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38 다미안 차젤레 감독의 '라라랜드'·'위플래쉬'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라라랜드'가 2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 흥행은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전작 '위플래시'의 영향일 수도 있고, 엠마 스톤의 매력 덕일 수도 있으며, 라이언 고슬링의 섹시함이 불을 지핀 결과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영화의 가장 큰 흥행 원동력은 매혹적인 음악이라 생각한다.
 
'라라랜드'가 만든 환상의 끝에 있는 이별이 아름답게 포장될 수 있던 건, 영화가 배치한 음악의 힘이었고, 이 영화가 가진 서사적 부실을 메우는 것도 음악의 몫이다.
 
'라라랜드'가 좋은 플롯과 스토리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수록 고민할 지점이 많다. 하지만, 황홀한 음악 덕분일까. 이 영화가 멋진 경험을 줬다는 건 반박하기 싫다. 2016년의 어떤 영화보다 즐겁고, 가슴 뜨거운 관람경험을 선물한 영화가 '라라랜드'다.
 
   
 
 
결여를 논하면서도 '라라랜드'를 옹호하게 되는 것, 옹호하고 싶게 하는 것, 이게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재능이 아닐까. 그가 설계한 오프닝과 탭댄스 부분의 롱테이크 장면은 따로 떼어 소장하고 싶을 만큼, 즐겁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가 준비한 마지막 한 방, 환상 속에 재회한 두 사람의 모습은 관개의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선택에 있어 후회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 관객에게, 달콤하면서도 서글픔을 공감케 하는 '아린' 순간을 선물한다. 야박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이 세 시퀀스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아니, 이 세 시퀀스만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그만큼 강렬하다.
 
다미엔 차젤레는 재즈처럼 영화에 리듬감을 불어넣는데, 그가 '라라랜드'에서 진정으로 지휘했던 것은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위플래쉬'에서 그가 조립해 맞춘 게 영화였다면, '라라랜드'에서 그가 조립해 맞춘 건 인간의 감정, 그중에서도 '상실'에서 오는 후회와 '만약'이라는 가정법의 완성에서 오는 '서글픔'이었다. 그가 관객의 정서를 완벽히 지휘했기 때문일까, '위플래쉬'의 완성도가 분명 더 높아 보였는데도, 다시 관람하고 싶은 건 '라라랜드'였다. 감독의 마법이다.
 
'위플래쉬'는 카메라가 서있는 위치,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 등에 대해 생각하며 영화를 볼 여유가 있었다. 그 영화는 뜨겁지만 건조했고, 카메라가 (적어도) 관객에게 거리를 두는 차가움이 있었다. 그런데 '라라랜드'는 그렇지 않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는 생각이 머물 시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숨을 고를 시간이 없다. '라라랜드'는 음악과 리듬으로 관객을 취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한 번 관람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분석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영화를 기억하고, 또 다미엔 차젤레를 기록해 보려고 펜을 들었다. 단 두 편의 영화, 그리고 단 한 번의 관람으로 다미엔 차젤레의 스타일을 논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재즈를 사랑하고, 영화의 강약 조절 및 리듬을 구성하는 데 공을 들이며, 찰리 파커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정도가 아닐까. 그러다 우연히 두 영화에서 보이는 하나의 관점을 발견했다.
 
   
 
 
'위플래쉬'가 말하는 성장·성취
'위플래쉬'는 최고의 드럼연주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앤드류의 노력과 성취에 관한 이야기다. 관객이 앤드류에게 목격하는 건, 될 때까지 노력하는 끈기와 성실함, 사고를 당해도 연주를 하러 가는 집념, 그리고 혹독하고 제멋대로인 플렛처 교수 밑에서 견디는 인내심이다. 일종의 광기로까지 보이는 앤드류의 태도는, 꿈을 위한 노력의 극대화된 태도이고,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 보자. '위플래쉬'가 준비한 엔딩은 앤드류의 폭발하는 에너지가 플렛처를 압도하고, 그가 앤드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 연주 장면이다. 이 순간은 앤드류가 한 단계 성장한 재즈 연주가가 되는, 성취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순간 관객이 느끼는 건, 감동 같은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다. 그와는 조금 차원이 다른데, 플렛처를 이겨내고 홀로 우뚝 선, 소년을 향한 존경, 경외심에 더 가까워 보인다.
 
