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변칙 판타지' 리뷰

   
 

[문화뉴스] 남성과 여성, 프로와 아마, 전통과 현대 간의 경계성들이 '발칙한 변칙' 안에서 새로운 환상곡(fantasy)을 창조해냈다.

이 연극의 작가이자 연출가를 맡은 정은영은 2013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 2015년 아시아퍼시픽 트리엔날레, 광저우 아시아 비엔날레 등에 초청된 바 있는 시각예술가다. 촉망 받는 시각예술가 정은영이 2008년부터 관심을 가진 것은 '여성국극'이다.

 

   
 

여성국극은 오직 여성 연기자들만 무대에 설 수 있는 한국 공연예술역사의 독특한 공연 장르다. 한국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등장한 여성국극은 폭발적인 인기와 씁쓸한 쇠락의 길을 겪으며 사양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다가 1990년대 초반부터 1, 2세대 배우들 몇몇의 노력으로 부활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국가문화기금의 축소와 배우들의 노쇠함으로 인한 쇠퇴가 또 다시 시작된 장르다.

이 쇠잔한 장르에 겁도 없이 도전한 여성국극의 마지막 남역 배우 남은진. 그와 함께 무대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아마추어 게이남성합창단 '지보이스'다. 극은 여성들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여성국극에서 남성 역할을 전문적으로 해온 배우 남은진의 이야기와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에는 부합할 수 없는 '지보이스'의 목소리가 적절히 범벅돼 있다.

 

   
 

무대에서는 남은진이 여성국극에 도전하며 겪었던 좌절과 희열이 낭독되거나 지보이스에 의해 어설픈 동작으로 재현됐다. 더불어 지보이스는 합창을 통해 자신들을 얽매는 편견과 통념이라는 굴레를 과감히 찢어낸다.

번갈아가며 무대에 등장하던 이들이 함께 무대에 설 때의 구도는 가장 흥미로웠다. 무대 중앙에서 남은진의 남성 연기가 시작되면, 지보이스는 양쪽 무대 계단에 앉아 다양한 반응을 쏟아낸다. 이들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들처럼 관객들의 생각을 대변해주기도 하고, 연출가의 목소리를 짐작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한다.

 

   
 

"이 불완전한 인생을 대체 누가 기억하려 하겠습니까?"

극장에 맴도는 남은진의 척박한 목소리. 그녀는 남성을 연기할 때 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사양의 길을 걷는 장르에 열렬한 이 배우는, 그 동안 철저한 외면 속에서 고독하고도 지루한 투쟁을 해온 것 같다. 생물학적 남성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남성성(masculinity)이라는 젠더 정체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보이스는 합창에서도 연극에서도 '아마추어'라는 모습으로 존재하며 기존의 관습적인 모든 것들, 곧 통념과 규범이라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들에게 균열을 일으키고자 한다. 남은진과 지보이스라는 존재는 연극 안에서 하나의 짙은 기호였다.

 

   
 

남성을 연기하는 여성과 남성성에 반(反)하는 남성. 이들에 의해 꾸려진 연극 무대는 연극의 관습과 전문성을 과감히 포기하며 이뤄졌다. 걸쭉한 창을 호기롭게 뱉어내지만 연극적 발성이나 딕션에는 거리가 먼 남은진, 하모니의 진정성은 있지만 불안한 음색을 쏟아냈던 지보이스. 이들은 프로들만이 설 수 있다는 '무대'라는 전통적 영역에서, 더구나 근대 한국 연극의 창작 산실로서의 정통성을 갖춘 남산예술센터라는 공간에서 '불완전하게' 존재함으로써 전통에 반하는 기호들이 됐다.

 

   
 

또한 여성국극과 시각예술, 그리고 합창이 '연극' 무대에서 뒤섞인다는 점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가장 종합적인, 혹은 가장 잡종의 예술이라 불리는 연극의 본질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점이기도 하다.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 '변칙 판타지'라는 환상적인 시공간은 내년 2월 요코하마 공연예술미팅에서도 펼쳐질 예정이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남산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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