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72주년

출처=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사람들

[문화뉴스 MHN 노푸른 기자] 오늘은 4월 3일, 72년 전 1948년,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당시 제주도에는 6만 여 명이 살고 있었으며 일본이 패망하기 전, 일본 경찰들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 후 미군정이 들어오고 제주도는 냉전 구도의 희생자가 된다.

해방 이후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지역마다 설립되었고, 제주도에도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당시 제주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의 도움을 받으며 제주도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에서 미군정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미군의 쌀 공출 제도 실패로 인해 쌀 가격이 폭등하면서 제주도민의 불만은 커졌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의 분노가 터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3.1절 기념대회가 열리던 날, 어린아이가 미군의 기마경찰에 치여 다치게 되는데, 미군이 그대로 두고 지나치자 분노한 군중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그러나 무장경찰이 이에 총격을 가했고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도민은 민,관 총파업을 실시한다. 그러나 미군정은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보고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갔다. 이후 제주도 탄압이 시작되었고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5.10 남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좌파와 우파 진영으로 갈려 있었는데, 제주도 내 좌익 진영(이하 남로당)은 단독 선거를 막을 명분으로 제주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무장대는 도내 12개 경찰서와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이에 미군정은 제주도 파병 명령을 내렸으나 9연대는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무장대 측과 만나 4.28 평화협상을 채결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미군정의 무력 진압 방침 결정으로 깨졌다. 평화협상 직후 5월 1일, 우익 청년들이 저지른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이 발생하나, 미군정은 이를 "폭도들이 저지른 행위"라며 조작했다.

이에 무장대는 거부 투쟁을 전개하며, 다수의 주민들이 동참했다. 그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유일하게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미군정은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여 토벌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선거는 조작되어 이승만 정부의 승리로 끝나고, 이승만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해안선 5km 이내 중산간지대를 동행하는 모든 사람을 총살하겠다'며 '초토화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무차별 학살이 행해졌고, 4.3사건 전 기간 동안 대략 3만 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출처=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심문을 받기위해 대기 중인 수용자들

4개월 간 진행된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잃어버린 마을'이 수 십 개에 이르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한 피난민은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로 보내졌다. 

지옥같던 시간은 1954년 9월 한라산이 개방되면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1980년대 이후 진상규명을 위해 각계의 노력이 진행되었고 2000년 1월에 '4.3특별법'이 공포되고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념과 국가권력에 의해 수 만 명이 학살된 제주 4.3 사건, 시간을 거슬러 안타까운 희생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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