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가톨릭연극협회 창단공연 김석만 예술감독 박경희 작 유환민 연출의 요셉 임치백

 

[글] 문화뉴스 박정기 (한국희곡창작워크숍 대표)
pjg5134@mhns.co.kr 한국을 대표하는 관록의 공연평론가이자 극작가·연출가.

[문화뉴스] 박경희 작가는 방송예술교육진흥원에서 방송대본과 시나리오 창작을 가르치는 교수다. 방송드라마 <기다리는 빛> <나의 부모님> <이것이 인생이다>외의 다수 작품을 집필했고, 영화로는 <2000 여고졸업반> <시집가는 날> <그날> <여보, 미안해> 외의 많은 시나리오를 썼다. 희곡으로는 <달님과 손뼉치기> <롤렉스 금장> <세 여자의 파티> <독도는 우리 땅이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어린왕자> <트라이 앵글> <5학년 5반 맹춘자> <울 엄마 부티투짱>외의 많은 희곡을 발표 공연한 미모의 중견여류작가다.

유환민(44세) 신부는 가톨릭 사제이면서 연극인이다. 그는 2002년 서울대교구장이던 정진석 추기경(당시 대주교)으로부터 연극을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당시 유 신부는 "교회의 최우선 사명은 복음 전파인데 성경이라는 텍스트는 변치 않으니까, 21세기에 걸맞게 예술을 통해 복음의 가치를 녹여내면 풍요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정 대주교가 최종결정권자인 교구 인재양성위원회에 취지를 설명했었다.

유 신부는 곧장 김광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장을 찾아갔다. 사제로서 연극을 공부하려는 까닭과 자신의 문화예술관을 얘기하자 김 원장은 '그 참 재미있다'면서 '연출 공부'를 권했다. "김 원장께서 제가 좋은 연출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교회에 이바지하려면 연극 제작 메커니즘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게 연출이니, 그걸 공부하라고 하신 거죠."

한예종에서 연출을 전공한 유 신부는 2011년에 이어 2013년 변두리 철거민 문제를 다룬 연극 <없는 사람들>을 서울 홍대 부근 가톨릭청년회관 소극장에서 올렸다. 그가 근무하던 곳 바로 건너편이 '두리반'이었고, 그때 마포지역은 철거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2012년과 2013년엔 프랑스 극작가 이오네스코의 <왕 죽어가다>를 각색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고 2016년 병인순교 150돌 기념 연극 <요셉 임치백> 연출을 맡았다.

   
 

성 임치백 요셉(Josephus)은 서울서 멀지 않은 한강변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모친을 잃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10여 년 동안을 글방에 다녔고, 무술과 예도를 배워 향락을 즐기는 친구들과 상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유순하고 효심이 지극한 까닭에 덕을 거슬린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정을 이룬 후 1830년경에 아내와 아들을 먼저 입교하여 그에게도 세례받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항상 "뒷날에 입교하겠다"고 말하며 미뤘지만, 신자들을 깊이 신뢰하여 그들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무엇보다도 즐겁게 여겨 몸 둘 곳이 없는 신자 4, 5명을 그의 집에서 살게 하였다.

1835년에 박해가 일어나 마을에서 가까운 몇몇 신자가 잡히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하였고, 자진해서 포졸이 됨으로써 더욱 열심히 그들을 도와주었다. 1846년 6월 선주였던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를 따라 연평도로 나갔다가 함께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힌 해주까지 달려가 아들의 석방을 청하였다. 이때 황해도 감사는 그의 요구를 묵살하고 도리어 그를 옥에 가두었다가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잡혀온 그는 포청의 옥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불타는 신부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어느 날 갇힌 신자들에게 "나도 오늘부터는 성교회를 믿겠소.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었소."라고 말하였다. 김 신부는 그날부터 기도문을 가르쳐 요셉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전에 임 요셉과 친하게 지내던 포졸들은 그의 목숨을 구하려고 배교하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천주는 나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시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하고 있고, 이미 죽은 사람이니 다시는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며칠 후 형리들은 그의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자식들의 처지를 보아서 배교하라고 말했지만, 인정에 끌려 천주를 버릴 수 없다고 하자 형리들은 노하여 그를 거꾸로 매달고 물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형리들에게 "당신들은 죽은 사람을 때리니 헛수고만 하는 것 아니오"라고 태연히 말하였다.

