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250주년을 맞이한 악성 베토벤의 삶과 음악 이야기
불행을 딛고 일어선 악성 베토벤

[문화뉴스 MHN 박한나 기자] 한 분야에서 성인으로 불리는 일은 분명 쉽지 않다. 악성(樂聖) 루트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의 발자취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케 하는 별칭이다. 

올해는 베토벤이 세상의 빛을 본지 250주년이 되는 해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의 꿋꿋하게 자신을 음악은 이어왔던 베토벤의 일생과 작품에 대해서 알아보자.

요제프 칼 슈타이어가 그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초상화(1820)

 

베토벤은 1712년, 독일의 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를 위해 궁정의 테너 가수 출신인 아버지 요한은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가 되어 베토벤을 가르쳤다.  또한 궁정 오르간 주자와 친척을 통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우게 한 것이다. 

많은 연주로 당시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 4개월, 즉 8살이었다. 다시 말해 아들 베토벤의 재능을 팔며 살았던 것이다.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은 빈이었다. 모차르트는 이미 죽었지만 하이든은 건재했고, 음악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재력과 취미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본에 싫증을 낸 베토벤은 하이든에 의해 정식 입문을 결심하게 된다. 여러 백작들과 후작의 주선으로 살롱을 비롯한 빈의 사교계에 드나드는 편의도 주어졌다. 빈 유학은 이와 같은 유리한 조건으로 실현되었으나, 주위의 악풍은 아직도 보수적이어서 신참 청년 음악가가 인정받기에는 높은 벽이 있었다. 이에 점입가경으로 스승인 하이든도 베토벤을 돌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무명에 가까운 작곡가들에게 지도를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베토벤의 형제들은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 했던 초기의 습작들(베토벤 전기 작가인 세이어(Thayer)는 바가텔 집 작품 33과 가곡 작품 52개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1795년 3월 베토벤은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 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이해부터 「교향곡 제1번」,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완성되는 1800년까지를 3기로 분류하는 그의 창작가의 제1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이 시기에는 「7중주곡」 Op.20, 6곡의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 Op.18(모두 1800), 피아노 소나타 「비창」(1798) 등의 중요 작품이 작곡되었다. 어느 것이나 전통적인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도처에 보이는 창의는 이미 거장의 장래를 암시하고 있다.

1812년 「교향곡 제7번」(교향곡)의 초연은 보기 드물게 대성공이었는데, 이것은 동시에 상연된 묘사 음악 「웰링턴의 승리」(일명 ‘전쟁 교향곡’)가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에 들끓는 빈 시민에게 열광적으로 환영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세속적 명성은 이렇게 빈 회의에 걸친 반동기(反動期)에 크게 높아졌지만, 그 창작 활동은 절망적인 침체에 빠져 있었다.
 
귀는 이미 들리지 않아 연주 활동은 불가능했으며, 일상의 대화조차 글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그를 배반하였고, 보호자였던 귀족들도 몰락하거나 이주하기도 해서 물질적 궁핍도 매우 심했졌다. 유일한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은 올뮈츠의 대사교로 취임하자, 그의 생애를 엄습한 제 2의 위기를 타고 넘어 절망의 골짜기에서 기어오르려면 뭔가 실마리가 필요하였다. 그때 대공의 대사교 취임식을 위한 「장엄 미사(성악곡)」(1822)은 베토벤의 절망 끝의 희망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출처 Pixabay

그는 미사 완성에 애를 썼다. 결국 취임식에는 연주되지 못했지만 그는 총보의 첫머리에 ‘마음에서 또다시 마음으로 가리라’라고 적고 대공에게 바쳤다. 미사와 병행해서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Op.109, 110을 비롯한 작품은 쉽게 돈 마련이 되지 않았으며, 부랑자로 잘못 알고 유치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마침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교향곡의 의뢰가 있었다. 이전부터 구상한 새로운 교향곡이, 본 시대부터 품고 있었던 실러의 장편시 『환희에 부쳐 Ode to Joy』 음악화의 소망과 결합하는 기회에 이르렀다. 최후의 대작, 교향곡 제9번 「합창」(교향곡)(1824)은 이렇게 해서 실현된 것이다.

베토벤은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나 음악 사상에 남긴 공적을 생각하더라도, 전무후무의 음악가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향곡,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이나 독주 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 기악곡 영역에서의 작품은 그의 별칭이 '악성'인 이유를 설명한다. 베토벤 이후의 음악가로서 기법이나 규모면에서 그를 능가하는 작품을 쓴 사람은 적지 않은데, 바그너나 브람스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드뷔시나 라벨처럼 베토벤과는 이질의 아름다운 울림을 찾아내고, 완벽하게 다듬어 간 음악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타오르는 듯한 정의감에 기반한 엄격한 도덕성을 그만큼 음악으로 일관시킨 예술가는 그전에나 뒤에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존경했던 J. S. 바흐나 모차르트조차도 이 점에서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또 그가 생활한 사회의 건전성마저 나타내고 있다. 나폴레옹에게 바치려 했던 「영웅」으로 시작되는 작열적인 제2기는 새로운 시민 사회에의 빛나는 희망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어지는 빈 회의의 반동기는 그의 창작의 침체기였으며, 「합창」(교향곡)을 포함한 제3기는 최후의 저항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Pixabay

"불행은 이상한 것이다. 불행을 말하면 점점 더 커진다. 그 원인과 그것이 미치는 범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만이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이 된다."라는 베토벤의 명언이 있다. 어느 하나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위한 제대로 된 꽃길은 그의 인생에 없었지만,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들의 음악으로 하여금 그의 삶이 불행이 아닌 음악을 위한 삶이었음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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