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띠에(CARTIER)의 시작과 지금, 창립자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Louis Francois Cartier)'
까르띠에 시계, 팔찌, 향수
까르띠에의 역사, 디렉터와 CEO

 

사진출처=까르띠에

 

[문화뉴스 MHN 윤승한 기자] 까르띠에(Cartier)는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1847년에 설립하였고 주얼리를 비롯한 손목시계, 향수, 필기구, 안경 등을 제조 · 판매하는 프랑스의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다.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Louis Francois Cartier)/사진출처=까르띠에

 

까르띠에'CARTIER)의 시작

1819년, 창립자인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Louis Francois Cartier)는 프랑스 파리에서 화약통 제조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보석 세공자 아돌프 피카르의 아틀리에에서 견습생활을 시작했다.

29살이 되던 1847년에 아돌프 피카르가 죽자,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그의 스승이 운영하던 아틀리에를 인수했다.

자신의 성을 따 ‘메종 까르띠에’로 이름을 변경했다. 또한 자신의 이름 앞 글자인 L과 C로 둘러싸인 하트와 마름모꼴 문양을 자신의 홀 마크로 제작해 프랑스 상업등기소에 등록했다. 이것이 ‘까르띠에’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마틸드 공주/사진출처=까르띠에

 

마틸드 공주의 지원과  알프레도 까르띠에

1850년대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즉위한 후 비로소 활기를 되찾았다. 프랑스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 이래 찾아온 사회적 안정기를 향유하며 파리 곳곳에서 호화로운 파티와 무도회를 즐겼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메종 까르띠에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프랑스 왕족 및 귀족들은 연회 치장을 위해 화려한 고급 주얼리를 자주 착용했고 메종 까르띠에의 수요도 함께 상승했다.

1856년,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이자 프랑스 사교계의 트렌드세터였던 마틸드 공주가 메종 까르띠에를 방문했고 섬세한 장식이 덧붙여진 제품에 매료되었다. 메종 까르띠에는 마틸드 공주의 입소문으로 프랑스 사교계에서 인기 있는 보석상이 되었다.

1850년대 말 메종 까르띠에는 마틸드 공주의 지원으로 프랑스 왕실의 공식 주얼리 납품업체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1859년, 파리 상류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대로 9번가로 매장을 확장 이전했다. 이후 마틸드 공주의 소개로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유지니 황후가 루이 프랑수와 까르띠에에 보석 세공을 의뢰하면서 메종 까르띠에는 유명세를 얻었다.

1872년, 메종 까르띠에가 가업 형태로 되길 원했던 루이 프랑스와 까르띠에는 그의 아들인 알프레드 까르띠에에게 보석 세공을 가르쳤고 1874년에 알프레드 까르띠에에게 완전히 경영권을 물려준 후 은퇴했다.

 

 알프레도 까르띠에와 그의 세 아들

 

알프레도 까르띠에와 그의 세 아들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물려받은 후에도 메종 까르띠에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898년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메종 까르띠에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기 위해 그의 세 아들인 루이 까르띠에, 피에르 까르띠에, 자끄 까르띠에에게 보석 세공과 경영을 가르쳤다.

이듬해인 1899년,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파리 고급 패션의 메카인 라 빼 거리 13번지로 메종 까르띠에를 이전했고 ‘알프레드 까르띠에와 아들들’로 이름을 변경한 후 세계 시장으로 사업을 넓혀나갔다.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가장 사업에 재능을 보였던 첫째 루이 까르띠에에게 프랑스의 본사 관리를 맡겼고, 둘째 아들인 피에르 까르띠에를 러시아의 유명 보석 세공사였던 ‘칼 파베르그’ 가 있는 곳으로 보내 해외 시장의 진출 기회를 엿보았다.

 

영국 뉴버링턴 가에 있는 까르띠에 영국 지사의 초기 모습/사진출처=까르띠에

 

1902년,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막내인 자끄 까르띠에를 영국으로 보내 뉴 버링턴가에 지사를 설립했고, 1906년부터 자끄 까르띠에에게 런던 지사의 경영을 맡겼다. 같은 해, 알프레드 까르띠에와 아들들이라는 회사명을 ‘까르띠에 형제’로 변경하고, 해외 매장 확장도 지속해갔다.

1909년, 자끄 까르띠에는 런던 뉴 본드 거리에 두 번째 영국 지사를 개설했고, 피에르 까르띠에는 뉴욕 5번가에 미국의 첫 번째 지사를 설립했다. 1910년에 까르띠에 형제들은 러시아 모스크바와 페르시아만에 매장을 열었다.

