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이야기를 조금만 해봐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 허규를 만나다.

닐 세다카의 명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주크박스 뮤지컬로 연령대 상관없이 '올에이지'를 표방 중인 뮤지컬 '오!캐롤'에서 '게이브' 역으로 출연 중인 허규 배우와 인터뷰를 했다.

사실 인터뷰는 2016년 12월에 진행됐지만, 그의 솔직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기사화해도 괜찮을지 고민 끝에 장시간의 편집을 거쳤고, 최대한 이야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의 말은 한마디를 놓치기 아까울 정도로 위트 있고, 뮤지컬과 관객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이브'는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호텔보이이자, '델'의 노래를 만들어 준 그림자 작곡가로 유약한 모습 뒤에 감춰진 강인함이 극 후반에 표출되며 멋진 엔딩을 만드는 캐릭터다. '허규' 역시 큰 유명세도, 높은 티켓 파워로 손꼽히는 배우는 아니지만, 그가 가져온 20년의 내공이 시간이 흐를수록 발휘되며 적은 분량에도 든든하게 '오!캐롤'의 한 축을 담당한다. 1997년 그룹 '피노키오' 보컬로 데뷔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동안인 그와 만나 나눈 긴 이야기들.

만나서 반갑다. 맡은 배역을 찾아보니 약간 멋있는 역 전문이다. 주인공 전문.

ㄴ 게이브가 주인공이라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웃음).

관객이 원하는 캐릭터에 감정 이입해서 볼 수 있는 작품이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다. 중장년층 관객을 노린 작품으로 홍보해 기대감이 없었는데 공연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ㄴ 다들 그런다. 기대 없이 보러 왔다가 너무 재밌다고.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사실 걱정이었다. 2030세대 위주의 공연을 계속하다 '오!캐롤'을 해도 되나 싶고, 공연 기간도 길다 보니 내 경력의 공백이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팬들이 일단 한 번은 보러 오지 않나(웃음). 보고 나니 다들 반응이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인터뷰 당시)20회 정도 공연했는데 전 회차를 관람한 팬도 있다. 앞으로도 다 보겠다고 하더라. 항상 OP석에서 공연을 보는 친구인데 티켓에 싸인을 해줄 때 보니 8, 9만원 정도 하더라. 그래서 한 번은 걱정돼서 '돈 벌어서 여기에 다 쓰면 어쩌냐' 했는데, '남자친구 없어서 아직 괜찮아요' 하더라(웃음).

팬들의 구체적인 감상은 어떤가.

ㄴ 사실 처음에는 '분량이 적어서 아쉽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다음은 '의외로 재밌어요'(웃음). 여담으론 이번 작품에선 제 분량이 좀 적긴 해도 2016년에만 공연을 6개나 했다. '무한동력'부터 '살리에르', '마리아 마리아', '마마 돈 크라이', '고래고래',에다가 몽니의 스토리 콘서트 '2016 grown up'에서 김신의 배우의 아역을 맡았다.

아역이라니 정말인가(웃음). 어떤 콘서트였나.

ㄴ 김신의 배우가 어릴 적의 자기 러브스토리를 가지고 콘서트를 꾸몄다. 고등학생, 첫사랑 만날 때, 군대 갈 때, 가수 데뷔 때 등등 이야기를 풀어낸 건데 제가 김신의 역이었다(웃음). 소극장이긴 했지만, 전회차 매진에 가까운 성적을 내서 쇼노트에서 아예 작품으로 키우는 중으로 안다.

   
 

다시 이야기를 돌아와서 그럼 '오!캐롤' 분량이 적은 걸 알고 참여한 건지.

ㄴ 그건 아니다(웃음). 그렇지만, 팬들 이야기가 그동안 워낙 힘든 작품을 했으니 연말에 좀 쉬어가는 작품이라 오빠를 위해 다행이라고 하더라(웃음).

아마 관객들도 부담 없이 보는 작품이라 좋을 것 같다. 게다가 OP석에 배우들이 앉기도 하고 선물도 주고, 서비스가 좋은 작품이다.

