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의 근대미술 거장 시리즈(변월룡, 이중섭, 유영국)의 마지막 전시로 '유영국, 절대와 자유' 전을 11월 4일부터 2017년 3월 1일까지 덕수궁관에서 개최한다.

유영국(1916-2002)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한국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형태로 빚어낸 최고의 조형 감각을 지닌 화가다. 지금까지 미술계 내에서는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로 대단한 존경과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영국의 면모를 조명하고 재발견하고자 기획했다. 전시에는 1937년 유학 시기부터 1999년 절필작에 이르기까지 유영국의 전생애 작품 100여 점과 자료 50여 점이 총망라됐다. 작가 생존 시 개인전(15회)과 사후의 전시를 통틀어 최대 규모의 것으로, 유영국의 진면모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전시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작가의 최절정기인 1960년대 작품 30여 점을 통해 유영국 작품의 최고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  

   
 

유영국은 1916년 경상북도 울진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1930년대 세계에서 가장 모던한 도시 중 하나였던 도쿄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이중섭의 선배로 문화학원(文化學院)에서 수학하고, 일본인의 재야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면서, 김환기와 함께 한국 역사상 최초로 추상화를 시도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의 포화 속에서 귀국,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어부로, 양조장 주인으로 생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5년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인 미술 활동을 재개,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 신상회 등 한국의 가장 전위적인 미술 단체를 이끌었다. 그러나 1964년 미술그룹 활동의 종언을 선언하며 첫 개인전을 개최한 후 2002년 타계할 때까지, 오로지 개인 작업실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일에만 몰두하며, 평생 400여 점의 아름다운 유화작품을 남겼다.

유영국의 작품에서는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요소가 주인이 되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긴장하며 대결하기도 하고, 모종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도 함으로써, 그 자체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고향 울진의 깊은 바다, 장엄한 산맥, 맑은 계곡, 붉은 태양 등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사실적인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담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추상화된 조형의 힘은 오히려 더욱더 직접 자연의 '정수(essence)'에 다가가는 체험으로 관객을 이끈다.

국립현대미술관 바르토메우 마리관장은 "유영국은 20세기 초중반 한국 혼란의 시기를 보내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한 작가"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변월룡, 이중섭에 이어 우리가 기억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한 명의 근대 작가, 유영국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유영국 작가의 아들 분도 나오셔서 작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셨다. 다음은 기자간담회에서 열린 소개와 Q&A 시간이다.

김인혜 학예 연구사 : 총 100여점, 아카이브 50여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영국 작가는 강원도 사람임을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자유롭기 위해서 미술을 공부한다고 했다. 아예 처음부터 추상을 시작했다. 자유미술관협회에 3학년부터 시작했다. 이야기가 없는 조형, 추상적 화면이 몬드리안과 비슷한데, 그의 인생에서도 그렇다. 이는 이중섭과 대척점에 있는 것과 같다.
'신사실파'는 1947년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 결성한 그룹으로, 한국 최초로 순수한 화가 동인이었다.
'모던아트협회'는 유영국, 이규상, 황염수, 한묵, 박고석이 아카데미즘에 반발해 1957년에 결성한 그룹으로, '순수한 현대회화 운동의 전위체로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 위함'을 내세웠다. '현대화가초대전'에서는 '아침', '새', '영' 등 자연적 요소가 아직 남아있지만 필요 없는 부분은 없애는 추상화를 구상했다.
'신상회'이후로는 미술운동부흥을 더는 진행하지 않고, 개인전에 주력하게 된다. 전시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화풍을 보여준다. 1964년 1회 개인전에는 어마어마한 작품력을 보여준다. 자연의 웅장함, 화려함을 보여준다.
60년대 작품이 최고로 좋은데, 거의 개인 소장이라 보기가 힘들다. 후반대 작품은 거래시장에 많이 나오지만, 60년대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다. 마크로스코 저리가라 하는 조형성과 색조의 변조가 '아름답다'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작품 제목의 거의 '산'인 경우가 많은데 이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매우 아프고 난 후에 예전의 엄밀성을 떨어지는 면도 있지만, 한층 더 편해지고 자연스레 자연을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분이 자유를 추구했다. 여유가 있었고, 그리고 작품에 잘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아들이 보시기에 작가분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했는가? 작업하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ㄴ아버지는 상당히 과묵하셨다. 작업에 관해 설명한 경우는 없었고, 아버지는 "네가 좋은 그림이 좋은 거다"라고 하셨다. 느낀 대로 느끼라고 말씀하셨다.
일본에서 8년 계시고, 해방 때 30살이었고, 전쟁 때문에 10년간 활동 못 하시고, 40살에 양조장을 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다 정리하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은 대단하다. "금산도 싫고 금밭도 싫고 나는 그림을 그려야 겠다"고 말했다.

'미술재단'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는가?
ㄴ10년간 여러 가지 활동을 하려고 있다. '저널'이라는 잡지를 8회차까지 만들었고, 전시 활동 위주로 하고 있고, 자료 보관도 하고 있다. 2,300점의 자료를 제공해서 유영국 작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해를 하는 데에 도움을 주셨다.

몬드리안과 관련은?그 시대에 현대적인 감각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배경은?
ㄴ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미스테리한 부분이었다. 어떤 것을 따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원동력이 있다. 팔 것도 아니면서 계속 전시를 즐겁게 했다는 것은 어떤 분명한 믿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ㄴ몬드리안을 매우 좋아했다. 몬드리안이 일본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유언은?
ㄴ오래 편찮으셨는데, 2002년에 돌아가시기 전에 7~8개월 병원에 계셨다. 유언은 "없다!"라고 말씀하시고 가만히 계셨다.

그때 당시에 카메라를 사용할 정도로 큰 부자였는가?
ㄴ원래 부유한 집안이었고, 신돌석 의병장에게 돈을 내주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학교에 돈을 내주기도했었다. 카메라를 좋아하고 사진을 잘 찍었다.

신작은?
ㄴ 50년대 몇몇 작품이 나왔고, 70년대 이후에 처음 나온 작품은 30점 정도이다. 지금까지 유영국 전시 중 가장 최대 규모이다.

문화뉴스 김민경 기자 avin@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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