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7.4m, 너비 4.5m... 조사 바탕으로 정비와 복원 계획 수립

출처 : 한백문화재연구원

[문화뉴스 MHN 김재정 기자] 조선시대 수많은 문인과 사신이 찾았으나 한국전쟁으로 1953년 무렵 소실된 파주 임진강 인근의 진서문(鎭西門)의 정확한 규모가 확인되었다. 

파주시와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백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영일)은 지난 3월 시작한 임진나루와 임진진 발굴 조사 결과 문길이가 7.4m, 너비가 4.5m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30일 밝혔다. 

임진나루는 임진강 남측에 위치한 강변 시설로, 북쪽에 위치한 장단나루와 함께 국외로 통하는 교통 요지로 꼽혔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종 18년(1418) 2월 "어가(御駕)가 임진나루 북쪽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한양을 떠나 피신하던 중 한밤중에 임진나루를 건넜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등 예로부터 왕들이 이용할 정도로 공식적인 국가의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나루에는 영조 때인 1755년 군진인 임진진이 설치되었고, 나루 안쪽 협곡을 가로지르는 성벽을 쌓으며 진서문을 짓게 되었다. 

석조 홍예 위에 목조 누각을 지으며 임벽루(臨壁樓)라고 부르기도 했다. 

출처 : 한백문화재연구원

진서문의 모습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보관하고 있는 '경강부임진도'와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가 그린 '임진서문'(臨津西門) 속에 그림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은 "2015년 시굴조사 이후 4년 만에 진행한 발굴조사로 진서문 흔적과 성벽 일부가 나타났다"며 "진서문 규모는 조선시대 성문 중 대형에 속하는데, 그만큼 임진나루와 임진진 위상이 높았다고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진서문터에서는 홍예슬 받친 기초석, 토로에 깐 대형 보도석, 커다란 측벽석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문을 설치하기 위해 기둥 구멍을 낸 문확석 2기와 문지방석도 추가적으로 발견되었다. 

연구원 측은 조사 결과를 밝히며 "진서문은 문짝을 안쪽으로 여닫는 형태였다"며 "동쪽 측변은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일부 사라졌지만, 서쪽 측변은 약 1단 정도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출처 : 한백문화재연구원

또한 "진서문 통로부 안쪽과 성문 서쪽 측벽으로 유적이 연결되는데, 이에 대해 추가 조사를 해야 한다"며 "보도와 접안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서문 외부도 발굴할 필요가 있다"며 주장을 덧붙였다. 

한편 연구원 측은 이번 조사에서 임진진 전체 범위를 측정하기 위한 지표 조사도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임진리 마을 주변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왓조각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임진나루 안쪽 옜길 주변 공터에서 고려시대 기와를 집중적으로 출토했다. 

조사에 함께한 파주시 관계자는 "고려시대에도 임진나루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히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비·복원 계획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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