ㄴ 아마 뮤지컬 매니아가 아니시면 앞이나 뒤나 비슷할 거로 생각하시겠지만, 앞에서 배우의 표정이나 미세한 디테일을 즐기는 건 천지 차이다. 그런 맛에 빠진 친구들은 아무리 할인을 높여도 그 자리만 고집한다. 우릴 가까이서 보기 위해 와주는 거니 무척 고맙다.

다시 분량 이야기로 가보자.

ㄴ 몰랐다. 대본을 못 보고 연출님, 음악감독님과 미팅 때 살짝 한 페이지 정도 리딩을 했다. 그런데 그게 게이브의 마지막 가장 긴 대사 부분이었다. 그래서 분량이 없는 건 전혀 몰랐다(웃음). 저는 그 대사가 제일 길다. 거의 전부다. 하지만, 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 생각했던 게 김성수 음악감독님과 20년 가까운 지인이다. 음악 선후배로 만났는데 그때부터 아티스트로서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뮤지컬에선 제대로 작업을 같이한 적이 거의 없더라. 그랬는데 (김)성수 음악감독님이 이번 작품에서 절 추천해주셔서 무조건 하겠다고 했는데 연출님도 다행히 좋게 봐주셔서 성공적으로 참여했다.

기침이 좀 있는데 건강은 괜찮은지. 독감도 유행이라던데.

ㄴ 독감은 아니고 제가 원래 알레르기가 있다. 열도 없고 멀쩡한데 마른기침만 나더라.

공연할 땐 괜찮은지.

ㄴ 그게 신기한 게 의사 선생님 말씀이 신경을 더 쓰는 게 있으면 기침에 관한 신경이 줄어든다더라. 그래서 무대에 가면 기침을 안 하니까 다들 모른다. 소대만 들어가면 기침을 하는데. 근데 또 다행인 게 '오!캐롤'에서 제 대사 분량도 적고, 노래 음역대도 제 원래 음역대에 비해 훨씬 편안해서 괜찮더라.

이제 보니 '마리아 마리아' 프레스콜을 봤는데 그런 고음 많은 작품이 공연 기간이 짧아서 어찌 보면 다행이었겠다(웃음).

ㄴ 그 작품도 힘들지만, 사람 잡는 공연은 '마마 돈 크라이'와 '구텐버그'가 최고다. '마마 돈 크라이' 같은 경우 거의 1인극 급이라 체력도 많이 들고 희비극을 오가서 정신적으로도 어렵다. '구텐버그'는 아시다시피 분량 자체가 엄청난 2인극이라 체력적으로 힘들다. 이 두 작품이 가장 힘들었다. '오!캐롤'은 그에 비하면 너무 편해서 이거 하면 다른 어려운 거 할 수 있겠나 싶기도 하다(웃음).

앞에도 말했지만, 주로 주인공, 작품에서 멋있는 캐릭터를 많이 맡는다.

ㄴ '마마 돈 크라이'에선 찌질한 느낌도 있다(웃음). 의도해서 멋있는 역을 찾는 건 아니다. 그냥 제가 재밌는 게 중요하고 아니면 제가 잘할 수 있는 캐릭터를 선택하려 한다. 배우 중 '나랑 안 맞을 것 같지만, 캐릭터 변신을 위해 도전하겠다' 생각하는 배우들도 많다. 그런데 저는 용기가 없는 건지 그런 스타일은 아니고 제 스타일대로 해석했는데 어떻게 보니 모험 없이도 다양한 캐릭터를 한 셈이 됐다.

'예수' 역도 했지만, 앞서 말한 '프로페서V'나 '무한동력'의 '진기한'을 보면 그런 것 같다.

ㄴ '무한동력'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작년 하반기에 '고래고래'와 '무한동력' 초연을 둘 다 했다. 창작 초연이 워낙 힘들고 어렵지만, 다행히 '영민'이 실어증이라 겨우 했다(웃음). '영민'을 보고, 제 팬이 된 분이 '무한동력'을 보러 왔다 뿔테안경 쓴 찌질이 백수 '진기한'을 연기하니 팬들이 신기해했다(웃음).

그럼 작품을 고른 기준이 본인이 재밌어하는 게 가장 중요한가.

ㄴ 보통 그렇고 음악을 듣고 제 보이스와 맞는지 확인한다. 저는 음역대가 달라서 일반 남성이 할 수 있는 음역대의 역을 오히려 못 한다. 그래서 음악적인 게 저와 맞게 조정할 수 있거나 혹은 제 음역과 맞는 역을 하려 한다. 아니면 이 작품을 제가 재밌게 할 수 있겠다 싶은 작품들 위주로 선택한다.

