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아띠에터 칼럼그룹]

이름도 없는 괴물은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을 향해 끊임없이 물었다.
'나의 창조자여, 당신은 왜 나를 만들었는가,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어 이런 고통 속에 빠뜨렸는가, 당신은 왜 나를 만들고 이렇게 버려두었는가.'

그리고 노아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물었다.
'나의 창조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가 해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꼭 그 일을 해야만 합니까.'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교과목에서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청소년기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자아의 발견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발견하였는가? 당신은 명확하게 당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며, 당신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가?

누군가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아니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고, 앞으로 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으며, 가끔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기에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스스로 질문하기도 한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도 노아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자신을 창조한 사람과 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_ 신의 영역을 침범하다, 창조자도 창조물도 불행해지다.
프랑켄슈타인이 죽은 이들을 살려내고자 했던 것은 나쁜 의도가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죽음으로 인한 세상의 슬픔을 줄이고자 했을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침범하였다. 그가 인간의 능력을 온전하게 믿고, 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인간도 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침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는 잔인했다.

창조물은 괴물취급을 당하며 인간도 괴물도 아닌 중간 영역에서 외로움을 맛봐야 했다. 괴물은 매일 같이 고민했다. 나를 만든 사람, 창조자는 나를 왜 만들었을까?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고, 외롭게 둘 것이었으면 나를 왜 만들었을까? 결국, 괴물은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는 결국 알지 못한 채 창조자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홀로 남았다는 고통이 너무도 커서 그는 자신의 탄생의 이유를 더 이상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단지 창조자에 대한 복수심만이 그를 뒤덮어버린다.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되살리는 일에 성공한다. 그러나 신은 할 수 있으나 인간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영혼의 부활이다. 괴물의 모습은 옛 친구 앙리 뒤프레이지만 그 안의 영혼은 앙리가 아니다. 어른의 모습을 하였지만 그에게는 과거가 없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루하루가 만들어 낸다.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그 모든 것들이 하루하루 쌓여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괴물은 그런 하루하루가 없이 어른이 되어야 한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당연히 내가 알던 친구를 기대했던 프랑켄슈타인에게도 이 일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모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괴물은 이야기한다. 자신에게도 생명이 있지만, 자신에게도 감정은 있지만, 아무 기억이 없다고.. 아무 추억이 없다고…….

 

   
 

▶ 영화[노아] _ 신의 영역을 침범하다. 벌을 받다. 그러나 용서받다
괴물이 버려진 자였다면, 여기 선택받은 자가 있다. 바로 노아이다. 성경에 의하면 원죄를 지닌 인류는 에덴에서 추방당한 이후 그 원죄에 더해 더 많은 죄를 지었다. 노아가 아닌 인류는 타락했다. 신이 자신들을 천국에서 내쫓아 자신들의 삶이 힘들어졌다 믿는다. 그리고 그 분노에 인간들은 신을 원망하며, 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자신들이 신과 같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인간의 생명 역시 자신들이 관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사고 팔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생명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생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혈육을 죽이고 팔아넘긴다.

이렇듯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들에 대해서 신은 분노했고, 인간을 벌하기로 결정했다. 다행스럽게도 노아는 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간이었으며, 신은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을 살리기 위하여 노아를 선택하였다. 노아는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믿었으나 신의 계시처럼 타락할 자신의 모습을 환상 속에서 접한 노아는 깨닫는다. 자신도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의 씨앗(원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노아는 자신 역시 사라져야 함을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 역시 사라져야 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향해 여러 번 기도한다.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그러나 노아의 생각을 따를 수 없었던 노아의 아내는 자식들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고, 노아의 방주 안에서는 인류의 대를 이어갈 새로운 인간이 생겨난다. 이 상황에서 노아는 극단적인 결심을 한다. 손주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손주들을 죽이려고 한다. 노아는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 결심을 하면서 하늘을 향해 소리지른다. 그것만은 하지 못하겠다고, 이렇게 하지 마시라고.….그러나 그는 이 땅의 선을 위하여 신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성경으로만 따져도 인류는 계속해서 생존하고 있다. 즉, 노아가 그 손주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아가 이 땅의 선을 위해 손녀들에게 칼끝을 겨누었을 때 신은 아마도 인간을 용서한 것이 아닐까?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손녀들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이 세상의 선을 지키고 싶어하는 인간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 아닐까? 후에 노아는 손녀들을 죽이지 못한 이유가 손녀들에게 칼 대신 키스를 한 이유가 마음속에 온통 사랑뿐이었다고 말한다.

신은 인간을 벌하고자 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자비라는 감정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이 선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다. 그렇게 신은 인간을 용서한 것이다.

▶ 인간에게 내리는 최고의 벌_ 외로움
[프랑켄슈타인]에서의 절정은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에게 복수하려는 그 장면에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프랑켄슈타인의 총에 죽어가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에게 이야기한다.

'다친 다리로는 북극을 빠져나갈 수 없어. 이게 내 복수야. 나마저 없으면 넌 혼자 죽어가겠지. 이 세상에 혼자라는 그 느낌. 그 외로움. 이게 바로 내 복수야.' 프랑켄슈타인은 절망하고, 오열한다.

