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백성을 위해 대동법을 시행한 왕, 실제 역사는 다르다
명나라 파병도 실제 역사와는 차이가 있다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스틸컷

[문화뉴스 MHN 권성준기자] 조선 역사상 반란으로 폐위된 왕은 딱 3명이 있다. 자신의 숙부 수양대군의 야욕으로 억울하게 왕위에서 밀려난 단종, 이견의 여지가 없는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 그리고 아직도 평가가 엇갈리는 광해군 이렇게 세 명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 시절 '승정원일기'에서 기록되지 않은 15일을 가지고 만든 팩션이다. '광해군일기'에는 이에대해 "숨겨야 될 일들은 조보에 내지 말라 이르다"라는 명을 내렸다고 기록되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과 똑같이 생긴 얼굴로 인해 갑자기 쓰러진 광해군을 대신해 왕의 역할을 하는 하선의 모습으로 마치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가 떠오르는 전개를 보여준다.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스틸컷

영화 초반 광해군은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점점 난폭해져가기 시작한다. 실제로 역사에서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견제와 영창대군의 존재로 인해 생긴 의심병이 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와 달리 임시 조정인 '변조'를 설치해 왜군과 맞서 싸웠으며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조선 역사에서 전쟁터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국왕은 광해군을 제외하면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정종뿐이었다.

적과 민심을 모두 가진 광해군은 굳건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조를 상왕으로 올리고 국왕으로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이 세자일 때부터 시기하였다.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스틸컷

영화 속에서 광해군은 허균에게 자신을 대신해 위협으로부터 미끼 역할을 해줄 일종의 대역을 찾을 것을 지시하고 허균은 광해군과 똑같이 생겼으며 기방에서 만담을 나누는 일을 하던 하선을 찾게 된다.

그렇게 궁에 끌려간 하선은 영문도 모른 채 왕의 대역을 하게 된다. 다행히 하선은 타고난 연기력과 말솜씨로 왕의 역할을 잘 연기해낸다.

그런데 갑자기 광해군이 의식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허균은 광해군이 쓰러진 사실을 숨기고 치료를 받는 동안 하선에게 왕의 대역을 연기할 것을 요구하고 하선은 하루아침에 조선의 국왕이 되어버린다.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스틸컷

허균과 조내관의 도움으로 국정을 다스리는 법에서 볼일을 보는 일까지 왕의 행동에 대해 교육을 받는 하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로 왕이 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왕권과 안위만을 신경 쓰던 광해군과 달리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하선의 모습은 궁을 술렁이게 만들었으며 허균은 광해군에 대한 충성심과 조선의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심지어는 하선의 정체를 모르지만 정체와는 상관없이 하선을 지지하는 인물들마저 등장하게 된다.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스틸컷

작중에서 하선은 허균과 조내관으로부터 대동법의 필요성을 배우게 되고 대동법을 시행하려 하자 대동법은 차별이라는 신하들의 반대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자 하선은 "백성들은 스스로 노비가 되고 기생이 되는 판에 기껏 지주들 쌀 한 섬 때문에 차별 운운한단 말이오"라며 분노하며 대동법을 시행한다.

하지만 대동법 시행에 관한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상과는 전혀 다름이 밝혀졌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의 세금에 관련된 법으로 기존에는 지역 특산물로 바치던 세금을 전부 쌀로 내도록 하는 제도이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재해 같은 요인으로 특산물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경우 상인이 대신 특산물을 나라에 납세하고 나중에 그 대가를 백성에게 몇 배로 가중하여 받아내는 방납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방납 제도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은 커져만 갔고 조선의 대표적인 폐단 중 하나가 되었다.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스틸컷

대동법은 선조 대에 논의되었으며 임진왜란을 계기로 시범 시행되다 결국 광해군 대에 실시된 제도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광해군은 대동법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에 수동적인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확대 시행에는 반대하였다. '광해군일기'에는 "송나라의 신법이 결국에는 구제하기 어려운 재앙이 됐다."라는 발언이 기록되어 있으며 두 차례나 폐지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실제 역사에선 대동법의 전국 확대 시행은 신하들에게서 제기된 주장이었으며 광해군은 오히려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 등을 재건하였으며 이를 위한 비용에 차질이 생길 수 있어 대동법을 반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극 중에선 대동법 시행을 두고 신하들과의 갈등이 생기며 달라진 왕의 모습에 궁궐의 모두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스틸컷

결국 신하들과 하선의 갈등은 명나라 파병 안건을 두고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이 장면은 대한민국 영화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유명하며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소중하오."라는 대사를 남겼다.

광해군 시기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고 후금의 황제 누르하치는 명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광해군은 강홍립을 보낸다.

하지만 강홍립은 '부차 전투'에서 후금에게 패배하여 조선군의 2/3을 잃고 주요 지휘관마저 전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강홍립은 후금에게 항복하게 되고 광해군은 후금에 의도하지 않은 파병임을 해명하였다.

이러한 중립 외교에 서인 세력들은 "후금에게 사대를 하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을 도와주었는데 이를 배신하는 것"이라며 반발하였고 인조반정의 기폭제가 되어 버린다.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스틸컷

영화상에선 인조반정의 내용까지 나오진 않는다. 명나라 파병에 대한 장면 이후 광해군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실제 고증 부분에서는 이런저런 비판이 나오는 '광해, 왕이 된 남자'지만 특유의 스토리 구성과 심금을 울리는 장면으로 인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한국 영화 흥행 역대 8위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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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고 싶소' 사라진 15일과 광해군,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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