저녁 계엄군에 의해 학생들이 구타 당하고 학교 본부 건물에 감금되거나 연행되자 다음날인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2~300여 명으로 불어났고, 대치하던 계엄군은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진압봉과 물대포로 학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광주의 도심인 전남도청과 충장로로 이동한 전남대학교의 학생들은 타 학교의 학생들과 주변의 시민들을 모아 1000여 명의 인원으로 시위를 시작했다. 

한편 계엄군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거리에 나온 사람 전원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고, 도망가는 시민들을 붙잡으며 고등학교에까지 난입하는 등 대규모 진압을 진행한다. 

뿐만 아니라 진압 과정에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가해 농아 김경철씨를 사망에 이르게 하여 첫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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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에 분노하는 동시에 특히 학생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행태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19일과 20일 더욱 격렬하게 저항 시위를 벌여 광주 교통의 요지였던 광주역을 점거하게 된다. 

그러나 광주역 안에는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시체가 2구 있었고, 이에 분노한 시민 시위대 대표는 전남 도지사와의 협상을 통해 계엄군의 해산을 약속받았으나 21일 오후 1시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시위대를 향해 계엄군의 무차별 조준 폭격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더이상 군대와 국가가 시민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광주 시민 시위대는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고 시민군을 결성하게 된다. 

출처 : 5.18 기념재단
출처 : 5.18 기념재단

다른 민주화 운동에 비해 유달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518 민주화운동은 크게 두 가지의 상징적인 점이 있다. 

먼저 독재 정권의 국가가 더이상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던 장애인, 임신부 등에게도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모습에 국가와 군대를 신뢰하지 못한 광주 시민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이후 국내의 여러 민주화 항쟁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활용되었다. 

또한 서울에서 거리가 먼 광주이기 때문에 당시 민주화 운동에 대해 수많은 왜곡과 은폐가 존재했으며, 언론사 역시 독재 정권에 의해 검열, 삭제 당하며 제대로 된 보도를 할 수 없어 광주 밖의 시민들에게 상황이 전달되는 것에 큰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는 데에 다른 민주화 운동에 비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어 관을 마련할 수도 없었고, 군의 암매장과 시체 소각으로 인해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조차 확인할 수 없는 518 민주화운동. 

오늘 하루 정도는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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