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젊은 농어업인들의 희망보고서 15편, 위너팜 '안태우' 대표
  • 오지현 기자
  • 승인 2019.11.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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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우' 대표, "2만 두 키우면서, 150억 원대 매출 올리면 사업가라 안 카겠습니까?"
출처 한국농수산대학, 위너팜 '안태우' 대표

[문화뉴스 MHN 오지현 기자] 처음에는 그저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을 생각으로 한국농수산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3년 간의 대학 생활과 5년 간의 인턴 생활로 그 누구보다 단단한 양돈 기업 경영인이 되었다. ‘무슨 일이든 쉽게, 일은 적게 하는 것’이 신조. 그러면서도 1,000억대 매출을 목표로 웅지를 펼치고 있는 안태우 대표를 만나 보자.

여러 양돈 사업체를 일궈 낸 사업가 아버지

안태우 대표의 아버지는 양돈 업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40여 년 전 돼지 몇 마리를 키우는 것에서 시작해 양돈 농장과 함께 종돈 정액 제조 시설은 물론 사료배합 공장, 퇴비 공장까지 여러 양돈 사업체를 일궈 냈다. “아버지가 돼지 키우는 일을 크게 하시는 건 알았지만 저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공대를 가려고 했죠. 고3 때 아버지가 한국농수산대학 진학을 권유하셨는데, 싫다고 거부하다가 군대 면제에 혹해서 면접을 보기로 했어요. (웃음) 이미 다른 대학을 네 군데나 합격한 상황이 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니 공대 나와서 일반 직장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된다고 한들 사업체를 물려받는 것보다 딱히 좋을 게 없겠더라고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쿨내’ 진동하는 대답이었다. 처음에 안 대표는 학교를 어영부영 졸업한 뒤에 아버지의 사업체나 물려받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 진학하니 우선 동기들의 눈동자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꼴통들끼리 의기투합, “그게 에너지가 되었죠.”

절실한 사람들이 12 대 1에 달하는 경쟁률을 뚫고 모인 자리였다. 너도나도 1차산업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으로 진지했다. 안 대표 또한 마음을 고쳐먹고 학업에 열심히 임하게 됐다. 그럼에도 당장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죽이 맞는 동기들과 열심히 놀다가 기숙사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

“그때 놀던 에너지가 힘이 되어 지금은 다들 한우 천 두, 돼지 만 두를 키우는 건실한 농장주들이 된 것 같아요.” 안 대표는 2학년 때 나간 국내 양돈 기업 현장실습도 특별했다고 회고했다.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안 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강도의 육체노동뿐이었다. 안하던 일을 하다 보니 허리에 탈이 나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냉정했다. “작은 걸 못 이겨 내면 내 사업을 물려받을 수 없다. 네가 책임자라 생각하고 대차게 이겨 내라”는 주문이 돌아왔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안 대표는 이를 악물고 14개월을 버텼다.

물렁물렁한 마음으로 대학에 진학했던 자신이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안 대표는 졸업 후 아버지가 운영하는 희복 농장에서 농장 일을 처음부터 배워 나갔다. 현장에서 어느 정도 잔뼈가 굵어지자 아버지는 안 대표에게 농장 운영을 맡겼다. 일이 점점 손에 익어 갈수록 아버지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농장을 운영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러려면 농장 일을 다 알고 있어야 하니까 휴일도 없이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죽도록 농장 일에 매달렸다. 안 대표가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보낸 것이 5년.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연습 삼아 새로운 집(농장)을 지어 보라”는 분부가 내려왔 다. 일종의 하산 명령. 아버지는 처음부터 안 대표에게 다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일을 진행할수록 안 대표는 무거운 책임감에 몸이 절로 떨렸다.

