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문신...그의 예술세계와 인생
조각가 문신에게 예술적 원천을 제공한 마산 추산동의 추억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창작혼을 불태운 조각가

작품 후면 패널에 조각가 문신의 얼굴

[문화뉴스 MHN 최도식 기자] 프랑스에서 높은 명성을 쌓았던 조각가 문신은 귀국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미술관을 짓기 시작했다. 야외 바닥 타일까지 본인이 직접 작업한 이 미술관은 자신을 화가로 길러준 마산에 바친 그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버지의 고향 마산

1923년에 출생한 조각가 문신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혼혈이었다. 일본에서 출생했으나 어린시절은 아버지의 고향인 마산 추산동에서 성장했다. 

조부모에게 맡겨진 문신은 추산동 산동네에서 산과 바다를 보며 화가로서의 감성을 키워갔다. 특히 집에서 내려다 본 마산앞바다는 그의 회화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출처: 픽사베이, 마산앞바다의 전경

그가 조각가로 전향하기 전에 그린 그림들 중에는 마산앞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여럿 발견된다. '어부들', '아침바다', '마산앞바다' 등의 작품들은 모두 고향의 바다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작품들이다.

특히 1948년에 창작된 '어부들'은 횡으로 넓게 펼쳐진 캔버스 위에 반나체로 작업하는 어부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태초성과 원시성이 느껴진다. 

누드의 인물 군상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처럼 서양의 종교벽화에서 발견된다. 인간을 누드로 묘사하는 표현은 순수성을 강화시켜주면서 동시에 원시적인 감각을 느끼게 한다. 

문신은 나체의 어부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신이 자란 마산앞바다를 태초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문신의 조각 작품들 역시 마산에서의 체험에 기인한 것이다. 문신 조각 작품은 좌우가 대칭인 시메트리 기법을 특징으로 한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시절 한 기자가 시메트리 기법의 원천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어린시절 봐왔던 동식물들의 대칭성에서 시메트리가 기인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처럼 조각가 문신의 예술세계는 마산 추산동에서의 추억을 빚지고 있다. 1980년에 귀국한 그가 마산에 기증할 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해 14년을 매달린 것은 어쩌면 예술적 부채를 갚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예술적 전환점이 된 프랑스

문신은 마산에서의 유년기를 마치고 16세에 일본으로 넘어가 미술을 공부한다. 그는 니혼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광복 후 마산으로 돌아온 뒤 줄곧 유화를 그려왔던 그가 조각으로 입문하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 경험한 일련의 상황들에 기인한다.

1950~60년대 전세계의 미술가들이 파리에 모여 '누보 에콜 드 파리'라는 화가 집단을 형성하는데 한국에서 역시 많은 화가들이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문신도 1961년 프랑스로 떠났다. 이국 땅에서 생계를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바로 라브넬 성(城)을 보수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일을 하면서 조각이 자신에게 더 맞겠다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귀국 후 다시 떠난 프랑스에서 조각가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는 1970년 프랑스 남부의 발카레스 해변에서 열린 국제조각심포지엄에서 발표한 '태양의 인간'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구형의 조각들을 쌓아올린 높은 기둥의 형상은 이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올림픽 1988'에서 다시 한번 재현된다. 아프리카산 아비동 나무로 만들어진 '태양의 인간'이 원시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데에 반해 스테인레스 스틸을 사용한 '올림픽 1988'은 현대적인 느낌을 살린 작품이다.  

올림픽이 끝난 이듬해인 1989년에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아 전 세계 24인의 조각가들 가운데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이처럼 조각가로 전향한 문신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무대에서 환영받는 작가로 널리 인정받았다.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제1전시관

마산을 사랑했던 예술가

1980년에 완전히 고국으로 돌아온 문신은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며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가 귀국한 진짜 이유는 마산에 미술관을 건립한 뒤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은 문신이 지은 2채의 미술관 건물에 시에서 추가한 1채의 건물이 더해져 총 3채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관 건물 뒷편의 정원

미술관 앞에는 야외 전시 광장이 있으며, 뒷편에는 마치 정원과 같이 아기자기한 공간들 속에 문신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신은 개인전 등으로 벌어들인 수입을 미술관 건립에 투자했다. 평소 '노예', '문신 25시'라 불릴 정도로 워커홀릭인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생동안 예술에 헌신한 그의 몸도 나이가 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1992년에 위암 초기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신은 더욱 더 불타는 예술혼을 보여주었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작품 창작에 몰입하고 있었다.

미술관 역시 인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야외전시장의 모습

1994년 드디어 14년의 결실로 탄생한 미술관의 개관식 행사 직전까지도 문신은 미술관 외벽을 칠하고 있었다.

사실 문신 미술관의 건립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미술관 부지 뒤편에 아파트 건립 계획이 세워지면서 시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마산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변함없었다. 미술관은 그의 유언에 따라 마산시에 바쳐졌다.

지금은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창원시의 소유가 되었지만 '마산문신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신의 마산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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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거장] 문신, 프랑스의 유명 조각가가 마산으로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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