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파란나라' 리뷰

   
 

[문화뉴스] 과연 파시즘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그저 극악하고 파괴적이며 잔인한 것이기만 할 뿐일까? 우리는 파시즘이 왜 나쁜지에 대해서 제대로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파시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시즘은 언제고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세계적으로 우경화라는 흐름이 보편적 경향이 되어가는 이 시점, 우리는 그것을 가까이에 두며 다시 살펴보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연극 '파란나라'에는 파시즘의 구성원리, 작동기제 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충격적이었다. 이 연극을 마냥 극 속 파란나라 지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로 여긴 사람이 있다면 다시 관극하길 추천한다. 파시스트들의 이유는 합당했다. 일반 학생들이 파란혁명에 열광하기까지 파란나라 지지자들은 저마다의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남성들에 의해 성적으로 유린당하던 보경, 힘센 동급생에 의해 무시당하던 주영, 껌셔틀 당하던 창현, 가난한 집안이 원망스러워 사회에 반항하며 살던 재성, 대학입시에 목매는 진태, 나보다 나아보이는 친구를 맹목적으로 따르던 수빈, 전학생으로서 학교 적응 위해 휩쓸리던 승안 등등.

외롭지 않은 사람 없으며,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에게 최고 고통을 주는 공포적 대상물을 설정하고 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허우적대는 학생들에게 슬그머니, 혹은 장난식으로 시작된 파란나라라는 게임은, '평등'과 '소속감'이라는 정신적 혹은 물리적 작용으로 하여금 저마다의 고통을 마취시켜주었다.

 

   
 

평등은 공동체 의식을, 공동체 의식은 몰개성을, 몰개성은 자유의 구속을 불러일으켰다. 이 혁명은 전혀 과격하거나 강제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매끄럽고 자연스럽고 자율적으로 이뤄졌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평등의 상태를 조성했고,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했고, 자신의 재능을 공동체에 이바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파란나라 게임이 시작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과정이 구성원의 '자발'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극의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았다. 무대는 실제 CA를 진행하는 교실의 모습을 띠고 있다. 반원 모양으로 책상 배치가 된 교실에서 학생들은 뱉고 싶은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학생들이 파란나라에 깊게 충성하게 되어 가자 책상 배열은 일방적 의사소통 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아이들의 책상은 몇 열로 나뉘어 교사(이종민)를 바라보는 구조를 취했다. 서로 이야기를 말하고 듣기 보다는, 교사의 말에만 집중하는 구조다. 학생들은 이제 교사가 발언권을 줘야만 얘기할 수 있고, 매번 "이종민 대장님!"이라는 호칭을 반복해 외쳐야 했다.

 

   
 

게다가 막과 막 사이에는 조명으로 '태극기'가 매번 비춰졌다. 어느 교실에나 있는 태극기지만, 학생들이 점점 파란나라에 물들어가면서 함께 파란 조명으로 물들어가는 태극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 교실의 모습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적이 있던, 일어나고 있는, 혹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객석에는 관객들만 앉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막과 막 사이에 관객들의 박수가 유난히도 뜨거웠던 이 '호응 좋은' 연극은, 사실 객석에 파란나라 지지자들을 심어놓고 있었다. 남산예술센터 관계자는 "극 중간 중간에 투입된 39명의 파란군단은 실제 학생들이다"라며 "연극 '파란나라'는 극단 신세계 단원들이 실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연극 교사로 투입되거나, 여러 교사 및 학생들과의 구체적인 워크숍의 과정을 거쳐 제작됐다. 파란군단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나게 된 실제 학생들이다"라고 밝혔다.

 

   
 

60여 명의 파란군단은 남산예술센터 무대를 장악했고, 동시에 발을 구르며 열렬히 '파란나라'를 외쳤다. 수적으로는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이 훨씬 우세했지만, 파란군단의 광적인 열기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떠오르는 그들의 '파란나라'. 공연 내내 극장에 울려 퍼졌던 '파란나라' 노래. 과연 이들의 파란나라란 무엇인가?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파란 나라를 보았니 맑은 강물이 흐르는
파란 나라를 보았니 울타리가 없는 나라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난 안델센도 알고요
저 무지개 너머 파란 나라 있나요
저 파란 하늘 끝에 거기 있나요
동화책 속에 있고 텔레비젼에 있고
아빠의 꿈에 엄마의 눈 속에 언제나 있는 나라
아무리 봐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누구나 한 번 가 보고 싶어서 생각만 하는 나라

우리가 한번 해 봐요 온 세상 모두 손잡고
새파란 마음 한 마음 새파란 나라 지어요."

-최문정의 <파란나라> 1절 가사 중

 

   
 

파란나라는 구체적인 모습도, 수렴되는 지향성도 드러내질 않는다. 다만 이곳은 파란군단이 자신들의 현실과 그에 파생되는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유토피아적 공간이라는 것만 명백할 뿐이었다. 파란나라에 대한 그 어떤 힌트도 극 속에서는 주어지지 않았다. 마냥 행복하기만 한 이 나라는 허상이다. 파란나라는 파란군단을 응집시키기 위한 모호한 표상이었고, 파란군단 개개에게는 현실적 고통을 잊게 해주는 피안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신적으로 받들던 교사가 이 게임을 그만하자고 선언할지라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이게 끝나면 이제 우린 어떡하죠?"라 말하는 그네들에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사를 죽이면서까지,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뽑으면서까지라도 파란혁명을 지속해야 한다,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 파란나라는 이들이 찾은 현실의 '대안'이다.

파시즘은 우리 세계와 멀리 동떨어져 있지 않고, 어쩌면 우리와 헤어진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파시즘이 가져온 끔찍한 결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파시즘이 인간 개개의 자유와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적인 체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파시즘을 부정하기만 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곁을 휘감고 있는 은밀한 파시즘적 요소들을 발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남산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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