1902년, 알프레드 까르띠에와 아들들은 영국의 알렉산드라 여왕으로부터 그 해 진행될 에드워드 7세 대관식을 위한 27개의 왕관 주문을 받았다. 알프레드 까르띠에와 아들들이 제작한 왕관은 알렉산드라 여왕의 인정을 받았고, 이로 인해 알프레드 까르띠에와 아들들은 1904년 에드워드 7세의 공식 보석 납품업자로 임명되었다.

 

알베르토 산토스-뒤몽

 

산토스 데 까르띠에

1902년, 시계 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 까르띠에는 친구이자 비행사였던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을 위해 ‘산토스-뒤몽’을 개발했고 이는 까르띠에가 고안한 최초의 시계가 되었다. 남성들을 위한 손목시계는 유통되지 않았던 당시 산토스-뒤몽은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이 조종기에서 손을 떼지 않고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고안된 시계였다.

이후 1906년, 베젤이 술통모양인 ‘토노’를 개발했고, 1907년에는 스위스의 시계 메이커인 에드몽 예거와 무브먼트에 대한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다.

1911년 루이 까르띠에는 산토스-뒤몽 손목시계를 ‘산토스 데 까르띠에’ 컬렉션으로 발전시켜 시장에 론칭했고, 출시와 함께 독특한 디자인의 산토스 데 까르띠에는 좋은 호응을 얻었다.

 

 

팬더를 모티브로 해 제작된 여성용 손목시계(1914년)

 

팬더

1914년, 루이 까르띠에는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코코 샤넬’의 소개로 연인이 된 쟌느 투생을 위해 ‘팬더’라는 여성용 손목시계를 디자인했다. 이 손목시계는 보석으로 구현된 팬더 장식이 특징적이었으며, 이후 팬더 장식은 까르띠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주 활용되었다.

 

 

초기 뉴욕 5번가에 있던 뉴욕지사의 모습

 

까르띠에 S.A

1917년 뉴욕지사장으로 있던 피에르 까르띠에는 미국의 금융가인 모턴 F. 플랜트의 빌딩을 사들여 뉴욕 지사를 5번가로 이전했다. 

루이 까르띠에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당시 활약한 프랑스의 르노 탱크에서 착안해 시계 디자인 연구를 시작했고, 1919년 ‘탱크 워치’를 출시했다. 탱크 워치는 곡선을 배제하고 직선미를 강조한 시계로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 해 까르띠에 브랜드의 시계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유러피안 워치 & 클락 컴퍼니를 미국 뉴욕에 설립했다. 1921년 까르띠에 형제는 ‘까르띠에 S.A’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트리니티 링

 

트리니티 컬렉션

1924년 루이 까르띠에는 친구인 시인 ‘장 콕토’를 위해 반지와 팔찌로 구성된 ‘트리니티’ 컬렉션을 제작했다. 트리니티 컬렉션은 사랑, 우정, 신의를 뜻하는 핑크, 옐로, 화이트 등의 세 가지 골드로 된 세 개의 고리가 엮인 형태였다. 트리니티 컬렉션은 장 콕토를 통해 파리 상류사회에 알려졌고 당시 패션 잇템이 되었다.

 

 

까르띠에 최초의 크로노그래프 시계 '톡튀(Tortue)'(1928년)

 

1928년 ~ 1947년(피에르 까르띠에 퇴임)

1928년 까르띠에는 최초의 크로노그래프 시계인 ‘톡튀’를 출시했고, 이어 탱크 시리즈를 잇달아 선보였다.

1933년 루이 까르띠에는 쟌느 투생을 까르띠에의 주얼리 디자인 디렉터으로 영입했다. 쟌느 투생의 가능성을 알아본 루이 까르띠에는 그녀에게 보석의 세공과 세팅 기술 등을 전수했고, 까르띠에 브랜드의 보석 디자이너들에게 그녀를 조수로 쓸 것을 요청했다. 이를 통해 쟌느 투생은 점차 보석 디자인에 눈을 떴고 이후 까르띠에의 주얼리 디자인 디렉터가 되어 다양한 아이디어를 보석에 접목했다.

