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시간은 영원하다. 공간도 영원하다. 한자로 시간은 時間, 공간은 空間이라고 한다.

​시간은 어떤 시각과 또 다른 시각의 사이를 말하며, 공간은 어떤 장소와 또 다른 장소의 사이다. 순우리말로 시각은 때, 장소는 곳이라고 한다. 때는 물과 같이 흐르나 보이지 않고, 곳은 흐르지 않으나 존재의 존립 기반이 된다. 그러나 곳은 수평의 연장선 상에서는 형태의 이동이 이루어지거나 다른 형태와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때가 다른 때로 흐를 때는 세월이 되며, 세월이 흐름으로써 생성과 성장과 노쇠와 사멸이 이뤄진다. 때는 흐름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의 궤적을 그린다. 과거는 흔적이 되고, 현재는 아무도 없는 곳에다 흔적을 남기는 실재가 되며,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간이다. 곳은 두 가지 양상을 보인다. 같은 시간 대의 서로 다른 곳은 눈으로 볼 수가 있다. 시간이 다른 경우에는 차원이 된다. 차원이 다르면 서로 볼 수가 없다. 아니 서로 볼 수가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신이나 귀신, 도깨비 등 인간의 상상력이 동원할 수 있는 영(靈)의 공간이 마련된다. 즉 인간이 알 수 없는 장소로 정해진 곳을 차원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공간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은 증명할 수 없는 곳이 된다.

​시간과 공간도 집이 있다. 물론 인간이 설정한 집이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물체라고 가정했을 때 이들도 거처하는 공간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그러면 시간의 집과 공간의 집은 무엇이라 할까. 바로 우주(宇宙)다. 宇는 집 우, 宙는 집 주라고 한다. 둘 다 뜻은 집이다. 다만 소리가 우와 주로 다를 뿐이다. 그러나 둘 다 집이긴 하지만 宇는 공간의 집, 宙는 시간의 집을 뜻한다.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宇는 상하사방, 宙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컬었다. 당시에는 지구를 떠난 별천지 세계(현재의 우주)를 가지도 못했지만 그곳을 또한 상징하여 우주라고 하기도 했다. 이 말이 현재 태양계를 포함한 천체가 우주로 불리게 됐다. 과연 천체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곳과 아무리 흘러도 닿지 못하는 시간의 무한대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천자문에서 우주는 넓고 거칠다. 넓은 것은 끝이 없을 공간이요, 거친 것은 끝을 모를 시간이다.

​그 끝이 없을 공간의 한 언저리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 끝을 모를 시간의 한 변방에 우리가 시간을 영위하고 있다. 시간은 나뉘고 나뉘어서 1년이 되고, 1년은 다시 사계절로 분화된다. 지구의 어디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는 곳도 있다. 사계절의 세 번째가 가을이다.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단풍과 낙엽이다. 단풍과 낙엽은 이 계절에 모두 이루어진다.

   
 

​단풍은 식물의 잎으로서 온도에 변화가 나타나면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색이 변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생육 환경에서 온도가 가장 크게 변하는 시기가 가을이다. 이때는 무더운 여름 때 달궈진 기운이 추운 겨울로 접어들면서 심하게 변동한다. 이때가 되면 온 산이 붉고 노랗게 물이 드는 것처럼 식물의 잎 색깔은 변한다. 특히 나뭇잎의 색깔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눈을 놀라게 한다. 자연이 주는 예술이다. 이처럼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든 것을 만산홍엽이라고 한다.

이런 때 사람들은 단풍 구경을 간다. 시간의 세파에 찌든 머리를 식히기 위해, 공간의 시달림을 잠시나마 어루만지기 위해 자연이 펼쳐 놓은 잔치를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자연은 가을이 되면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선사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눈의 즐거움도 선물한다. 눈이 즐거운 만큼 얻는 것도 있어야 한다. 이처럼 온 산을 나뭇잎이 눈부시도록 붉고 노란 색으로 장식해 눈의 즐거움이 되지만 즐거움은 일시다. 즐거움이 일시이기 때문에 그 즐거움의 가치는 대단히 높다.

영원한 시간, 영원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공간과 시간은 얼마나 될까. 찰나로도 어림없을 짧은 시간일 것이다. 그 짧디 짧은 시간과 공간을 가장 효과 높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고진감래라고 했다. 즐거움의 가치가 높으려면 그동안 흘린 땀방울의 가치가 있어야 하고, 땀방울을 흘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한다. 무한대의 경쟁 시대라고. 하지만 무한대의 경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인류가 지상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지도 모른다. 다만 상황이 바뀌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 사람들 가운데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다.

   
 

경쟁은 남을 밟고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남과 함께 더불어 나아가면서 자신의 실력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리할 때 동료를 사귈 수 있다. 동료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리는 아무 가치가 없다. 자연에서 주는 단풍의 예술미는 아낌없이 주는 것도 아니고 특정인만을 위해 베푸는 것이 아니다. 사시사철 주는 것도 아니다. 공존할 때, 조화로울 때, 협력할 때 베풀 수 있고 베풂을 받을 수 있다.

​낱말에는 품사가 있다. 대명사, 명사, 수사, 관형사, 조사, 형용사, 부사, 동사, 감탄사다. 이를 9품사라 한다. 단풍이란 낱말이 주는 성격의 기능을 품사에 적용한다면 아마도 형용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대명사는 뭐고 명사는 뭐다 하는 식으로 안다면 죽은 지식이다. 각 품사의 성질과 기능을 알아야 한다. 그리 할 때 우리는 놀라운 글을 쓸 수 있다.

각 품사가 조화롭게 제 기능을 하고, 성질에 맞게 활용되면 좋은 글이 된다. 글은 이들 9품사가 조화롭게 사용될 때 바른 모양을 갖춘다. 그러고 보니 산에는 이들 9품사의 요소가 모두 들어 있다. 아니 산만이 아니다. 바다에도 있고, 강에도 있고 우리 사는 동네에도 있다. 그러고 보니 9품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비발디의 가을이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음률을 흘려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문화뉴스 조진상 기자 ackbarix@mhns.co.kr

[도움말] 가갸소랑 우리말 아카데미 (http://www.soranga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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