   
 

김성수 음악감독과 20년 지기라고 했다.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ㄴ 김성수 음악감독님은 99년에 천계영의 '오디션'이란 만화 관련돼 처음 만났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 밴드가 토너먼트로 경쟁하는 내용이었는데 요즘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나. 백만 부 넘게 팔린 히트작이었다. 그 만화가 인기를 얻어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게 됐는데 그 작품의 음악감독을 (김)성수 형이 맡게 됐다. 그러면서 '오디션'을 위한 오디션이 열렸고, 제가 거기서 1등을 했다. 만화 주인공인 보컬 '황보래용'이 엄청난 고음의 소유자라서 저와 잘 맞았다. 또 캐릭터 이미지도 맞았고, 거기에서 인연이 시작됐다. '오디션' OST가 나중에 만들어졌는데 엄청난 호화 캐스팅이었다. 박기영, 박혜경, 김종서, 밴드 크래시, 일본 뮤지션도 참여했다. 그걸 작업하며 (김)성수 형 음악을 처음 들었는데 완전 앞선 음악을 해서 충격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그때 만들어 준 음악을 제 2014년 브릭 앨범에 실었다. 15년이 지났지만, 하나도 안 촌스럽고 사람들도 좋아하더라. 그만큼 너무 앞서가서 탈인 뮤지션이었다.

그럼 다음으론 김신의 배우와의 인연은 어땠는지. 같은 작품에 많이 출연했고 고음 보컬인데 라이벌은 아닌지.

ㄴ 인디씬에서 활동할 때였다. 어린 나이라 '자뻑' 기질이 있었던 시기라 그 당시 저는 세계 짱이었다(웃음). 인디씬에서 나를 능가할 보컬은 없다고 생각하며 거만하던 상황인데 대기실에서 제 앞 순서인 '몽니'의 노래를 들었다. 너무 잘하길래 누군가 했는데 그게 김신의 배우였다. '와 나 말고 저렇게 잘하는 사람이 또 있네?' 하고(웃음) 그게 첫 만남이었다. 세월이 지나 김신의 배우도 뮤지컬 활동을 하게 됐고, 제가 친한 장은아 배우랑 '머더발라드'에 출연하게 됐다. 장은아 배우랑 김신의 배우가 친해져서 콘서트에 초대받았다고 해서 '김신의 배우와 친해지고 싶다'며 저도 초대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김신의 배우가 알았으니 참치회를 사달라고 해서 셋이서 참치회 먹으면서 친해졌다(웃음). 그래서 친해진 지 몇 년 안 됐다. 그러면서 지금은 나왔지만, 김신의 배우가 절 자기네 소속사로 불러서 함께 활동도 했었다. 뮤지컬에서 더블 캐스트를 하려면 음역대가 비슷한 게 좋다. 음악을 배우마다 조정하려면 불편하니까. 그래서 그 뒤로 '마리아 마리아'나 '곤, 더 버스커'에서 제가 (김)신의를 추천했다. 반대로 '고래고래'는 제가 추천받았다.

그렇다면 라이벌보단 동료라고 봐야겠다.

ㄴ 라이벌일 수 없는 게 추구하는 음악 성향도 다르고 보컬 성향만 비슷하다. 정확히 말하면 노래 스타일, 창법이 비슷한데 또 성향은 다르다. 비슷한 장르라면 모르겠지만, 가는 길도 은근히 달라서 서로 라이벌일 수 없다.

이야기 중 장은아 배우와 친하다고 했다. 어디서 알게 됐나.

ㄴ 장은아 배우를 뮤지컬에 들인 것도 저다(웃음). (장)은아 씨와는 '보이스코리아' 때 만났다. 그런데 너무 성격 좋고 노래도 잘해서 이야기 많이 하며 금방 친해졌다. 제가 '광화문 연가'에 출연 중이었는데 리사 배우가 거의 원 캐스트로 출연 중이었다. 클래식이 아닌 팝 스타일을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더블 캐스트를 구하지 못하던 와중에 이지나 연출님이 제게 추천할 사람이 있냐고 하셨다. 그때가 제주도 공연이었는데 장은아 배우가 생각 나서 '너 어디냐'고 했는데 가족들과 제주도에 놀러 왔다는 거다(웃음). 그래서 당장 불러서 공연을 보여주고 이지나 연출님도 완전 맘에 들어 하셨다. 그 이후 쭉쭉 성장해 지금은 제가 '은아님' 한다(웃음).