 

보석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인 ‘인비저블 세팅’

 

인비저블 세팅

이 시기 루이 까르띠에는 ‘인비저블 세팅’ 기법을 개발했다. 이는 보석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세공 기술이다. 루이 까르띠에는 이 기법으로 특허를 얻었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까르띠에 캐럿 오 드 퍼퓸/사진출처=까르띠에 홈페이지

 

향수 개발

루이 까르띠에는 향수병을 디자인해 제작하기 시작했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꾸준히 주문이 늘어나자 루이 까르띠에는 1938년 ‘까르띠에 향수’를 브랜드로 등록했다. 그러나 이듬해 제 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 발발하면서 향수 개발은 잠시 중단해야 했다.

피에르 까르띠에 퇴임

1942년 첫째 루이 까르띠에와 셋째 자끄 까르띠에가 세상을 떠나고, 1945년 그들이 맡고 있었던 까르띠에 S.A. 파리 본사와 뉴욕 지사를 둘째인 피에르 까르띠에가 맡게 되었다. 또한 셋째인 자끄 까르띠에의 아들인 진 자크 까르띠에가 아버지를 대신해 까르띠에 S.A.의 런던지사를 이어받았다.

1947년 피에르 까르띠에가 경영에서 은퇴했다.

일반 투자자들의 경영권

1947년 피에르 까르띠에가 경영에서 은퇴한 후, 1948년 루이 까르띠에의 아들인 끌로드 까르띠에가 뉴욕 지사를 이어받고 피에르 까르띠에의 딸인 마리온 까르띠에가 까르띠에 S.A. 의 파리 지사를 맡게 됐다.

1962년 끌로드 까르띠에가 까르띠에 S.A. 뉴욕지사를 투자자들에게 처분했다.

1965년에는 둘째 피에르 까르띠에가 사망했고 다음 해 마리온 까르띠에가 까르띠에 S.A. 파리지사를 여러 투자자들에게 판매하면서 가족 경영 형태로 운영되던 까르띠에S.A. 지사들은 런던지사를 남겨두고 모두 일반 투자자들의 경영 아래로 들어갔다.

1974년과 1976년 까르띠에 S.A.의 파리지사가 런던지사를 매입했고, 조셉 카누이가 소집한 다른 투자자 그룹이 뉴욕지사를 사들여 경영권을 로버트 오끄에게 위임시켰다. 1979년 분할되어 있던 까르띠에의 경영권을 하나로 통합 관리하기 위해 까르띠에의 지주회사인 ‘까르띠에 몽드’가 설립되었다. 그 해 자동차 사고로 로버트 오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조셉 카누이가 까르띠에 몽드의 CEO로 선출되었다.

까르띠에는 1980년대에 까르띠에 몽드의 관리하에 상품 영역을 확장해갔다. 1981년 까르띠에 몽드는 레스 머스트 드 까르띠에를 산하 브랜드로 합병한 후 최초의 자사 브랜드 향수인 ‘머스트 드 까르띠에’를 출시했다.

2000년부터 까르띠에 몽드의 인터내셔널 마케팅 담당자로 까르띠에에 합류했던 베르나르 포르나스가 2002년 회장 겸 CEO 로 영입됐다.

 

 

발롱 블루 드 까르띠에

 

까르띠에 몽드의 시계

2004년 까르띠에 몽드는 산토스 드 까르띠에 손목시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산토스 100, 산토스 드모아젤, 산토스-뒤몽을 선보였고, 2005년에는 난초에서 영감을 받은 주얼리 컬렉션인 ‘까레스 드 오키데 까르띠에’를 출시했다. 그 해 본사가 있는 프랑스 파리의 라 빼 거리 13번지 매장에서 향수를 개인 취향에 따라 주문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7년 푸른색의 다이아몬드가 들어가 있는 ‘발롱 블루 드 까르띠에’ 시계가 출시되었다.

 

 

스타니슬라스 드 케를시즈/출처=네이버

 

 

스타니슬라스 드 케를시즈

2013년 리치몬드 그룹의 자회사 중 하나인 반클리프&아펠의 CEO였던 스타니슬라스 드케르시즈가 까르띠에 몽드의 회장 겸 CEO로 취임했다.

까르띠에'CARTIER'의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이익은 저조하다. 주요 판매처인 면세점의 지난 3월 매출이 연초 대비 90% 이상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시계·주얼리업계 부동의 1위인 까르띠에의 롯데면세점 소공점 매출은 1월 74억원대에서, 3월 1억 4000만원대로 줄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답게 까르띠에는 프랑스 사회 공헌 차원에서 코로나19 항체 신속진단키트를 국내 수젠텍으로부터 구입해 프랑스 정부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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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스토리] 프랑스의 명품 주얼리 브랜드, 까르띠에(CARTIER)의 시작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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