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아마추어 출신의 복서에게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출전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 그런 아마복싱 백년사에 상징성있는 이 두 대회에 선발되고도 각종 난관을 만나 출전이 좌절된 비운의 복서 조용래, 박일천을 이번주 스포츠 산책 코너에서 소개해 볼까 한다.

먼저 소개할 복서는 현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활동중인 조용래다  1973년 마산 중앙체육관 유인구(경희대) 관장에게 복싱을 수학한 그는  난적 김광민(조선대)에 2연패를 당하는등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76년  마산공고 3학년때  비로소 대통령배와 전국체전 (라이트 웰터급)을 휩쓸며 학생무대 를 평정함과 동시에 최우수복서로 선정 기량이 일취월장한다   그해 12월 제30회 전국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아마복싱의 터줏대감으로  무려 6년동안 대표팀 간판복서로 아성을 구축한 박태식(육군)을 2회 절묘한 카운터로 한차례 녹다운을 탈취 하는등 주도권을 잡고 완승  성인무대 까지 접수하면서 자고나니 유명해졌다는 바이런의 어록처럼 하루아침에 한국복싱의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는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 조용래

 평소 표정 변화가 그리 크지않는 그도 이때만큼은 기쁨의 포효를 한껏 발산했다 당시 다소 밀리는 매치업 이라는 평가가 지배적 이었지만 전혀 주눅 들지않고 맹공 아마 복싱사상 최대의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177cm의 훤칠한 신장에 발진(發進)을 앞둔 함재기처럼 잘 정돈된 기본기와 함께  죽창처럼 날카로운 스트레이트로 무장한 신예 조용래에 의해   김사용(경희대) 김주석(중앙대) 김광민(조선대)등 역대급 복서들을 차례로  잡으며 국내 라이트 웰터급을 평정하며 올림픽 2회연속 출전에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 75년 태국 킹스컵 금메달에 이어 최우수복서로 선정된 한시대를 풍미한 금강불괴(金剛不壞)같이 견고하게 구축한 박태식의 복싱 신화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조용래는 복싱의 기본인 설계(폼.밑그림)부터 기초공사(체력)은 물론 인테리어(외모)까지 겸비한 그는 이후 한국 중량급의 미래라 불린다 하지만  조용래는 이듬해 경남대학에 진학하면서 호사다마 라는 불청객(不請客)이 찾아오면서 전열이 붕괴된다 오른쪽 팔꿈치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후 그는 77년 킹스컵 선발전에서 박남철(원광대)에 패한 것을 필두로  장상기(부산 국제체)와  난적 김인창(한국체대)에게 각각 패하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그후  웰터급으로 월장 78년 제2회 김명복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워밍업을 시작한 조용래는79년 난적 김수영(동국대)과 천갑수(한국체대)를 각각 RSC로 잡고 탄력을 받은후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선발전에서 79년 뉴욕 월드컵 동메달 리스트이자 1980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 리스트인 국가대표 간판 나경민(해태)을 격파하고 대표팀에 합류  부활에 성공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한국이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좌절을 맛본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라이트 미들급에서 터줏대감 박일천에 3연패 하면서 웰터급으로 체급을 하향 조정해 내려온 강타자 나경민이 조용래 에게 마져 참패하면서  영역 싸움에서 밀려나자 81년 5월 프로에 진출 이후 11연속 KO행진을 펼친후  83년 5월29일 동양 미들급의 무적함대 박종팔을 7회 KO로 잡으며 동양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하면서 방향전환에 성공한다. 

조용래 선수는 현재 대한복싱협회 심판으로 활동중이다.

한편 조용래는 수경사에 입대 제2의 전성기를 마치며 2년후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선발전(미들급)에서 에서 신준섭 (원광대) .이남의 (한국체대)등 정상급 복서들을  연달아 잡으며 승선에 성공했지만 이번엔 아시안게임 출전을 얼마 남기고  스파링도중 오른손 엄지에 골절상을 당하고  이남의 와 전격교체 된다 이후 배웅나온 후배 이해정(서울체고)에게 와이리 나는 운이없노! 라는 한마디를 던지고 눈물을 흘리며 퇴촌을 한다  한편 대타로 출전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 이남의 와  이를 지켜본 조용래 두복서의 묘한 희비 쌍곡선(喜悲雙曲線)이 펼쳐지면서 그것으로 천재복서  조용래의 복싱인생도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두 번째로 소개하는 복서 박일천은 한마디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복서다 조용래가 만19세에 태극마크를 달고 도약을 시작했다면  만20세인 1969년 뒤늦게 복싱에 입문한 박일천은 72년까지 서울 대표로 대통령배 대회에 출전하는등 6승4패를 기록한 평범한 복서였다 그후 특전사에 입대 36개월을 꼬박 채우고 75년 12월 재대를 했을 때 그의 나이 26살 권투선수로는 환갑에 다다른 늦은 나이였다  그는 홍순만 관장이 운영하는 영등포 체육관에 재입관하여 단45일만에 무려 11kg을 감량하며 76년 킹스컵 선발전에 출전 라이트 미들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편의 명작동화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서곡을 울린다  그리고 그해 치러진 몬트리올 올림픽 선발전(라이트 미들급)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박일천과 같은 체급에 출전한 임재근(태성체육관)이 쿠바의 롤단도 가르베이 에게 맥없이 2회 RSC 로 패한 장면을 지켜본 대한체육회 산하 해외파견 심의 위원회에서 한국 아마복싱에서 중량급은 세계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웰터급까지를 마지노선을 정하면서 결국 박일천은 승선에 실패한다 사실 박일천은 큰거 한방에 의존한 임재근과 달리 공수주 에서 균형을 갖춘 정통파 복서였다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라이트 미들급 금메달리스트 박일천

상심한 마음을 추스린 박일천은 김현호. 김만호 (이상 한국체대) 이홍근(동아대).이일수(육군) 임창일(충남)등을 제압하며 국내무대를 평정하며 기록적인 104연승의 대기록을 켜켜이 쌓은후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예비고사인 79년 뉴욕에서 개최된 제1회 뉴욕 월드컵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중량급에서 기념비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창출한  박일천은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어떤독에도 죽지않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의 높은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80년 대망의 모스크바 올림픽에 선발 되었지만 웰터급에 선발된 조용래와 마찬가지고 정치적 이해관계로 한국이 불참을 선언함으로서 2회연속 올림픽 출전의 꿈이 아침이슬 처럼 사라졌다.

박일천 선수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서 최우수 복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대표팀 출전 명단은 다음과 같다 .라이트 플라이급 장흥민(한국체대) 플라이급 김지원(수경사) 밴텀급 황철순(한국화약) 페더급 박태국(해태제과) 라이트급 김동길(한국체대) 라이트 웰터급 김인창(한국체대). 웰터급 조용래(수경사). 라이트 미들급 박일천(전매청) .미들급 박영규(원주복싱) .라이트 헤비급 이남의(한국체대). 헤비급 김창준(원주복싱).이 주인공 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박일천이 2회연속 올림픽출전이 좌절된 와중에도 심기일전 하여  방콕 아시안 게임 태국 킹스컵.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아시아 선수권을 재패하며 국제무대 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열정의 부산물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서는 최우수복서로 선정되었을 그의 나이 31세였다란 사실은 그가 수도승의 고행과 같은 자기수련을 통해 얻어진 값진 수확이란 생각이다. 또한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무너졌어도 절망하지않고 희망의 끈을 놓지않은체 평범을 비범으로 환치(換置)시키려 훈련에 전력투구 한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두 전직 복서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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