플레처 교수와 앤드류의 교집합은 재즈 연주에 있어 타협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래서 앤드류는 플렛처를 스승의 자리에 앉혔고, 그에게 인정받으려 했다. 플렛처에게서 튀어나가려는 앤드류를 보며, 이런 생각해볼 수 있다. 앤드류가 플렛처에게 선택받은 게 아니라, 앤드류가 플렛처를 성장을 위해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위플래쉬'에서 성장은 포용과 관용이 아닌 혹독함과 고통으로 이뤄진, 피와 땀의 길을 걸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표현된다.
 
   
 
 
영화에 언급된 재즈의 대가 '찰리 파커'는 '위플래쉬'가 생각하는 '성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드러머 조 존스는 찰리 파커의 연주가 형편없다며 그에게 심벌즈를 던졌었다. 이후, 이에 모욕을 느낀 찰리 파커는 혹독한 연습을 통해 대가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위플래쉬'는 이를 인용한다. 그리고 플렛처가 앤드류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의자를 던지면서, 그 일화를 재연하고 오마주한다. 이렇게 '위플래쉬'는 끊임없이 가혹함과 노력을 성장의 필요조건으로 꺼내 들고 있다. 그리고 이 노력은 피와 땀의 이미지를 통해 앤드류의 육체로 구현된다.
 
두 가지 장면을 통해 소년이 성장을 위해 견디고 있는 가혹함의 무게는 더 확고히 보인다. 하나는 팝콘에 대한 것이다. '위플래쉬'엔 앤드류가 아버지와 영화를 보던 중 팝콘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에서 앤드류의 드럼 외의 관심사를 거의 볼 수 없기에, 이 장면은 사소해 보이나 중요하다. 그 장면엔 초콜릿이 섞인 팝콘이 등장하고, 앤드류는 아버지에게 초콜릿은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
 
언뜻, 이는 취향의 문제 같지만, 영화 전체로 봤을 때, 앤드류의 선언과도 같다. 앤드류는 달콤한 초콜렛 대신 짠 팝콘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가 걸으려는 대가의 길도 그 맛과 비슷했다. 절대 달콤하지 않은 길. 팝콘=짜다=땀 등의 도식도 가능하겠다. 이 장면을 통해 앤드류는 달콤한 걸(길) 배제하려는, 혹독한 길을 걷겠다는 걸 은유적이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다음에 언급하는 장면에선 앤드류의 관점을 더 확고히 드러난다. 앤드류는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과 연애를 했고, 관계를 더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드럼연주자라는 길을 위해, 여자친구와 이별한다. 최고가 되기 위해, 연애에 시간을 뺏길 수 없다는 확고함이 보인다. 앤드류는 제2의 찰리 파커가 되기 위해 사랑을 포기했다. 그는 대가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꿈과 사랑 두 가지를 모두 손에 쥘 수 없고, 쥐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와 관점은 '라라랜드'에 반복되며, 이것이 다미엔 차젤레 감독이 생각하는 성공의 조건임을 추측할 수 있다.
 
   
 
 
'라라랜드'가 말하는 성취
'라라랜드'는 매혹적인 음악이, 상실의 순간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이상한 영화다. 이 영화를 요약하자면, 연인이었던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소망하던 꿈(인기 배우, 재즈클럽 주인)을 이룬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은 꿈의 무대에서 '만약'이란 가정으로만 함께할 수 가상의 연인이 되었다. 성취와 이별이 함께 있는 상황.
 