인복이 있는 것 같다. 주변 인물들이 다들 대단한데.

ㄴ 제가 사람을 좋아한다. 술도 좋아하고.

   
 

그럼 '게이브'보단 '델'에 가깝겠다.

ㄴ '델'처럼 망나니같이 굴진 않는다(웃음). '델'과 '게이브'의 중간 정도인 것 같다. 어릴 적엔 '게이브' 같았다. 전 노래를 하며 성격이 많이 변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여자에게 말도 못 걸어서 아는 동창도 없고, 여자애들이 몰려 있으면 그 길을 피해 다닐 정도였다. 지각도 절대 못 했다. 늦게 가면 다들 집중해서 보니까(웃음). 그래서 지각을 안 하거나 혹시 지각하면 아예 그 수업을 안 들어갔다(웃음). 그래서 제가 보컬한다면 어릴 적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그만큼 제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인데 대학교에서 노래하며 180도로 변했다.

대학교에서 보컬이라면 역시 여자를 만나기 위해선지(웃음).

ㄴ 아니다. 음악을 겉멋 들어서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기타치고 그런 친구들은 대부분 음악을 금방 그만둔다. 연애하면 그만두거나, 작업용 레파토리만 몇 개 만들어 평생 하거나(웃음). 저는 중3 때 친구가 생일 선물로 밴드 음악이 담긴 테이프를 줬다. 그때부터 완전 음악에 빠져서 락 밴드 음악을 엄청 듣다가, 대학교 가면 스쿨밴드에서 보컬을 해야겠단 목표가 생겼다. 중고등학교 때보면 스쿨밴드가 꼭 전교생 앞에서 연주하고 여자애들이 멋있다 하고 그러지 않나. 그럼 전 그걸 멀리서 지켜보며 너무 부러워했다. '내가 더 잘하는데' 하면서(웃음). 정작 대학생 된 뒤에도 몇 번이나 밴드부 문 앞에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 보컬을 시작하고 나니 잘한다고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박수받고 무대에 서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내 노래, 멘트를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란 걸 느끼며 완전 성격이 변했다.

그때 락 밴드라면 어떤 밴드인가.

ㄴ '엑스재팬' 완전 팬이었다. 그때는 일본 음반이 아예 수입이 안 되던 시기라 '빽판'이라며 불법복제 음반을 돌려 듣고 그러던 때였다. 근데 아버지가 외국에 출장을 다녀오며 '엑스재팬' 앨범을 다 사다 주셨다. 그래서 한국말로 가사 적어가며 외워서 부르고 그랬다. 그땐 '본조비' 보고 말랑말랑하고 여자애나 하는 밴드지 이랬다(웃음). 당시 저는 제 생각에 '세계 짱'이었으니까(웃음).

그런데 락 밴드와 뮤지컬의 음악은 또 다르지 않나.

ㄴ 그게 일단 제 생각에 한국에서 락 뮤지컬이 인기가 많다. 또 락이 주는 이미지, 사람을 흥분시키는 특유의 느낌이 뮤지컬과도 잘 맞는 것 같다. 뮤지컬이 한 편의 공연이며 드라마지 않나. 관객에게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킬 수 있는 좋은 장르가 락이라고 생각한다.

   
▲ 김성수 음악감독이 참여해 6년 동안 만든 서태지 주크박스 창작 뮤지컬 '페스트'.

김성수 음악감독과도 친하고 락도 좋아하면 뮤지컬 '페스트'에는 인연이 없었는지.

