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비의 향낭' ⓒ봄툰

[문화뉴스] 추억이 추억으로만 멈출 필요가 있을까. 그 시절 사랑했던 것들이 현재에도 조금씩 다른 형태일지언정 존속되는 게 의아하게 느껴질 이유는 없다.

단 대개의 한국 만화는 그렇게 단절되는 것 같다. 특히 전성기를 구가했던 한국 순정만화의 쇠퇴는 씁쓸함을 남긴다. '화이트' 등의 유명 순정만화 잡지들은 폐간되는 운명을 맞았다. 한국 만화를 휩쓸었던 검열의 움직임에서부터, 한국 순정만화의 기반 또한 위태롭게 흔들렸다. 만화가들의 작품 연재 공간인 만화 잡지들은 번번이 침체나 종막에 이르곤 했다.

만화가들이 설 자리가 줄어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만화는 오랫동안 활동 무대 자체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렀다. 그사이, 기존의 잡지 매체 이외의 길이 하나 생겼다. 웹툰 플랫폼의 등장이었다. 만화는 비로소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다.

웹툰이 견고한 지반을 다지게 되었을 무렵, 웹툰 플랫폼 측에서는 기성 만화가들을 플랫폼으로 이끄는 시도들을 했다. 네이버 웹툰에서 기획한 '한국만화 거장전'이 대표적인 예다. 해당 기획은 기성 만화가들이 릴레이 형식으로 한 편씩 투고한 작품들로 구성됐다.

만화가 함형숙 역시 '한국만화 거장전 : 순정만화특집'에 참여한 바 있었다. 하지만 함형숙 작가의 온라인 매체 활동 이력은 그보다 이른 2006년 '화경의 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7년 순정만화 잡지 '화이트'에 대원슈퍼만화대상 당선작 '비안지담'으로 데뷔한 이래 '파사', '겨울나비', '서천화원', '봉선화학당', '영원의 이름' 등으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가졌던 함형숙 작가는 일찍이 온라인 매체를 통한 작품 연재를 이어오고 있었다.

사라져간 추억처럼 보였어도, 한국 순정만화의 맥은 끊어진 게 아니었다. 뒤안길로 멀어져가는 추억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함형숙 작가는 웹툰 플랫폼 봄툰에서 연재 중인 최근작 '황비의 향낭'에 이르기까지, 한국 순정만화라는 추억이 멈춰 있는 과거가 아닌, 생동하는 현재임을 증명하고 있다.

   
▲ '황비의 향낭' ⓒ봄툰

봄툰 연재작 '황비의 향낭'은 함형숙 작가의 주력 장르인 고전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조선말 왕실의 비밀을 둘러싼 주인공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이 이야기는, 함형숙 작가가 그간 만화가로서 고집해온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화는 재미가 우선이지만, 그 이외의 의미도 전하고 싶다는 함형숙 작가의 신념은 '황비의 향낭'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함형숙 작가가 그간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은 어떤 것일까.

함형숙 작가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ㄴ 미래보다 과거를 더 좋아하는 사람? 과거속에 현재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 (웃음)

   
▲ '황비의 향낭' ⓒ봄툰

1997년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중견 만화가이신데. 이전 작품 활동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을지.
ㄴ벌써 중견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니!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과거를 만화로 보여주기 좋아하고 전설과 동양적 정서를 끔찍이 사랑하고 과거의 종합서인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만화를 그렸다. 임진왜란을 다룬 '화경의 달', 고려공녀 이야기를 다룬 '영원의 이름 치엔' 등 여성의 몸으로 역사의 격동기를 감내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선보였다. 역사는 남자만 만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화가가 되고자 결심한 때는 언제였나.
ㄴ 음, 시작은 중학교 때? 연습장으로 3권 정도의 만화를 재미삼아 그렸던 것 같다. 물론 친구들의 반응도 좋았고. 이게 내 길인가? 싶었다. 이 나이 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경험을 하는 것 같다. 아쉽게도 당시는 만화과가 없어서 미술을 전공하고 그 나이 때 겪는 방황을 잠시 했다. 만화를 하면서 행복했음에도 의심을 했던 건데, 웬걸, 공모전에 당선이 됐다! 이게 내 길이였던 거구나, 신의 계시를 받은 것 같았다.

   
▲ '황비의 향낭' ⓒ봄툰

출판 만화 작가에서 웹툰 작가가 되었다. 간단한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ㄴ 오, 예리하신 질문이다. 쉽지 않았다. 기존의 내가 쌓아놓았던 모든 걸 뒤엎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부담감. 과거지향형 인간이 미래형인간으로 탈바꿈해야 했고, 시스템과 정서 등 모든 게 내가 알았던 것과 달랐다. 물론 두려웠고, 기존의 내가 갖고 있는 걸 버리기도 쉽지 않았다. 각오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다 '불멸'이라는 타이틀의 우리나라 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웹툰 작품을 의뢰받게 되었는데 의의가 맘에 들었다.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웹툰 데뷔 후에는 기존 활동과 어떤 차이를 느꼈나.
ㄴ 많이 어설프고 부족했음에도 그나마 좋게 봐 준 독자님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재미 외에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는지 집중해준 독자님들께 큰절을 드린다. 무던히도 두려웠던 것에 한 걸음 용기를 낸 나에게도 잠시 토닥토닥 해 주고 싶다.
아직도 웹툰 시스템에 대해선 익숙지 않다. 리듬이 상당히 빠르고 지옥 같은 마감 스케줄도 만만치 않다. 물론 여전히 낯설고 우왕좌왕하겠지만 익숙해져야 한다고 최면하고 있다.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쌓였다. 하지만 포기만 하지 않으면 점점 더 좋아지겠지라고 또 최면을 걸고 있다.

