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황태자 박용운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1982년 7월 29일 문화체육관에서 뉴델리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최종선발전 첫날 경기가 열렸다 이대회는 1.2차 선발전 우승자와  3차 선발전 우승.준 우승자 4명이 12체급에 걸쳐 토너먼트 형식으로 승부를 가리는데 이대회 우승자는 11월의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에 한국 대표로 최종확정되며 2.3위 선수는 상비군으로 편성된다 금년초 1차 선발전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선수촌에서 훈련을 받으며 4월의 킹스컵과 5월의 뮌헨세계선수권과 10월의 제10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던 실질적인 대표선수들 이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이변의 연속이었다 킹스컵 대회 은메달 리스트이자 아시아 선수권대회 금메달 리스트 인 미들급의 이남의<한국체대>는 3차선발전 우승자인 조용래(수경사)에 판정패 탈락했다 또 라이트급의 이현주<목포대>도 고희룡 (동원전문대)에게 판정패 뉴델리행 티켓을 놓쳤고  페더급의 박기철(한국체대) 과 플라이급의 권채오 <한국화약>는 박용운 <부산 금성고>과  황동룡<군산체>전에서 힘겹게 판정승 판정 논란의 중심에 섰는데 이들이 선수촌에 입촌중인 선수들이기 때문에 판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당시 신문기사에 나올 정도로  말썽이 많은 판정이었다

황동용(좌측)과 트레이너 이영래

 

 박용운과 황동용은 대회가 종결된후 82년 9월13일 선발전을 치러  제1회<시몬 볼리바르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주 엘라 를 비롯해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등 5개국을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명망높은 독립운동가 이름이다 남미 베네주엘라 에서 개최된 이대회는 지난5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쿠바를 비롯해 미국 소련 도미니카등 24개국이 참가한 세계선수권에 준<準> 하는 수준높은 대회였다 박용운은 8강전에서 푸에르 토리코의 <오르티즈>를 맞이하여 불을 품는 타격전 끝에 4ㅡ1 판정승 4강에 올랐지만 기대를 모았던 황동용은 콜롬비아 선수에게  접전 끝에 판정패 탈락했다 박용운은 준결승에서 도미니카의 <코르시노>와 대결 1.2회 우세하게 경기를 이끌다가 3회 체력 열세로 역전패 동메달에 머문다 박용운은 고교 1학년인 1981년 제6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밴텀급 결승에서 전남대표 문성길 <덕인고>을 잡고 올라온 전북의 최주영 <남성고>에 판정승 부산팀 유일한 금메달을 안겨준 동체 시력이 뛰어난 사우스포 였다    

김철호 관장 박용운선수 필자(좌측부터)

 

박용운은 82년 1월 성인무대인  제5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선발전 밴텀급 준결승에서 강성덕(경남대)와 맞대결 2회 카운터 펀치로 한차례 녹다운을 시키며 RSC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가는등 우세하게 경기를 이끌었지만 분패 한다 중요한 사실은 강성덕이 박용운 과의 경기후 입은 데미지<damge>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음 경기에 기권 함으로서 윤영환(동국대)을 꺽고 올라온 김상수(동아대)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듬해인 83년  강성덕은 송광식<청운실고> 신창석<경희대>을 잡고 대통령배 대회에서 국내 페더급 을 평정한후  로마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사우스포 강타자였다 성장통을 겪은 박용운은 82년 김명복배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그해 국가대표 3차선발전에서는 <국산탱크>라 불리는 국가대표 김용호<동아대>마져 잡고 우승을 차지하며 성인무대 까지 접수한다 이후 여세를 몰아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에서 국내복싱 사상 최초로 세계무대를 정복한 간판복서 박기철의 턱밑까지 위협할 정도의 탁월한 기량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83년엔 김명복배 2연패를 달성한후 제2회 세계청소년대회 선발전 마져 우승한 박용운은 플라이급에서 선발된 필자와 첫 인연을 맺는다  

 

그인연은  83년 10월 20일 필자가 황동용과 김의진 김강원 동료들과 전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김철호 관장이 심영자 회장과 함께 설립한  88프로모션의 원년 멤버로 워커힐 합숙소에 입성할 때 박용운도 박광구 최연갑등 동료들과 합류 지속적인 인연이  연결된다 당시 한국체대 유종만 당시 조교가 고교랭킹 1위 박용운을 한국체대에 스카웃하기 위해 워커힐을 친히 방문한다  포스트<post> 박기철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84년 LA 올림픽 선발전을 눈앞에 두고 사연 많은 응어리를 묻은체 박용운의 프로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91년 9월 김광현과 페더급 국내타이틀전을 치루는 좌측의 박용운

 