ㄴ 그것도 이야기가 많다(웃음). 전 대중적으로 발표되기 전에도 이미 (김)성수 형에게 '서태지 뮤지컬'이 만들어진단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뮤지컬용으로 편곡된 곡을 서태지님과 의논하는 과정에서 제공하는 가이드 곡을 제가 다 불렀었다. '김성수 아니면 노'라고 해서 김성수 음악감독만 섭외되고 연출도 없던 시기였다. 당시 서태지 씨 콘서트의 오프닝도 성수 형이 작곡부터 편곡까지 했었다. 그래서 성수 형이 저랑 '우리가 아니면 이걸 누가 하나' 했다. 가이드 곡도 호평이었다. 그런데 이후 제작진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여러 번 연출이 바뀌고, 배우들도 여러 차례 변했다. 그런데 성수 형은 음악 외의 일에 관심이 전혀 없는 타입이라 캐스트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제작되던 중 제가 '고래고래'에 참여하게 됐는데 '페스트'도 무대에 오를 시기가 됐다. 워낙 큰 규모의 창작 초연 대극장 뮤지컬이다 보니 겹치기 출연이 어려워져 자연스레 하차했다.

원래 맡았던 배역은 무엇인가.

ㄴ '그랑' 역이었다. 나중에 공연을 보니 '코타로' 역이 마음에 들더라(웃음). 음악이 워낙 좋아서 다시 올라간다면 여전히 참여하고 싶은 작품이다.

'페스트'나 '고래고래' 모두 창작 초연이었다. 여러 창작 작품에 큰 애정이 있고, 초연 후에도 계속 출연하는 의리 있는 배우로 알려졌다. 또 그만큼 팬들에게도 잘하는 배우로 소문났던데.

ㄴ 저는 별거 아니고 제가 먼저 질문을 많이 한다. 또 이름을 잘 외우는 편이라 이름을 불러 줬는데 무척 좋아하더라. 혹은 '염색했네요?' 처럼 작은 부분을 알아봐 주거나. 제가 원래 성격이 그런 편인데 배우가 팬을 기억해 준다고 해서 감동했다더라. 이게 어떤 의도가 있거나 하면 알 텐데 그런 게 아니니까 오히려 팬들이 무척 좋아해 줘서 '오빠 제가 더 잘할게요' 하더라(웃음). 그런데 이제 저도 나이가 먹어선지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서 이름까진 잘 못 외우고 얼굴이라도 외우고 알려고 노력한다. 저는 무명생활을 오래 해선지 특별히 연예인처럼 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명 생활은 언제까지였다고 생각하나.

ㄴ 사실 지금도 유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뮤지컬에서만 조금 알아봐 주시지. 방송, 연예까지 본다면 아직도 무명이다. 97년 데뷔했으니 이제 20주년인데 아직 누구나 알만한 히트곡 하나 없다. 전 아직도 제가 무명 같다.

히트곡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렇다면 가수나 배우로서의 정체성 고민은 없었는지.

ㄴ 그런 고민을 예전에 했었다. 가수 모드, 배우 모드일 때가 있는데 한쪽으로 완전히 가버리면 다른 한쪽 모드를 키는 데 두 달은 걸리더라. 그런데 이걸 계속 같이 해나가려니 둘 다 잘 못 하는 거 아닌가 걱정돼 아내에게 고민을 물었다. 너무 하찮다는 듯이 '뭐 그런 걸 고민하냐. 둘 다 열심히 해' 라더라(웃음). '요새 누가 하나만 하냐. 남들은 두 개 다 하려고 난리다. 연기할 수 있을 때 연기하고, 노래할 수 있을 때 노래 열심히 해라'라고. 단순한 말이지만, 절 일깨워줬다. 제 롤모델은 김창완 선배님이다. 연기도 하고, 밴드도 계속하시고 라디오 디제이까지. 제 어릴 적 꿈들이다. 그래서 전 딱 슈퍼스타가 되기보다 잔잔하게 조연으로 오래 가고 싶다.

   
 

라디오 하니 최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ㄴ 일단 '오!캐롤' 홍보가 목적이었다(웃음). 제가 2005년쯤 솔로 앨범을 내고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나가서 한 시간 라이브를 했다. 그런데 그땐 선배님이 위압적이셨다. 광고 나갈 때도 말 한마디 안 하시고 분위기도 무겁고. 그때 친구들에게 막 상처받은 이야기를 털어놨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다시 '배철수의 음악캠프' 나가려니 조금 걱정이었는데 이번엔 너무 친절하게 잘해주시더라. 말도 바로 놓고 편하게 대해주셔서 즐겁게 방송했다. 또 이유리 씨가 안면이 있다 보니 이야기할 것도 많아지고. 이번에 제가 받은 느낌은 20년 차 후배 뮤지션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느낌이었다. 이해하고 응원해주신 느낌이라 무척 재밌는 방송이 됐다.

