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자살의 노래…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글루미 선데이'의 의미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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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1월 다시 찾아온 영화 '글루미 선데이'. 분노가 넘치는 이 시국에 우울한 영화라니. 고개를 저을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적 분노에 상처받은 이들을 달래줄 수 있는 게 영화의 또 다른 역할이 아닐까…. 라는 말을 하려니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데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다행히 '글루미 선데이'는 지금 이 시기에 던져볼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더불어 짧은 가을이 아쉬운 이들에게, 이 영화는 가을의 무드를 진하게 느끼게 해줄 영화가 될 것이다. 결실이 없는 국가의 일원에게, 결실의 계절인 가을의 분위기가 사치일 수도 있지만, 유난히 짧고 뜨거웠던 가을을 조금이나마 느껴 보고픈 이들에게도 '글루미 선데이'를 추천한다.
 
   
 
 
헝가리 자살의 노래
'글루미 선데이'의 모티브가 된 곡 'Gloomy Sunday'는 제목처럼 우울한 곡이었고, 그 우울함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헝가리에서는 이 곡을 듣고 자살을 한 사람이 여럿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헝가리의 자살 노래'라는 어마무시한 수식어를 획득한 이 곡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자살한 사람이 사망 직전에 Gloomy Sunday의 악보를 쥐고 있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곡', '사람을 죽이는 금지곡' 등의 괴담이 있었단다.
 
이후 이 노래에 관한 조사가 있었고, 앞의 전설들을 과장된 신화로 정리하기도 했다. 'Gloomy Sunday'에 관한 전설 중 '이 곡의 작사가인 야보르의 여자친구가 자살했었다.', '작곡가인 세레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BBC 등의 방송국이 이 노래의 방송을 거부했었다.', 'Gloomy Sunday의 원곡은 지금 구할 수 없다.' 등은 확인된 사실이다. 하지만, 야보르 여자친구의 자살이 이 곡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세레즈의 죽음도 노래의 발표 후 30년 후였다는 점에서 이 곡과의 연관성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또한, 1930년 높았던 헝가리의 자살률이 이 곡의 신화화에 영향을 줬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이 전설이 과장되었다는 의견을 들었다 하더라도, '글루미 선데이'에서 그 곡을 들으면, 여기엔 뭔가 깊은 사연이, 혹은 슬픈 전설이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Gloomy Sunday'의 전설이 굳이 어떤 플라시보 효과를 낼 필요도 없다. 부다페스트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이 음악이 울려 퍼질 때, 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이 노래만의 괴괴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계속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 곡이 다시 한 번 연주되기를, OST가 다시 한 번 깔리기를.
 
극 중 이 곡에 관해 '달콤하면서도 씁쓸하다'는 표현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무척 정확한 묘사이며, 이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를 모두 담을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느낌이 '글루미 선데이'의 모든 것이며,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로 관통하고 있는 영화이기에, 15년이 지나고서도 재개봉할 수 있는 명작일 것이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연애는 각 남자에게 달콤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리고 최고의 곡을 발표한 피아니스트는, 곡의 아름다움이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소문에 행복과 자책감을 동시에 느껴야 한다. 더불어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공존하는 헝가리는 독일이라는 폭력 앞에 반쪽이 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끝으로 이 영화는 달콤씁쓸한 복수로 완결되는 서사다. "당신을 잃을 바에 반쪽이라도 갖겠어." 반만 달콤할 수 있는 인물들의 숙명은 이 영화의 명대사로도 남았다.
 
   
 
 
글루미 선데이의 의미
영화 속 주인공들은 'Gloomy Sunday'라는 곡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안드라스(스테파노 디오니시)는 이 곡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며, 끝없이 몰두했다. 그리고 이 노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또 한 사람, 자보(조아킴 크롤)도 이를 고민하고, 결국엔 자신의 답을 찾아낸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모두 말할 수 없지만, 이 곡은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남자들의 감정이 담긴 곡이며, 이 곡이 만들어지던 1930년대 헝가리의 국가적,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그 시대가 공유했던 어떤 정서를 불러온다. 영화를 통해서 확인하고 공감해 보기를.
 
그렇다면, 'Gloomy Sunday'는 지금, 한국의 관객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안드라스와 자보가 찾았던 곡의 의미가 우리에게도 통할 수 있을까. 다양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1930년대와 1999년의 헝가리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날카로운 가시 하나가 보였다. '글루미 선데이'를 관람하고 나면, '잊힌 역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이는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자, 미래가 기억할 지금이란 시간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글루미 선데이'엔 무덤도 없이 죽어간 자, 과거의 가해자가 미래의 영웅이 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영화가 다룬 미래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흘러버린 시간과 역사는 개인의 상처를 잊었다. 이는 'Gloomy Sunday'라는 곡에 얽힌 전설보다도 더 끔찍한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글루미 선데이'는 개인의 기억을 통해 이 역사를 재소환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사적 심판을 허용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진행 중인 일은, 바로 오늘이 '가해자들이 덮고, 잊으려 한 시간과 역사'를 다시 소환하고, 냉철히 바라봐야할 시기라고 말한다. 더 묻히기 전에, 다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훗날 개인이 사적 복수를 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제대로 바라보고, 바로잡으라 말한다. 다가올 우리의 일요일이 따뜻하기를 바라며, '우울한 일요일'을 보고, 또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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