 

출처 한국농수산대학, 위너팜

난관 또 난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농장 설립은 총사업비가 무려 150억 원에 달하는 큰 사업이었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매입해 둔 부지가 있었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 다시 마련한 땅은 행정소송 문제로 5년 반이 지나서야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아버지는 허가 문제를 해결한 다음 모든 것을 안 대표에게 맡겼다. 허가만 나면 모든 것이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도 꿈에 불과했다. 축분 냄새를 비롯해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기존의 축산 농가만 떠올리는 주민들의 반대가 거셌다.

주민들을 겨우 설득한 다음 공사를 진행하던 차에 이번에는 자금 쪽에서 사고가 터졌다. 총사업비의 약 70%에 해당하는 100억 원대의 자금을 농림 축산식품부 정책자금 지원사업을 통해 2년에 걸쳐 융자받기로 했는데 담당자가 바뀌면서 50억 원대에 달하는 2년 차 사업비가 전액 삭감된 것이었다. 방법을 찾기 위해 온갖 곳을 쫓아다녔다. 너무 다급했기에 우선 고금리의 캐피탈 자금으로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1년에 이자만 3억 원 넘게 나가는 살인적인 자금이었다. 이를 저금 리 금융권 자금으로 바꾸려면 회계연도가 넘어가기 전에 공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물 마실 틈도 없이 밤새워가며 겨우 공사 기간을 맞췄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해가며 만든 위너팜 (Winner Farm).

‘승자의 농장’이란 이름대로 지금은 매달 안정적으로 5억 5,000만 원가량의 매출이 발생한다. 연간 70억 원에 이르는 매출이다. 아버지는 몇 년 이내에 자신은 은퇴할 테니 18만 평 대지 위에 집(농장) 지을 400억 원을 준비하라고 마지막 주문을 했다. “위너팜에서 신용을 쌓으면 다음 집 지을 때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아요. 이 집을 지으면서 뭐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죠.” 안 대표는 모든 축사와 건물을 ‘집’이라 표현한다. 돼지가 살든 업무를 보든, 그가 갖는 애착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일은 쉽게 조금만’ 무기가 된 겸손함

안 대표는 이제 30대 초반이다. 아무리 아버지가 물려준 기반이 있었다지만 이 정도 규모의 일을 그 나이에 차질없이 수행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비결을 묻자 “운이 좋았다”는 겸손한 대답부터 나왔다. “저는 아버지 덕에 시장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죠. 그래도 처음에는 농장일 이 제대로 안 보였어요. 닥치는 대로 경험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쉽게, 그러니까 효율적으로 하려고 많이 생각하죠.”

‘쉽게’는 안 대표의 신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대표가 말처럼 일을 적당히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위너 팜을 짓기 전에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의 선진 양돈 농장에 견학을 다니며 정보를 수집 했다. 또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쉬지 않고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대학원 박사 논문은 큰 집을 짓느라 내년으로 미뤄 둔 상태. 그간의 경험과 공부로 거시적인 안목과 목표가 생겼다.

 

출처 한국농수산대학, 위너팜

세계 최고 수준의 국내 축산 기술을 널리 알리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47%로 OECD 최하위입니다.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곤 하지만 축산업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어요.” 안 대표는 이렇게 얘기하며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저는 외국에 여러 차례 견학을 다녀오긴 했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앞선 지 오래됐어요. 농업 선진국이라는 유럽, 미국에서 오히려 우리나라에 배우러 옵니다. 우리 농장에도 이미 여러 차례 다녀갔고요. 우리 농장만해도 배설물로는 냄새 안 나는 퇴비나 액체비료를 만들고, 외부로 배출되는 공기는 찜질방보다 냄새가 안 나게 정화하고 있고, 축산 오·폐수도 빗물보다 깨끗하게 정화해서 생활용수로 쓰고 있어요. 이런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규제만 강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농업 간담회나 포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다양한 자리에서 축산계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하는 일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말하자 안 대표는 손사래를 치며 변함없는 자신의 신조를 한 번 더 반복했다. “저요? 아이고 저는 일은 쉽~게, 조~금만 하는 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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