이제 '오!캐롤' 이야기를 해보자. 시국 관련 애드립도 있고 무척 자유로운 작품 같은데 '게이브'도 그렇게 추가된 부분이 있는지.

ㄴ 작품에서 정해놓은 캐릭터 설정에서 애드립이 플러스, 마이너스가 되는 캐릭터가 따로 있다. 그리고 저는 작품에서 벗어난 애드립을 싫어하는 편이다. 나름 애드립이 강한 배우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고(웃음). 상황과 설정에 맞는 애드립을 선호하는 편이다. 공연 초반에 보셨다면 요즘에는 '게이브'가 너무 밋밋하다 느껴져서 대사를 좀 더 추가해서 상황을 강화한 부분이 있다. 원래 '로이스'가 '델 모나코 코러스 해요! 보러오세요'하고 퇴장하면 자리에 앉는다. 큐였다. 그런데 거기서 제가 '훗, 귀여운 아가씨네'하고 대사를 넣었다. '게이브'는 점프가 많은 캐릭터다 보니 감정을 좀 더 설명하고 싶어서 넣었는데 팬들이 그 멘트가 설렌다며 무척 좋아하더라(웃음). 싸인 받을 때 적어달라더라. 웃음 코드도 좀 강화하려고 처음 '로이스'와 '마지'를 안내할 때도 둘이 뽀뽀하는 거 보며 '결혼 축하드립니다'랑 '너무 부러우세요' 이러며 퇴장하는데, 반응이 좋더라.

   
▲ 정상윤, 김신의 배우와 함께한 뮤지컬 '고래고래'.

재관람 관객이라면 그런 변화를 좋아하겠다. 한번은 정상윤 배우가 공연 중에 넘어졌는데 애드립으로 승화한 장면이 있다던데.

ㄴ (정)상윤 배우도 제가 인정하는 '도라이' 중 하나다(웃음). '고래고래'에서 같이 공연했는데 그 작품은 정말 애드립이 난무하는 작품이다. 뭐가 대본이고 애드립인지 우리도 잘 분간이 안 되는 작품이다. 애드립이란 게 본인들이 할 때도 있고 남의 애드립을 받아치기도 해야 하는데 김재범, 정상윤 배우는 정말 최고다. 얌전하고 잘생긴 얼굴로 너무 웃긴 역을 잘한다. 둘 다 잘 어울린다는 건 배우로서 축복이다. 같은 배역인 (서)경수도 정말 재밌다. 둘이 서로 '과'는 좀 다르지만(웃음). (그렇게 불러도 괜찮은지)사실 아티스트에게 '도라이'는 칭찬이다. 평범하면 예술할 수 없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서 최근 '오!캐롤'이 잘된 이유는 다른 진지한 대극장 작품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부담 없는 톤의 작품이라 오히려 반사 이익이 있는 것 같다.

ㄴ 작품이란 게 잘되려면 잘 된다. 그런 신기한 경험을 '광화문 연가' 때도 했고, '고래고래' 때는 반대로 기대에 못 미쳐 아쉬웠다. 반면 '오!캐롤'은 이렇게 잘될 줄 몰랐다(웃음). 정말 걱정 많이 했다. 연습할 땐 유치해 보였는데 막상 무대에 올리니 그게 아니더라. 또 이 공연을 무대에 올린 걸 모니터로 보니까 앙상블이 함께하는 안무가 정말 끝내주더라. 관객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한다는 느낌이다. 볼거리도 있고, 익숙한 곡으로 어필하고, 배우 폭도 넓어서 다양한 연령대에서 좋아해주시고. 어떤 운명, 타이밍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광화문 연가' 때가 그랬다. 그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 아티스트의 곡으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 그런데 창작 초연인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시작하는 모험을 해서 주변에서 우려가 컸다. 그러나 갑자기 '세시봉'이 뜨면서 7080 음악이 뜨고 '빅뱅'이 '붉은 노을' 리메이크를 하고 임수정, 정우성 배우의 커피 CF에서도 '빗속에서'가 BGM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윤)도현이 형이 주연이었는데 '나는 가수다'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비스트'의 양요섭 배우도 출연하며 그야말로 10대에서 60대까지 모두 보러 오며 세종문화회관 3층까지 꽉 찼다. 그래서 다들 오히려 무서워했다(웃음). 한번은 나라에서 높은 분들이 연락와서 공연 좀 볼 수 있냐고 했는데 티켓이 다 팔려서 자리가 없었다. 그랬을 정도로 센세이션했다. '오!캐롤'도 시파티 때 박영석 대표님이 그러셨다. 최근 작품 중 첫 공연부터 호평받은 작품이 없었다며 너무 기분 좋아하시더라.