   
▲ '황비의 향낭' ⓒ봄툰

작품 창작 환경 자체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ㄴ 정말 공부하는 느낌이었다. 고3때도 이 정도의 스트레스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워낙 아날로그형 인간이라 과거만 좋아하다 보니 장비 구입에서부터 프로그램까지 어느 정도 환경이 주어질 때까지 상당한 돈과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디지털에 대해 조금은 편함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주변이 조금은 쾌적해졌다 정도? 먼지, 톤 가루, 지우개가루 등, 탈가루 하게 해 준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그 외에 좋은 점은, 글쎄? 디지털이어도 퀄리티에 대한 시간과 공은 단축시키지 못 하는 듯하다. 모든 게 디지털화 되는 세상이지만 정서까지도 단축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

'황비의 향낭' 서사 구성의 계기라면.
ㄴ 평소에도 조선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가장 격동기였던 구한말 사건들에 흥미가 있었다. 그러던 중 실종 된 조선황실의 숨겨진 비자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눈이 번쩍! 저걸 찾아내서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 뭐 이런 단순한 상상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른바 '고전 로맨스'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을 그렸다. '황비의 향낭' 또한 소재 면에서 기존 작품들과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도 사실인데.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이전과는 어떤 변별점이 있는지.
ㄴ 물론 현대라는 점이다. '고전 로맨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한 번쯤 현재를 다뤄보고 싶었던 마음이랄까? 무엇보다 이 소재는 현대가 흥미로울 듯 싶었던 것도 한몫했다. 힘들고 팍팍한 일상,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로 잠시 부자가 되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보길 바란다.

'황비의 향낭'은 조선 왕조를 소재로 삼았다.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고전'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황비의 향낭'을 통해 특별히 전하고 싶었던 조선 왕조의 일면이 있을까.
ㄴ 조선황실에 관심이 가는 것은 우리나라의 어느 왕조보다 가장 드라마틱하고 격동적인 사연을 품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어느 나라의 마지막 왕조도 자국의 뜻으로 사라진 것이지 외세에 의해 사라진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아련하고 미련이 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 '황비의 향낭' ⓒ봄툰

주인공 '황비'는 포르노 시나리오 작가다. 이채로운 설정인 만큼 눈에 띈다. 직업에 귀천을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나, 황비는 포르노 시나리오 대신 다른 작업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황비의 현재는 녹록치 않은 생활에서 비롯된 고난인 것 같다. 후에 생활고를 면한 '황비'가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쓰는 것도 볼 수 있을까.
ㄴ 제대로 보셨다. 여주인공 고황비는 정식 드라마 작가가 되는 게 꿈이다. 재밌는 로맨틱 코미디드라마를 쓰고 대박 나서 유명작가가 되는 게 바람인 평범한 여인이다. 이준과 잘되면 꿈꾼 대로 자신의 경험을 써서 드라마가 되고 대박나지 않을까? 쓰고 보니 이건 왠지 내 바람인 것 같다. (웃음)

   
▲ '황비의 향낭' ⓒ봄툰

'황비의 향낭'에서 주목하고 보면 더 즐거울 만한 것이 있다면.
ㄴ 황비의 향낭은 두 남녀가 보물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인 만큼 이준과 고황비의 귀여운 관계설정에 중점을 두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닌 여자를 고릿적 할머니의 유언으로 신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남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여자를 사랑하고 만 자신, 이건 할머니의 저주라며 부단히도 바둥대지만 결국 달콤한 운명은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 외에 해외에 떠도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가져 주었으면 한다.

'황비의 향낭'을 연재하며 즐거운 점은.
ㄴ 남여주인공의 투닥거리며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다. 첫눈에 알아보고 직진하는 건 취향에 안 맞아서….

'황비의 향낭'은 2차 콘텐츠로도 제작이 가능할 것 같다. 혹 2차 콘텐츠화를 바라는 매체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ㄴ 외람되오나 드라마? (웃음) 장르가 중요하온지요. 그저 된다면 가문의 영광이옵지요. 그런 기회를 하늘이 주신다면 대대로 보은하겠사옵니다~

   
▲ '황비의 향낭' ⓒ봄툰

'황비의 향낭'은 '기' 또는 '승'에 접어들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아직은 이르지만, 차기작에 대해서 물을 수 있을지.
ㄴ 여전히 역사에 대한 얘기를 할 것 같다. 황비의 향낭 자료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흥미로운 점 하나. 역시 드라마틱하고 격동적인 것에는 헤어나올 수 없나 보다. 조선제국 마지막 황실의 가족사에 대한 얘기를 준비 중이다.

만화가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ㄴ 중견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동안 좀 더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다. 지금보다 더 열정 있게 작품에 임했으면 좋겠고 부족하더라도 배우고 노력하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팬들에게 한 말씀.
ㄴ 뜻있게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냉혹한 얘기지만 만화는 재미가 먼저다. 하지만 재미 외에 가려진 뜻을 알아봐 주시는 게 그저 더 고마울 뿐이다. 앞으로도 재미와 의의를 함께 담은 작품으로 찾아가고 싶다.

문화뉴스 김미례 기자 prune05@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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