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띠에터 강해인의 2016년 영화 결산 ② 악의 보편화, 그리고 영화라는 면죄부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악의 보편화, 그리고 영화라는 면죄부
반재벌 영화의 균열 - 제2의 '도가니'는 어디에?
그런데 재벌 악인 캐릭터가 연달아 재생산되면서 어딘가 이상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현실의 재벌과 영화의 재벌이 완전히 다른 대상으로 분리되는 것 같다.
 
천만이 넘는 관객이 '베테랑'에 열광했지만, 현실의 기업 부조리, 문제들에 쓴소리하는 사람의 수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영화의 관람 전후로 관객의 행동엔 변화가 없다. 당연히 현실도 영화 상영 이전과 이후 큰 변화가 있기 힘들었다.
 
   
▲ 2011년 개봉한 공유, 정유미 주연의 '도가니'
 
영화가 단순히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으나, 영화가 다루는 소재와 주제에 따라 영화의 역할은 확장되기도 한다. '도가니'는 영화관 밖으로 문제를 끌어내어 '도가니법'으로 이어진 전례가 있었고, 삼성 반도체 공장의 문제를 재점화했던 '또 하나의 약속'도 있었다.
 
이에 비해, 근래 영화를 통해 재벌의 악행을 목격한 관객이 현실 속 그들의 비리와 갑과 을 문제엔 너무도 무관심해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가 정확한 타깃을 설정했던 것과 달리, 근래의 반재벌 영화가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관객은 재벌의 악행을 알고 분노했지만,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잊는 듯하다. 영화관은 그렇게 분노의 배출구의 역할만 하는 데 그치고 있다.
 
세 가지 예측
이는 세 가지 심리의 작동으로 '예측'된다. 하나는 관객이 영화 속 재벌을 정형화된 악으로, 상징화된 악으로만 생각해, 영화의 재벌과 현실의 재벌이 연결고리를 잃었다는 점이다. 재벌 악인이 계속 재생산되면서, 관객은 그 캐릭터를 보며 '땅콩 회항' 등의 현실을 환기하지 못하고, 그저 영화에 있어야 할 나쁜 악인 정도로만 대상화해버리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이러한 캐릭터를 현실에는 없는, 이야기의 인물로만 받아들인다.
 
다음으로, 관객이 이러한 재벌의 악행에 면역되었거나 기업의 비리·타락이 너무도 보편적인 일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제 '땅콩 회항' 같은 일은 대중에게 '별일 아닌 것처럼' 일반적인 일이 되었고, 큰 충격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올해 삼성 이건희 회장의 동영상 문제는 잠깐의 충격을 주었지만,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그렇게 금방 옛일이 되어 버린다. 물론, 그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 청와대에서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대중이 이 정도 재벌의 타락에 큰 동요를 하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해졌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 지난 6월 개봉한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에서 김영애는 거대 기업의 실세 '사모님'을 연기했다.
 
끝으로 마지막 '예측'은 특이한 가정이며, 영화적으로 생각해볼 지점이 있는 가정이기도 하다. 가정을 세우기 전에 관객이 반재벌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의 의미에 다르게 접근해 봐야 했다. 이 카타르시스는 이야기가 주는 순간의 즐거움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생각은 어떨까. 관객이 분노의 표출과 해소를 통해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어떤 면죄부를 얻고 있다면?
 
관객은 영화를 봄으로써 재벌을 향한 비판에 강하게 참여했다고 믿고, 자부할 수도 있다. 더불어 관객은 관람이라는 행위로 돈을 내기까지 한다. 이런 행위를 적극적 의사의 표현으로 믿는다면, 관객은 타락한 재벌에 저항했다는 위로와 면죄부를 영화관에서 얻고 갈 수도 있다. 시청자가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회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는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기엔 미약하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독점으로 문제가 되는, 거대 극장과 배급사라는 또 다른 재벌의 배를 불리는데, 관람비가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촛불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얻은 해
정말 많은 영화에서 '현실에서 있을 법한' 재벌의 문제를 목격하지만, 이것이 영화관 밖인 현실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한 편으로는 무서운 일이다. 재벌이 흥행을 위해 재벌 자신을 다루는 영화를 아무 거리낌 없이 만들 수 있다는 '가정'까지 하면(다시 말하지만, 가정이다), 이는 더 큰 공포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들의 지갑을 위해, 자신들의 어두운 가면마저도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반재벌 영화는 현재 '유희' 혹은 '자기 위로' 단계에 머물러 있다.
 
   
▲ 8일 개봉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한편,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의 역할이 단순한 유희에 한정되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다. 영화는 유희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고, 또 받을 수 있는 놀라운 매체다. 올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어땠는가. 사회 시스템이 성실한 소시민에게 어떤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를 묵묵히 보여주는 이 영화는, 감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파괴적이었다. 이렇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화가 무엇을 말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우리도 물어야 한다. '우리는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래도 올 연말엔 가능성을 본 '뜨거운' 순간이 있어 위안을 받기도 한다. 2016년 병신년은 국가적 수치로 기록될 해이지만, 수없이 많은 촛불이 현실을 끓게 한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다. 올 연말은, 대중이 현실에 참여해 변화를 끌어낸 소중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는 우리 시민사회의 대중도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주체임을 보여준 위대한 장면이었다. 한 사람의 영화 관객으로서 이 불꽃에 들뜨게 된다. 다가올 영화가 현실을 변화시키는 행동을 끌어낼 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힘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승리할 수 있음을 촛불은 증명했다. 앞으로 더 많은 행동이 일어날 계기를 만들어준 시발점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움직임에 '영화'가 큰 역할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다. 덕분에 더 흥미로운 생각을 한다. '베테랑'의 천만 관객이 천만 개의 촛불이 되어, 현실의 재벌 문제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순간을 상상해본다.

주요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