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불역쾌재' 리뷰

   
 

[문화뉴스] 근 일주일간 글로 생각을 담아내는 일이 힘들었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로기 상태. 격노를 넘어서 나의 세계를 장악해버린 것은 극한 비관. 이제는 허무하기까지 하다. 연극 '불역쾌재'의 태보(윤상화)의 대사는 공감과 공허감이 버무려진 눈물을 불러낸다.

"전하는 지금 이 나라를 힘 있는 자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6일 LG아트센터에서 막을 내린 연극 '불역쾌재'는 근래의 대한민국이라는 최악의 시공간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로 관객들의 실망감과 무력함을 대신 발설해주고 있었다. '왜 백주대낮에 죽은 일곱 명의 젊은이들을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는지, '먹고 살기 좋아진 조선이지만, 왜 아직도 백성들은 먹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지, '붓이 더럽고 왜 붓까지도 더러'워야 하는지, 그리고 '이 나라가 왜 힘 있는 자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는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어디서든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무엇이 인(仁)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된 이곳, 허무한 시공간에서 나의 모든 불행, 사회의 모든 비극, 국가의 모든 무능은 타개의 길을 잃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은 시종일관 경쾌하다. 이렇게 리드미컬한 절망은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이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장우재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사는 게 힘들다"고. "그렇다고 분노로만 일관할 수는 없다"고.

 

   
 

연극 '불역쾌재'는 상상 속 조선시대에서 위기에 처한 두 노인 경숙(이호재)과 기지(오영수)의 여정을 다룬다. 왕(이명행)의 스승이자 나라를 이끄는 핵심 관료인 두 대감은 절친한 벗인 태보가 일으킨 정치적 피란에 휘말려 파직을 당한다. 왕은 갈라진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경숙과 기지 중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처단해야 한다는 기준호(유성주)의 간언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왕은 두 대감에게 각각 상대방의 논리의 허점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린다.

두 대감은 왕의 명을 이행한다는 각각의 목적을 서로에게 감추고 '내기'라는 표면적 이유를 설정해 여행을 떠난다. 금강산 외팔담 아래 구룡폭포 뒤에 동굴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내기한 두 대감은 속으로 각각 자신의 죽음 혹은 절친의 죽음을 사이에 두고 고민을 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 두 대감과 그를 따르던 호위 무사 회옹(최광일)은 여행을 끝내고 왕에게 돌아와 서로 죽겠다 나선다. 이후 극의 결말에서 세 명은 태보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먼저 죽은 태보를 포함해 네 사람의 죽음은 참 경쾌했다. 모순적이었다. 죽음은 가뿐했고, 삶을 위한 모든 기제들은 비장하고 비극적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죽음은 흥겨운 음악과 춤사위를 동반했다. 그러나 강에 빠진 젊은이들의 죽음을 방관해야 하는 선왕의 결단은 선왕을 곤궁하게 보이게 했고, 태보와 기지, 경숙, 회옹을 죽여야 하는 왕의 명령은 고단했다.

 

   
 

우스꽝스럽게 죽은 태보, 그러나 살아남았기에 비장해진 삶과 여정을 견뎌야 하는 기지와 경숙이었다. 기지는 "멋지게 죽은 인물이야 숱하게 많았을 것"이라며 "어디 이 나라에 멋지게 죽은 사람이 없어서 이 지경이 됐소?"라 묻는다. 그렇게 그들 또한 태보처럼 '우스꽝스러운 죽음'을 택한다. 그 죽음만이 그들의 가장 진실된 삶이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의 마음도 비로소 명확해진다. 글이 생각을 담아낼 수 없어 비참했던 며칠. 곱씹어낸 연극은 그 해답을 알려주는 듯했다.

극중 경숙은 작가를 대신해 연극 전반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어차피 사는 게 다 연극이다. 그걸 희극으로 살지 비극으로 살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그런데 젊음이 늙음을 잡아먹는 것은 비극이 아냐. 자연스러운 거지"라 말하는 경숙. 우리는 그에게서 삶과 죽음, 일상과 사건, 그리고 연극과 현실에서 비극과 희극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임을 배운다.

 

   
 

'어떻게'는 늘 우리의 몫이었다. 우리가 언제나 '무엇을'까지 정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일어나버린 그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우리의 마음에 달린 것이었다. 욕되고 고된 열흘의 시간 동안 모든 의지를 잃어 표류하고 있을 많은 방랑자들에게 전한다. 쓸쓸한 공허감 대신 분명한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주체적인 사유로 우리의 시공간을 정의내려보자고 말이다. 이미 일어나버린 그 무엇을 우리가 바꿔버릴 수는 없으니, 앞으로 일어날 혹은 일어나게 해선 안 될 그 무엇을 위해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을지 밝혀내자고 말이다. 우리의 인생을 '희극으로 살지 비극으로 살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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