   
▲ 뮤지컬 '오!캐롤'.

아까 '오!캐롤'의 시국 발언도 있고 요즘 모두 힘든 시대다. 관객들이 공연을 보러 가는 원동력이 '힐링'이라면 본인이 무대에 서는 원동력이 뭔지.

ㄴ 누가 보면 소인배적인 생각이라 할 수도 있는데 저는 끈기가 없는 건지 재미가 없는 일은 쉽게 포기한다. 뮤지컬도 처음에 빠진 이유가 너무 재밌어서다. 무대에서 노는 것 같다. 늘 재밌는 걸 좋아하고 심각한 상황을 안 좋아하는데 저는 '무대에서 논다'는 이야기를 정말 믿는다. 내가 정말 무대에서 편하고 재밌게 놀 때 관객도 그 공연이 재밌다. 에디슨이 '나는 평생 단 하루도 일한 적이 없다. 늘 재미있게 놀았다. 돈이 발명가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나는 발명하는 내내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사실 나에게 돌아오는 가장 큰 보상은 일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성공이라고 떠들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다. 전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다. 사실 배우란 게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받는 직업이다. 관객을 위해 일한다는 중압감이 있는 직업인데 그래도 재밌으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미없게 느껴지면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재미없다 생각하면 무대 위에서 가짜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게 바로 제 원동력인 것 같다. 그래서 누가 취미를 물어보면 취미가 딱히 없다. 왜냐면 일이 너무 재밌으니까 취미를 만들어서 스트레스를 풀 필요성이 없다. 어릴 때는 독서를 해서 독서를 취미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인터뷰에서 취미를 물어봐도 대답할 게 없더라. 내가 이상한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공연이 취미나 마찬가지라서 그런 것 같다. 이게 아직까진 재밌어서 그런 것 같다. 취미는 '오!캐롤'이다(웃음).

그럼 공연 외의 시간엔 뭘 하며 지내나.

ㄴ 이것도 직업의 연장인데 최근 교회에서 뮤지컬을 부탁했다. '마리아 마리아'를 보고 교회 전도사님이 완전 영감을 받으셨다. 교회마다 문화예술선교회가 있는데 그 담당 전도사님이시다. 전도나 성도를 어찌하면 좋을까 했는데 '마리아 마리아' 공연 본 팬 중에도 교회나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가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가게 하는 게 문화예술의 힘이란 걸 전도사님이 깨달으셨다. 그렇게 전도사님께서 교회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겠다고 하셨는데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셨던 거다(웃음). 음향, 마케팅, 의상, 배우 분장 등등 할 일이 얼마나 많나. 제가 졸지에 프로듀서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출연도 한다. 교회라 돈을 줄 수가 없어서 일일이 섭외를 했는데 절 믿고 오케이 해준 고급인력들이 많아 너무 감사하다. 김보강, 장승조 배우를 비롯해 '인더하이츠' 안무감독인 채현원 안무감독 등이 함께한다. 제목이 '아담'인데 공연 안 할 때는 '아담' 만든다(웃음). 또 1월에는 제주도에서 밴드 공연도 있어서 연습해야 한다. 동아방송대랑 백석예술대 학교 강의도 나가는데 이제 종강해서 한시름 놨다.

그럼 공연 볼 시간도 없겠다. 다른 배우들 공연 본 게 있는지.

