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천 생갈비 대표 김성용과 유명우 챔프(우측)

 

[조영섭의 복싱스토리] 패티김의 <9월의 노래>가 전파를 타고 울려 퍼지는 9월의 초입에서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옴을 느낀다.

이번주 코로나 광풍 여파로 체육관을 휴관한 필자는 모처럼 평일 경기도 광명시로 취재를 나섰다. 주인공은 전직 프로복서로 전 WBA JR 미들급 챔피언 유제두 관장이 운영하는 태양체육관에서 짧은 프로생활 과 트레이너 생활을 접고 요식업계로 진출  탄탄하게 입지를 구축한 김성용 사장이다. 김성용은 71년 전남 신안태생으로 고교 졸업후 챔피언의 꿈을 꾸며 무작정 상경 식당에 취직하면서 와룡체.중앙체. 양광체.등을 전전하며 복싱을 수학했지만 큰 두각을 나나내지 못하고 복싱을 접은 그는 이후 군대를 전역한 93년 태양체육관 소속으로 MBC 신인왕전에 출전했지만 이철형 에게 3회 KO패 당한후 한차례 더 경기를 치뤘지만 또다.시 패하자 유제두 관장의 지시에 의해 트레이너로 활약한다.

83년 구로구 독산동에 설립한  태양 체육관은 유제두 관장 휘하에서 IBF Jr 페더급 세계챔피언 장태일을 비롯해 WBC 라이트 플라이급 인터 네셔날 챔피언 양상익.동양 웰터급 타이틀을 12차례방어에 성공했던 동양의 쿠에바스 박정오 와 PABA 웰터급 챔피언 박환영.OPBF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장영순 .OPBF 플라이급 챔피언 정선용과 차남훈.OPBF 주니어 라이트급 챔피언 김성윤.국내 밴텀급과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을 지낸 나치오 와 송성운.페더급 강타자 출신인 최응산과 김오남. 그리고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송유남 정경배(수원대)와 황이태(한국체대)등 한국복싱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형선수들이 많이 베출 된 명문체육관이다.

호천 생갈비 대표 김성용 사장

 

이곳에서 박환영과 황이태를 직접조련 아마츄어 전국신인 선수권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합작 스승인 유제두 관장에게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성용은 이후 박환영이 <용인대> 에 진학한후 프로에 전향  유망주 반열에 올라서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황이태는 당시 필자가 소속된 서울체고에 진학 이후 전국선수권을 재패하면서 <한국체대>에 진학을 했다. 김성용은  98년 5월1일 태국의 칸차나 부리에서 벌어진 WBC 플라이급 챔피언 차차이 사사쿨에 도전한 장영순의 보조 트레이너로 유제두 관장과 동행했지만 허망하게 5회KO패를 당하자 복싱은 내가 갈길이 아니란 생각에 트레이너 생활을 접고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방향전환을 한다. 돌아가야 할때는 돌아가는게 진보<進步>다. 그가 다시 식당에 종업원으로 취직 밑바닥부터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때 그때 그의 나이 28살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는 마포와 하남등 유명한 고깃집을 전전하며 고기맛을 내는 노하우를 심혈을 기울여 집중분석하며 체득을 하던 어느날 지금의 아내인 김봉옥 여사 를 새천년에 천둥치는 운명처럼 만나면서 그의 인생에서 변곡점<變曲點>을 맞이한다.

이오까와 대결하는 유명우챔프(우측)

 

두 사람이 합심하면 쇠도 끊는다.는 말처럼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의지하면서 비로소 인생에서 상승곡선이 펼쳐지기 시작한 2006년도에  광명 시에 의욕적으로 식당을 차린다. 하지만 성경말씀 처럼 시작은 미비했다.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한 그는 2010년도엔 은행대출을 비롯 지인들에게 총 1억2천의 빚을 얻어 광명역 인근에 <호천 생갈비>집을 차리고 마지막 승부구를 던졌다. 그는 평소 존경하는 한국복싱에 살아있는 전설 유명우가 타이틀을 상실 한후 337일만에 전열을 재정비해 타이틀을 재 탈환한 영광을 교훈삼아 자신도 복싱에서 찬란하게 꽃피우지 못한 미련과 아쉬움을 사업을 통해 유명우 챔프 처럼 만회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에 품었다.