[노아]에서 역시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노아가 손주들을 죽이겠다고 결심하자, 노아의 아내가 노아에게 사정한다. 잘못은 자신이 했으니 자신을 벌하라고. 그러나 노아는 이것은 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때 아내는 노아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만약 당신이 그 일을 기어이 하겠다면, 나는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는 상황에 놓여 아주 외로워질 것이라고"

물론 노아는 꿈쩍도 하지 않지만, 아마 그도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생명을 가지고, 정체성을 고민하는 존재에게 얼마나 무서운 것이기에 이 두 작품에서는 외로움으로 사람들을 절망하게 하고 저주하는 것일까? 그러나 죽음보다도 외로움을 더 두려워하고, 가장 극렬하게 저주를 퍼부으며 나타나는 단어가 외로움이라면, 그 외로움이라는 것은……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 인간이라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_선과 악의 공존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괴물의 모습이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이 아닐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사실 앙리는 굉장히 선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우정이 깊은 사람이다. 아무리 몸이 바뀌어 태어났다 하더라도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복수를 꿈꿀 수 있을까? 괴물과 앙리가 같은 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맞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우리의 의식에서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리고 명확한 이유로 우리를 달래지 않으면, 우리 마음속에도 괴물이 지니고 있는 분노와 절망이 커질지도 모른다.

[노아] 역시 악이 끊임없이 살아남는다. 타락한 인간의 대표인 두발가인은 결국 방주에 올라탔고, 심지어 그는 그 노아에 탑승한 다른 짐승을 잡아먹거나 죽인다. 함(노아의 둘째아들)은 그런 두발가인에게 끌리고, 아버지를 해할 계획에 동참한다. 함은 처음부터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행동에 유난히 호기심을 보였고, 자신의 자손을 위하여 아내에 대한 생각을 유독 하는 등 인간이 지닌 본능적인 행동들에 관심이 지대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끝내는 살인을 저지른다. 물론 아버지를 지키기 위한 살인이었으나 함에게 살인은 매우 큰 의미로 다가온다. 셈(노아의 첫째아들)은 늘 아버지에게 순종할 것만 같은 캐릭터였으나 자신의 자손이 위험에 처하자 직접적으로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민다. 이.것.이.무.서.운.일.이.다.

선택받은 사람이라 믿었고, 또 그의 자손이기에 무조건 선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둘째 아들은 매우 인간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다. 선악과를 먹게 되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셈 역시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버지를 향해 칼을 겨눈다. 부모를 향해 칼을 겨누는 것은 신이 벌하려던 바로 그 인간의 모습이다. 인류를 구원하려고 만든 방주 안에서 다시 악의 기운이 스멀스멀 보인다. 그런데 이 역시 인간이라면, 혹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악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던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노아]는 그 영화에서 인간의 본성을 각 인물로 대비하고 있지만, 어찌 보면 [노아]라는 영화자체가 그냥 하나의 인물 같기도 하다. 한 인간 안에 담긴 탐욕, 오만, 선함, 인간 본연의 욕망, 용서받고 싶음. 그것을 여러 인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즉, 우리 모두의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이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악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 자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어떤 선택을 내리는가가 중요할 뿐…[프랑켄슈타인]의 작가도 [노아]의 감독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_ 정체성, 그리고 용서
신에게 벌을 받았건 용서를 받았건, 중요한 것은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영화 [노아]에서도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국, 같은 질문 아닐까? 나의 존재의 이유. 무엇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면 그 무엇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면, 나는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 그들은 끊임없이 궁금해 한다.

사실 우리도 그렇다. 매일 무언가를 하고, 또 그를 위해 먹고, 자고 하지만, 가끔 공허할 때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인지, 혹시 내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 맞는 척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면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인 것인지….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이루어가는 것 같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지나고 나면,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싶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지도 않고,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복수로 말미암아 모두 그 뒤를 도모할 수 없게 된다. 비극이다. 창조자도 창조물도 모두 이 이야기에서 끝이 난다. 그 뒷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신에게 용서를 받고, 가족끼리 용서를 한 [노아]는 그 뒷이야기가 있다. 신을 지키는 의무가 노아의 두 손녀에게 전해졌고, 그 두 손녀는 또 누군가와 가족을 이루어 자신들의 의무를 전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중의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미움과 분노보다는 용서와 화해가 희망을 낳고, 그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고민해보자. 그 정체성은 누군가에 대한 감사, 누군가에 대한 사랑, 누군가에 대한 분노, 누군가에 대한 미움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그 정체성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 덜어내자. 그러면 조금 더 희망적인 내일이 조금 더 희망적인 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가 이 세상의 희망에 일조하는 아주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모른다…. 

[글] 아띠에떠 해랑 artietor@mhns.co.kr

팝 칼럼 팀블로그 [제로]의 필자. 서울대에서 소비자정보유통을 연구하고 현재 '운동을 좋아하는 연기자 지망생의 여의도 입성기'를 새로이 쓰고 있다. 언제 또 다른 종목으로 여의도에 입성하게 될는지. 여전히 나의 미래가 궁금한 인간. 나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여자, 말 하는대로 이루어지는 여자'.
* 아띠에터는 문화뉴스 칼럼니스트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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