ㄴ 뮤지컬 '더 언더독', '블랙메리포핀스', 연극 '날 보러와요' 봤다. 전 공연 보는 걸 좋아하고 또 뮤지컬보다 연극을 좋아하고 스토리 위주의 작품을 주로 보는 것 같다. 연극 '가족의 탄생'도 봤다. 보러 갈 것도 많다. 뮤지컬 '구텐버그'나 '담배가게 아가씨',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등도 봐야 한다.

   
 

데뷔 20년이다. 본인의 인생을 단어로 정리한다면 뭐가 떠오르나.

ㄴ 한 단어는 아니지만 '맨땅에 헤딩'이 떠오른다. 제 인생은 계획대로 된 게 없다. 사자성어도 떠오른다. '대기만성'. 저는 원래 무척 평범하고 소심했다. 전공도 '게이브'처럼 호텔경영 출신이다. 당시에 문과 취업률 1위의 정말 뻔한 코스였다. 대학 가면 동아리에서 락 보컬 재밌게 하다 군대 갔다 오고 어학연수 갔다 오고 취업해야지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아리에서 음악에 완전히 빠져서 대학 때 평점 0.0도 받아봤다. 학사 경고도 세 번 받고. 군대도 안 가고 한참 다녔다. 당시 홍대는 실력 있는 밴드들만 서는 인디 쪽에서 핫한 무대였는데 워낙 열심히 해서 동아리 밴드인데도 홍대에서 노래했고 거기서 캐스팅되며 음악 시작한 지 2년 만에 '피노키오' 보컬이 됐다. 보통 연습생 생활도 오래 해야 하는데 '피노키오'가 보컬을 1년째 찾던 상황이라 들어간 지 2달 만에 앨범이 나오고, 제가 정말 뭐 되는 놈인 줄 알았다. 전 원래 가수가 꿈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데뷔하고 '피노키오' 단독 콘서트도 100회 정도 했다. 자기 이름 걸고 콘서트 하는 게 얼마나 어렵나. 콘서트는 당시에 게스트 문화도 있어서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누가 나올지가 무척 화젯거리였다. 그때 콘서트 게스트로 서던 친구들이 박기영, 진주, 박정현 씨였다. 지오디도 저 만나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하고(웃음). 그런데 IMF 터지면서 회사랑 몇 년씩 소송하고 그랬다. 뮤지컬도 제가 원한 게 아니라 소개받았다. 처음 뮤지컬은 '포비든 플래닛'이란 2002년 작품이었다. '밴드컬'이라 배우가 악기부터 보컬까지 조금씩 해야 하는데 그걸 언제 가르치나. 그래서 (김)성수 형이 불러서 한 번 하고, 이후 쭉 안 하다 2009년에 '오디션'이란 작품을 주현종 배우란 형이 소개해줬다. 근데 그때 맛이 들여서 지금까지 뮤지컬을 하고 있다. 뮤지컬도, 음악도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알 수 없는 힘이 인도해준 것 같다. 삶이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 2016년도 작품을 여섯 개나 할 줄 몰랐다(웃음). 배우들은 원래 작품이 없는 게 불안해서 오디션도 보러 다니고 하는데 저는 춤도 못 추고 보컬도 특이하니까 오디션 보면 떨어질 것 같아서 오디션도 잘 안 본다. 그런데 누구에게 소개받거나 어떻게 일이 잘 풀리거나 하면서 작품을 계속하게 되더라. 그래서 2017년엔 무계획이다(웃음). 만약 '오!캐롤' 후 작품이 없으면 밴드 앨범이 안 나온 지 오래돼 앨범을 낼까 싶기도 하고, 데뷔 20주년 콘서트도 생각 중이다.

연극도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연극 출연 생각이 있는지.

ㄴ 생각이 있다. 그런데 이미지를 깨는 게 워낙 어렵지 않나. 저는 아직도 뭐랄까 반예인(웃음). 정통 배우가 아니라 밴드 출신 배우로만 보는 시선이 있다. 뮤지컬에서도 그러니 연극에선 더 하다. 물어보지도 않고(웃음). 아는 친구들에게 같이 하지 왜 안 불렀느냐고 하면 또 '형은 너무 비싸잖아요' 이런다. 저는 돈도 작품 따라 맞춰가는 거로 생각한다. 제가 지금까지 작품이 들어온 원동력 중 하나가 출연료 보지 않고 작품만 믿고 출연했던 거 아닐까(웃음).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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