그 후 3개월이 지나 그는 곧 사형선고를 받으리라는 소문이 들리자 즐거운 마음으로 신자들에게 "나는 본래 아무런 공적도 없었는데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여러분보다 앞서서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할 터이니 여러분도 용기를 내시오" 라고 말했다. 그 후 포장 앞에 끌려가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옥에 온 뒤로부터 경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외워보아라." "아직 모두 외우지 못합니다." "십계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여기 있는 이 마티아처럼 유식해야 한다." 하고 말하자, 요셉은 머리를 흔들며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자녀가 무식하면 효도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대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배운 것은 없으나 천주께서 저의 아버지이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포장은 그를 고문하라고 명하여 대꼬챙이로 요셉의 살을 찌르게 하고 세 번이나 주리를 틀게 하였다. 이 때 요셉이 신음소리를 내자 포장은 "만일 네가 그러한 소리를 내면 그것으로써 배교행위라고 보겠다."라고 소리치자, 요셉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잔악한 고문을 받아 결국 정신을 잃고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 후에도 요셉은 거듭 고문을 받았으나 변함이 없자, 때려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져 정오부터 해질 때까지 물매질을 가하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를 옥안으로 끌고 가서 목을 졸라 죽였다. 이때가 1846년 9월 20일이요,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무대는 거대한 십자가형의 무대를 야외무대에 가설하고, 십자가의 머리 부분과 발부분에 수목조형물을 설치했다. 십자가 머리 부분 외곽에 연주석을 마련해 연주자들이 착석하고, 십자가의 팔 부분은 등퇴장로가 된다. 음악과 음향효과로 극의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조명의 변화로 장면전환이 이루어진다. 십자가 주위에 객석을 배치해 관객이 서로 마주보며 관극을 한다.

150년 전의 이야기지만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눈부신 속도로 변해버린 생활과 문화 때문이리라, 동서양의 구별도 없고, 의식주는 물론 의식과 사고자체가 대부분 서양풍으로 바뀌었으니....종교는 더 말해 무엇 하랴?

   
 

최주봉, 심우창, 박경득, 유순철, 양영준, 이승호, 유태균, 장영주, 이명희, 류재필, 차재성, 반혜라, 김발렌티노, 박기산, 고은별, 승주영, 박정희, 남희주, 이가은, 류시현, 구대영, 윤태웅, 홍여준 등 출연자 전원의 호연과 열연 그리고 성격창출은 관객의 갈채를 받는다. 특별출연한 염수정 추기경의 호연은 관객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는다.

음악 김지은, 노래 오지나, 타악 정다휘의 연주는 극적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절묘한 마무리를 한다.

무대디자인 박상봉, 의상 분장 손진숙, 조명디자인 조성오, 음향디자인 박호준, 분장 김미숙 이정희, 트러스 이명후, 무대렌탈 이기업, 무대제작 태극무대, 조명 제이라이트, 음향 사운드인글로벌, 기술감독 노민수, 사진작가 김주형, 소품 영주소백산예술촌(촌장 조재현), 홍보마케팅 조은실 김소여, 김은균, 티켓매니저 신선미, 조연출 강진광 권용준 윤지태, 시각디자인 박주순 성효진 유전귀, 서예 전각 김창현, 기획 이종열 이태실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기량이 조화를 이루어, 서울가톨릭연극협회(회장 최주봉) 창단공연 김석만 예술감독, 박경희 작, 유환민 연출의 <요셉 임치백>을 친 대중적인 공연이자 걸작 성극으로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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