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진학조차 포기해야 했던 소년...교장선생님의 격려와 굳은 다짐
화강암의 질감을 표현한 마티에르와 사다리꼴로 도식화 된 인물표현
세계적 스타일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마침내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양구군립 박수근 미술관의 전경

[문화뉴스 MHN 최도식 기자] 박수근 화백은 가난과 시대의 아픔 속에서 어린 시절 소망했던 화가의 꿈을 소중히 지켜냈다. 마침내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지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소년의 꿈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한 박수근 화백은 초등학생 때 밀레의 '만종'을 처음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소년은 미술가로 성장하기 위한 탄탄대로의 길을 걸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행은 일찍 찾아왔다. 어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미술대학은 커녕 중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박수근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졸업하는 그에게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독려했다.

만약 교장 선생님의 격려가 없었다면 지금의 박수근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소년은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고난들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박수근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미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산과 들로 다니면서 연필스케치와 수채화를 연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박수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 근대 미술 거장들이 모두 일본 유학을 통해 엘리트 미술코스를 밟았던 데 반해 시골 소년은 산에서 사생(寫生)을 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그러나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뜨거운 열정은 이미 소년 시절부터 키워왔던 굳은 의지에 기인한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미술은 여유와 안정의 공간이 아니라 매순간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전개되었다. 그렇게 밥벌이와 미술을 병행하던 시골 미술학도는 조선미술의 중심인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할 뜻을 세운다.

천천히 한 걸음씩

박수근은 1932년에 18세의 나이에 시골의 봄을 그린 '봄이 오다'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게 된다. 선전에서의 입상은 그에게 큰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3년 출품작이 낙선하였고 절치부심하여 1935년에 다시 출품하지만 또 낙선하게 된다.

더욱이 이 시기에 가난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공중 분해되는 지경에 처했다. 홀로 춘천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그려가며 1936년에 또 한번 선전에 출품해 두번째로 입선을 거두게 된다.

이후 서울로 진출해 16, 17회 선전에서 연거푸 입선했으며, 어렵게 구한 유채물감으로 유화를 처음 그리게 된다. 그는 24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유화를 그렸다. 재밌는 점은 그가 남긴 대표작들이 모두 유화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박수근 그림의 특징은 유화를 덧발라 만들어낸 마티에르 효과이다. 기름을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 물감을 캔버스에 도포한 뒤 이것을 말리고 다시 덧바르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화면의 거친 질감을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마치 화감암 위에다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담황색 위에 촘촘한 입자들이 박혀있는 듯한 표면은 이 그림이 박수근의 그림임을 단박에 알 수 있게 하는 고유한 시그니쳐이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박수근 화백

투박하면서도 세련된 예술세계

1950~60년대 한국미술은 프랑스에서 발원한 엥포르멜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표면을 거칠게 표현한 마티에르 역시 엥포르멜 회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박수근의 독창적인 '화강암 마티에르'는 서양인들에게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대표적으로 주한 미국 외교관의 부인 마가렛 밀러 여사는 박수근 그림의 애호가이다.

토속적인 마티에르의 표현과 함께 대상을 단순화시켜 그리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당시에는 대상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추상회화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김환기, 유영국 등이 해방정국에서 '신사실파'를 결성해 자연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박수근의 작품들 역시 나무와 강, 시골집, 그리고 시골 아낙네들의 모습을 단순화하고 도형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다. 빨래를 하는 아낙들은 사다리꼴의 형상을 한 채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다.

특히 사선으로 그려진 등의 윤곽선은 사다리꼴이라는 도형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토속적으로만 보이는 그의 회화 속에는 트렌디한 현대회화의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비록 독학으로 공부를 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출해냈던 것이다.
    
박수근은 유명화가가 된 후에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을 식지 않았다. 6.25전쟁으로 가족들과 헤어져 군산에서 부두노동을 할 때도 그림을 그렸다.

43세의 나이에 재산을 털어 준비한 대작이 낙선하자 큰 충격을 받고 처음으로 술에 손을 대기도 했다. 작품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는지 크게 낙담한 박수근은 술에 의존하며 건강을 해쳤고 51세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가 보여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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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거장] 박수근, 소중히 간직해 온 어린 시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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