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방가르드 신파극' 리뷰

   
 

[문화뉴스] 다시 만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정말 반가웠다.

팀명이자 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탈장소성을 의미하는 '다페르튜토(어디로나 흐르는)'이라는 이탈리아 단어와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스튜디오'의 합성어다. 그들은 연극의 내용과 형식을 고민하며 일관된 서사 구조가 아닌, 장면에서 장면으로 흐르는 에피소드식 서사와 다양한 오브제들을 파격적으로 사용하는 강렬한 무대를 선보여 왔다.

작년 두산아트랩 공연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에 이어 다시 만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공연은 여전히 연극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따른 본인들만의 대안을 내놓고 있는 극단이었다. 현재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양식으로 떠올랐던 신파가 왜 오늘날, 특히 한국에서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대상'으로 전락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본래의 기의를 상실한 신파극을 해체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태어나게 한 시공간적 배경에 위치했던 연극 형태들을 되돌아봄으로써 잃어버린 기의를 되찾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연극은 1914년 시리얼 퀸 멜로드라마의 대표영화 '폴린의 위기'의 내러티브를 차용해 서사의 줄기를 시작한다. 모험을 즐기는 상속녀 폴린은 해리에게 청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년동안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모험을 한 후에 결혼할 거야!"라며 모험을 떠난다. 무성 영화를 시작으로 장광설 대사극, 인형극 조루리, 노오 가면극, 그리고 가부키의 최초 근원지 '오쿠니 무용극'에까지 다다른다.

오늘날 우리에게 과잉된 감정주의를 표방한 저속한 상업극에 대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신파극'은 사실 당시 일본을 사로잡은 가부키에 대한 대항으로 출발됐다. 가부키를 구파로 상정하고, 그들이 새로이 들고 나온 연극의 내용은 '자유민권의식'이었다. 정치적인 의도로 시작된 신파극은 형식에 있어 스스로 구파로 지칭한 가부키에 의존을 하는 모순을 낳았다. 따라서 적극 연출가는 신파극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가부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마주해야 할 장광설 대사극, 인형극 조루리, 노오 가면극, 오쿠니 무용극은 역사적인 것들이었지만, 실제로 우리가 '아방가르드 신파극'을 통해 마주한 그것들은 매우 혁신적이고 급진적이며 심지어는 전위적인 것들이었다.

극의 드라마터그를 맡은 비평가 방혜진은 본 공연의 프로그램 북에서 "과격한 미래주의는 본디 근원을 반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며 "다페르튜토의 '아방가르드 신파극'이 기존의 연극 관례들을 허물어뜨리는 '급진적인 것'이라면, 이는 연극의 뿌리까지 더듬어 고찰하려는 '근본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역사 속에 존재했던 신파극의 근간을 돌아보는 것을 자신의 구심점으로 두어, 실험적 연극에 대한 도전을 거대한 원심력으로 자아내고 있는 집단이었다.

 

   
 

그들의 연극은 낯설다. 기존의 연극과는 매우 다른 생김새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와 배우가 중심이 된 기존의 연극과 달리,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연극은 서사와 배우를 파편화시킨다. 기존의 연극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거대한 덩어리로 존재하던 '서사'와 '배우'를 하나의 '파편'으로 만듦으로써 연극의 낡은 관습에 도전한다. 배우와 이야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곤 하는 '연극'을 새로운 지점으로 이끌어나가려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배우가 전개시키는 서사, 즉 '대사'의 무게감을 걷어낸다. 실제로 신파에서는 배우의 장황한 설명조의 대사가 서사를 전개시키고, 관객을 향한 계몽의 기능까지 담당했다. '아방가르드 신파극'은 배우들의 대사를 최소화시키고, 필요한 대사는 '자막'으로 대체한다. 자막은 완성된 글자의 나열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커다란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글자가 쓰이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와 중에 생긴 오타, 머뭇거림, 삭제와 수정의 순간은 음성 언어의 수용 과정과 같이 관객에게 도달된다. 또한 공연 도중 무선송수신기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짤막한 이야기들은 기존 배우들의 일관된 발성을 요하는 발화 관습 또한 파괴한다.

한편, 극의 도입을 담당했던 '폴린의 위기'와 도중 삽입되거나 혼합되는 단편의 이야기들('황금가지', '애도하는 사람', '아마데라스 설화' 등)은 서사 중심이었던 기존 연극에 물든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극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 줄기 대신, 당혹스러우리만큼 가차 없이 가지치기 당해버린 잔가지의 서사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연극이 가장 반가웠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변함없는 오브제 철학이었다. 오브제를 하나의 배우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이들의 연극에서 오브제는 정말 중요하다. 특히나 지난 해 두산아트랩 공연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에 이어 계속 등장하는 종이 박스다. 적극 연출가는 "종이 박스는 '연극'과 가장 비슷한 소재"라고 말한 바 있다. "분명한 형태가 있다가도 금방 무너지는, 즉 생과 사가 그대로 보이는 질료가 바로 종이 박스"기 때문이다. 언제고 변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사용하는 이의 의도에 따라 어떤 모양으로든 변할 수 있는 종이 박스는 그들의 연극성을 담아내고 있는 질료였다.

 

   
 

더구나 이들의 오브제는 본래의 질료를 가장 잘 드러내는 정도로만 활용되는 것이 참 인상적이다. 남산예술센터의 관객을 형상화한 듯한 가면을 씌운 투명 페트병들은 조명과 각도에 따라 다양한 형상을 낳는다. 가면은 인간의 표정을, 몸통이 된 페트병들은 자세를 그린다. 얇은 천에 포개어진 노오 가면의 영상은 천이 흩날릴 때마다 입체적으로(움직이는 천에 따라 부각되는 이목구비가 달라짐) 혹은 해체적으로(천이 갈라질 때마다 분해되는 가면) 가공된다.

감정적 요소를 짙게 내포한 서사 없이 감동을 받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관객들의 눈물을 수반하며 낡음의 대명사가 되어갔던 '신파극'과 역사성을 토대로 실험을 논하는 '아방가르드 신파극'. 그리고 '음악 같은 연극, 무용 같은 연극, 전시 같은 연극,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무엇보다 연극다운 연극이 맹렬하게 흐르는 현장을 준비'한다는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연극과 극단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 역설의 논리는, 본질을 고민하며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진보의 정도(正道)였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주요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