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추념사서 언급되며 재조명 되는 약산 '김원봉'
그의 생애와 항일투쟁 활동 총 정리

[문화뉴스 MHN 한진리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언급한 약산 '김원봉'이 연일 화두에 오르며 주목을 받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김원봉은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한국사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 배경을 놓고, 청와대와 보수야당은 각기 상반된 입장을 내놓으며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김원봉은 누구이며, 현재 어떠한 이유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일까?

'김원봉'(金元鳳)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약산(若山)이다.

1918년 난징(南京)의 진링 대학에 입학한 후, 항일 투쟁을 좀 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싶었던 그는 1919년 만주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여 과감한 폭력 투쟁을 전개했다.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국내로 대규모의 폭탄을 들여와 조선 총독부, 경찰서, 식산 은행,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의 일제의 주요 식민 통치 기관을 폭파 및 요인 암살등의 무장투쟁을 펼쳤다.

그들은 무기를 사용하며 목숨을 걸고 투쟁했는데, 이들의 거침없는 활동은 여러 독립투쟁 중에서도 특히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출처: (주)쇼박스

당시 김원봉에게 걸린 현상금이 일제의 통치기간 수배자 중 가장 높은 금액을 기록했을 정도이니, 일본이 김원봉을 잡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38년에는 중국군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한 독립운동부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편성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그러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을 했고, 그 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그가 월북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는데, 당시 친일파가 제대로 숙청 되지 않았으며 우익 세력과의 대립이 극심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 지고 있다.

김원봉은 이념 성향 등을 이유로 광복 후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아래와 같이 말하며 옥에서 3일간 통곡했다고 한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때도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 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수가 있소"

월북 후 김원봉은 1952년 5월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8년 11월 김일성(金日成)에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延安派)제거작업 때 숙청되며 그의 생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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