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빨간시'에서 강애심 배우가 '할미'를 맡았다.

[문화뉴스]

 
"하루는 '복순'이하고 산에 가서 나물 캐고 있는데, 일본 군인하고 어떤 남자가 난데없이 나타나가꼬는 우리보고 가자케예. 돈 마이 버는 공장에 너준다꼬. 공부하게 해준다꼬. 집에 가야 된다꼬 울고불고 해도 막무가이로 트럭에 태우데예. 그 힘을 우예 당합니꺼." - 연극 '빨간시' 中 '할미'의 대사
 
2014년 대한민국 연극대상에서 희곡상, 작품상, 여자연기상(강애심)을 받으며 화제가 된 연극 '빨간시'가 다시 관객들을 찾는다. 16일까지 나루아트센터 소공연장, 21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열리는 연극 '빨간시'는 유력 일간지 기자인 '동주'가 성상납으로 자살한 여배우 사건 이후 괴로워하다 저승사자의 실수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할머니 대신 저승에 가게 되면서, 여배우와 할머니의 삶을 보며 아픔의 기억이 자신과 절대 무관하지 않음을 느낀다는 내용을 담았다. 2011년 초연됐고, 2013년, 2014년 재연되어 올해로 네 번째 공연의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9년간 일본군 '위안부' 수요시위에 참석한 이해성 작가의 절실함과 진정성이 쌓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해성 작·연출은 "우리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짊어진 그분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사라지기 전에, 그들을 기억하고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해 '빨간시'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6일 오후 나루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연극 '빨간시'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전막 시연 후 질의응답에 참석한 이해성 작·연출에게 네 번째 재공연을 하게 된 계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장면을 추가한 이유, 작품을 쓴 의도 등을 들어봤다. 질의 중엔 본 작품의 결말 스포일러가 들어 있다.
 
   
▲ 이해성 작·연출이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네 번째 재공연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ㄴ 2014년 세 번째 공연 당시 다 끝날 줄 알았다.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약칭)도 20년 넘게 열심히 활동하셨고, 이 문제를 UN에서도 다루는 등 일본의 압박을 많이 가했다. '빨간시'를 다시 하기엔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생명이 끝이 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엉터리로 이뤄졌다. 할머님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고, 진정한 사과도 없고, 10억 엔에 우리 역사를 팔아먹은 졸속 합의였다. 국제적으로 해결된 거 아니냐는 시각으로 쳐다보지만, 할머님은 전혀 치유하지 못했다. 국가 자체가 엉망진창인데, 그 일 중 대표적 사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그래서 꼭 올해 안에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하게 됐다.
 
마지막 장면에선 할머니가 가발을 쓰고 노래를 한다.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ㄴ 내가 생각할 때, 할머님 사건과 故 장자연 사건 똑같다고 본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 중 하나가 타인, 어린 친구들의 꿈을 짓밟는 행위라고 본다. 할머님이 가진 꿈이 어떤 꿈인지 모르지만, 13살 아름다운 꿈을 꿀 나이에 잡혀가 몹쓸 짓을 당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지 못하고 사시게 됐다.
 
故 장자연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인은 어떻게 같이 붙이냐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이 가진 꿈은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국가적 권력에 의해 짓밟힌 사례라 같은 사안이라 본다. 여전히 그런 폭력이 존재한다. 그런 시각 자체가 마초적이라고 생각한다. 예뻐 보이고, 스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날라리라고 하는데,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 같다. 할머니가 빨간 가발을 쓰고, 립스틱을 바르고 '카츄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할머니가 꿈을 펼쳐 보이는 마무리였다. 
 
   
▲ 강애심 배우가 마지막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저승 장면에서 탈을 쓰는 것은 어떤 해석인가?
ㄴ 큰 의미를 뒀기보다는, 저승 자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여서, 탈을 통해 보여주기도 했다. 요정 같은 역할인데, 인물로 보여주기도 한다. 탈 자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의 경계나 벽이라고 생각한다. 벽을 쳐다보고, 빨간색을 생각할 수도, 노란색을 생각할 수도 있다. 가면과 탈 자체가 관통하는 게이트 역할을 한다. 그래서 탈의 양면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미장센을 구성했다.
 
강애심 배우가 등장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회상 장면은 어떻게 구성됐나?
ㄴ 거기 나오는 장면은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만 빼고 팩트다. 정대협을 가보면 할머니의 구술 자료가 한 100분가량 나와 있다. 그걸 꼼꼼히 다 읽어봤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인데, 할머니들의 사례 중 정말 가슴이 아픈 것을 모아 쭉 한 사람의 인생으로 엮었다. 거기에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덧붙였다. 정말 그게 일본군이 저지른 것이냐, 소설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는데 있는 그대로다. 나뿐 아니라, 배우들이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면 앓게 되고 힘들어진다. 초연 연습할 때, 배우들이 거의 우셨다. 할머니 역할 하신 배우는 연습할 때도 펑펑 울고, 두 달 가까이 연습하셨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풍자가 고스란히 작품에 등장한다. 넣게 된 이유는?
ㄴ 이번이 네 번째 '빨간시'인데,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해서 수정작업을 했다. 최순실 사건은 뒤에 간단하게 언급된다. 그 장면 자체는 우리나라 해방 이후, 현대사를 훑는 부분이다. 그걸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여주니, 별로 안 좋은 대통령의 사례가 쭉쭉 들어갔다.
 
'옳다', '그르다'라기 보다, 있는 그대로를 글 쓰는 일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할 수 있는 힘이 안 되어 있다. 그걸 했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고, 지원도 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글을 쓰고 예술을 하는 사람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도 요즘 기자들도 엉망진창인 경우가 많아서, "기자들이 소명의식도 없나"하는 대사도 등장한다. 글을 쓰는 사람의 명확한 소명, 있는 그대로를 쓰고 말할 수 있는 의무가 필요하다고 본다.
 
   
▲ '동주'(왼쪽, 홍철희), '수연'(오른쪽, 양이배)이 한 장면을 선보이고 있다.
 
'동주'의 대사 중에 "나는 잘못이 없어. 침묵도 두렵고, 말하는 것도 두렵다"라는 대사가 있다. '동주'는 우리 모두를 말하는 것인가?
ㄴ 작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2006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수요집회 처음 나갈 때, 그것을 연극으로 꼭 올리고 싶었고 작품을 썼다. 작품을 쓰다 보니, 이 문제의 근원적인 문제가 뭔지 파악하고 고민한다.
 
스스로 가진 폭력성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나 약자에게 고통을 준 사례가 없었나. '어마무시'하게 많았다. 결국, 개개인의 욕망이었다. 내 속의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부당한 상처를 받고도, 침묵한다. "나는 죄가 없다"고 회피하고 있다고 본다. 그게 내 모습이라 생각했다. 누구를 비판하고, 가르친다는 생각보다 스스로 반성하는 내 의무로 글을 쓰게 됐다. 관객도 나와 같은 입장이라고 봤다. 동일화된 것 같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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