 이들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복서는 황동용 이었다 62년 전북 군산 태생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성북구청에 있던  박태식 관장이 운영하는 오뚜기 체육관 에서 복싱을 수련 79년 제32회 전국 신인대회 코크급 에서 우승을 차지한 기대주 였지만 관장 박태식이 태릉선수촌에 코치로 입촌하자 곧바로 낙향 군산에서 복싱을 지속하며 82년 5월 대통령배에서 윤석환<대구>을 10월 전국체전 에선 박제석(경기도)을 각각 잡고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83년 2월24일 원주에서 벌어진 제9회 킹스컵 선발전 준결승에서 권채오<한국화약>를 잡으며 1승1패 균형을 맞추며 쾌속행진  그해 4월 한일 국가대항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탄력을 받은 그는  8월 벌어진 제3회 월드컵 대표 선발전 준결승 에서 후에 국제대회 5관왕에 등극하는 서정수<운봉공고ㅡ홍익대>를  결승에선 후에 세계 군인 선수권 금메달을 획득한 성광배(한국체대)를 각각 RSC  제압하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163cm의 신장에 <날다람쥐>라 불린 정도로 빠르고 민첩했으며 무었보다도 파워는 부족했지만  강철체력에 근성이 뛰어난 러씽 파이터였다

 

83년 1월 대뷔전을 치룬  황동용은 당시 국내 랭커인 유명우를 능가하는 복싱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유명우가 속한 대원체육관 김진길 관장이  88프로모션으로 유명우의 트레이드 요청을 위해 삼고초려 (三顧草廬)하며  심영자 회장의 자택인 워커힐 APT 에 찾아와 영입의사를 적극 타진했지만 심회장은 심사숙고 끝에 거절을 하였다  이는 유명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황동용의 복싱자질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반증이다 김진길 관장은 후에 필자에게 선배의 여동생인 심영자 회장에게  당시 무척 서운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유명우는 동아체육관 으로 유턴 챔피언 등극과 함께  명예의전당에 입성 세계적인 복서반열에 선다 그러나 박용운과 황동용은 대뷔초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쓰러지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쓰라린 아픔 경험을 공유했다 가장 먼저 쓰러진 복서는 박용운 이었다 1984년 3월17일 프로대뷔전을 치룬후 그해 6월23일 IBF 챔프 김지원과 무승부를 기록한 필리핀의 리틀 방고얀과 벌인 2차전에서 판정승을 거뒀지만  왼손 손가락에 골절상을 입고 1년 동안 경기를 치루지 못하자 뒤를이어 그해 9월22일엔 4전의 황동룡이  WBC 동급 챔피언 장정구의 2차방어전 파트너였던 당시 WBA 동급 2위인 46전40승(35KO)5패1무를 기록한 멕시코의 강타자 헤르만 토레스와의 벌인 세계 랭킹전 에서  일방적으로 난타 10회 판정승을 거뒀지만 망막부상으로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과 함께 복싱을 접으면서 초창기 88프로모션의 흑역사<黑歷史>의 주인공이 되었다

 

 황동용의 떠난후 그의 트레이닝을 담당했던 이영래 사범은 황동용이 건재했다면 유명우의 챔피언 등극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일 회고했다  박용운 또한  1년후 치룬 요시오카와 치룬 재기전에서 이번엔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골절상을 입고 또다시 6개월간의 공백을 갖게된다 이후 4연승(3ko승)을 거두며 재기의 워밍업을 마쳤지만 무구루마와 치루기로한 동양타이틀이 동료복서인 최연갑에게 넘어갔고 후에 IBF jr페더급 3위에 랭크된 그가 2위였던 파운삭 무앙수린과 타이틀전을 치루기로 잠정합의한 상태에서 IBF 동급 1위였던 이승훈이 WBA.WBC.에 포커스를 맞추다 갑자기 궤도를 수정 다소만만한  IBF 타이틀로 급선회  결국 이승훈이 무앙수린에 9회KO승 하며 타이틀을 가져가면서 박용운은 망연자실 한다

 

84년 8월 필리핀 선수와 국제전을 벌이는 황동용(우측)

 

 이후 12전 12승<6ko>를 기록한 박용운은 돌파구를 찾으러 88년 6월  미국에 원정 3차례 경기를 치러 1승1무1패를 기록했는데 후에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는 헤수스 살루드 와의 경기에서 1ㅡ2 로 15전만에 첫패배를 기록한 것은 뼈 아팠던 경기였다 그의 복싱역사에서 터닝 포인트 였다 이후 수경사가 전격 해체되면서 현역 입대 30개월후 만기 전역한후 10연승<8ko>를 거둔 그는 91년3월 필리핀에 원정 챔피언 사쿠이드를 상대로 동양타이틀전을 치룬다 3회 회심의 어퍼컷 일타가 적중  유혈이 낭자한 상대가 심하게 비틀거리자  3회 KO승을 거둔다  하지만 필리핀측에서 버팅에 의한 가격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주심은 5분후 무판정으로 판정을 번복했고 박용운은 20분동안 링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지만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수 없음을 자각하고 WBC 4위 IBF 동급 2위의 타이틀을  뒤로한체 96년 6월 만32살 30전26승(15KO승) 2패1무 1무판정 을 남기고 링을 떠났다 현재 부산 진구 양정동에서 장정구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는  박용운은 한국복싱연맹 <KBF> 부산지회 사무국장과 프로모터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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