이처럼 '라라랜드'에서도 다미엔 차젤레는 꿈과 사랑을 함께 두지 않았다. 그에게 꿈과 사랑은 둘 중 하나를 꼭 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꿈을 이루는 것, 성공이란 그처럼 고독하고, 잔인한 것임을 세바스찬을 통해 보여줬다. 세바스찬은 고독해졌고, 덕분에 정통 재즈 클럽 주인으로 꿈을 이룬다. 그러나 떠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며, 더 외로운 상태가 되었다. 고독의 반복이다. 유독 재즈에 있어,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더 혹독한 길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미아는 꿈을 이루고, 결혼도 한, 덜 외로운 상태로 세바스찬을 보고 있었으니까.
 
   
 
 
이 영화가 가장 잔인한 순간은 세바스찬이 정통 재즈를 뒤로하고 퓨전 재즈를 시작할 때이다. 그는 미아와 함께하기 위해 꿈의 일부를 버리고(세바스찬은 정통 재즈의 지독한 예찬자다) 재즈를 대하는 관점도 일부 타협해 대중적인 음악을 한다. 이는 '위플래쉬'의 앤드류가 했던 선택과는 반대로, 세바스찬이 버린 건 여자 친구가 아니라 재즈의 일부였다. 그런데 이때, 미아의 반응은 의외로 차갑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정통 재즈를 하지 않는다며, 변해버린 그를 나무란다. 어떻게든 꿈 비슷한 것의 일부와 사랑을 함께 쥐고 싶었던 세바스찬은 적당한 타협의 결과로, 둘 다 잃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다미엔 차젤레가 세바스찬에게 열어둔 길은 하나, '정통 재즈 연주가, 재즈의 수호자'라는 길이었다. '라라랜드'의 창조주인 감독은 세바스찬이라는 피조물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꿈과 사랑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어. 무조건 하나, 더 간절한 것에 올인 해야 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어야지. 더구나 재즈라는 예술은 더 혹독한 것이지. 반쯤 걸치고 사랑을 택할 수도 없어. 둘 다 가지는 건 욕심이지. 꿈을 배신하지 마, 재즈를 오염시키지 마. 재즈만 바라봐. 아니면, 재즈라는 걸 완전히 포기하던지. 하지만 넌 재즈의 매력을 이미 알기에, 여기에 발을 걸쳤기에, 재즈를 포기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답은 나왔지.'
 
   
 
 
다미엔 차젤레의 성공론
다미엔 차젤레의 두 편의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재즈, 찰리 파커, 그리고 꿈과 사랑의 선택이다. 앞의 두 개가 소재라면, 마지막 하나는 감독의 시선이자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꿈과 사랑은 함께 얻을 수 없다는 걸 지속해서 말해왔다. 꿈을 위해서는 포기하고, 견딜 것이 무수히 많음을 지독하게 외쳤다. 아주 극단적이고 잔인한 성공론이다.
 
재밌는 점은 다미엔 차젤레의 극단적인 성공론이 영화의 만듦새에도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의 영화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극단적인 측면이 있었다. '위플래쉬'는 플롯이 하나의 음악을 구성하기 위해 적절히 배치된 느낌이 있었다면, '라라랜드'는 플롯의 탄탄함은 뒤로 밀어두고, 무드와 인물의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해 애쓴 느낌을 준다. 하나의 영화는 절제되어 차가운 느낌이었고, 한 편이 영화는 매우 따뜻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 측면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타협을 모르는 감독인가 보다.
 
감독인 그도 이런 지독한 자세로 영화에 임하고 있지 않을까. 그의 영화엔 철저히 계산된 느낌을 주는 순간이 몇 있다. 앞서 말했듯, '위플래쉬'가 한편의 음악처럼 잘 배열되고, 마지막에 강렬한 임팩트를 줄 수 있던 건, 감독의 의도 아래 장면들을 세밀하게 조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라라랜드'는 치밀히 설계된 오프닝의 원 테이크 장면만으로도 그의 꼼꼼함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가 사랑에도 성공한 감독이라면, 조금 배신감이 들겠지만) 두 편의 만듦새는 그의 치열하고 고독한 계산과 노력에서 나왔을 것이고, 이 두 편만으로 그는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그렇게 꿈을 이룬, 성공한 감독이다.
 

 

 
▲ [양기자의 씨네픽업] '라라랜드'는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 트로피를 몇 개 받을까? ⓒ 시네마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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