그에 말을 듣자 문득  1991년 12월 17일 이오까와 일본 원정경기에서 치룬 18차 방어전 에서  무려 6년9일만에 WBA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을 상실하고 운둔 생활하던 유명우가 고토회복<故土回復>을 외치며  9개월 만에 당시 필자가 사범으로 근무하던 88체육관에 출현한 유명우 챔프가 생각난다..당시 왠 씨름선수가 왔냐고 농을 할 정도로 당시 유명우의 몸은 비대해지고 근육은 느슨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며칠후 다시 나타나 진윤언 과  스파링을 하는데 역시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수 없다는 말처럼 그의 펀치는 마치 수영선수처럼 각없이 휘젓는 펀치로 일관했고 방전된 체력은 연체동물처럼 탄력이 없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말처럼 그의 시대는 저물었고 역시 재기는 힘들 것 이라 현장에 있는 필자는 관측했다. 무엇보다도 유명우의 비관적 으로본 첫 번째 이유는 <이오까>라는 장벽을 뛰어넘기 이전에 10kg 이상을 감량해야하는 체중조절 이란 <높은장벽>을 상대하기가 마치 나폴레옹 병력이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 만큼 이나 힘든 여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 김봉옥 여사와 김성용 대표

 

생각해 보라 탄력을 받으며 힘차게 달리던 철마가 한동안 정체 된후 다.시 시동을 걸고 재출발 한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김성용은 이런 유명우에 대해 필자에게 그의 위대한 업적을 평가해 달라 묻길래  국내 최다. 연승 기록인 36연승 기록에 통산18차방어. 세계타이틀 최다.KO승 10회. 통산 세계타이틀전 최다.기록 21회.와 더불어 명예의 전당 입성 등 유명우의 화려한 프로필을 나열하자 김성용은 이런 명시된 가시적인 결과보다는 유명우선배가 39전을 싸우면서 단 한 차례도 계체량에 실패한 적이 없고 역시 단 한차례의 다운도 당한 적이 없는 유명우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했다.

야구로 말하면 홈런왕 출신의 금자탑을 쌓은 이승엽 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최형우 같은 <출루율상>에 비중을 둔 그의 혜안에 필자는 깜짝 놀랐다. 김성용은 유명우 처럼 성실함을 사업 성공의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불도자 처럼 우직하게 밀고 나간 것이다. 음식맛 못지않게 홍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숙지한 그는 다각적으로 마케팅 홍보 전략을 펼치며 연중무휴로 식당을 운영하면서 4년간 <물음표> 라는 의문부호가 붙었지만 굴치않고 무쏘의 뿔처럼 전진한 결과 시나브로 고객들에게 <느낌표>로 전환되면서 5년차부터 주말이면 줄을 서서 손님들이 기다.릴 정도로 번창 억대연봉에 진입한 사업가로 변신 내집 마련에도 성공했다. 앞으로 김성용 대표는 10년정도 사업을 진행시키면서 목표한 30억이 달성되면 식당영업을 접을 생각이라고 장래포부를 밝혔다. 요즘은 한우물만 파서는 안된다. 생존경쟁에 살아 남으려면 철저히 유틸리티<utility>플레이어가 되어야 살아남음을 김성용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다. 

WBA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유명우

 

식도락가인 유명우 챔프는 이곳에서 간판메뉴인 <생갈비>를 먹으면서 복싱은 내가 챔피언이지만 음식솜씨는 우리 김사장이 최고야 라고 덕담을 하며 건배를 제의한다. 바다 위에 3년이란 일본속담이 있다. 세상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해낸 사람은 알아줘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런 축척된 힘을 보유한 사람을 고수라 일컫는다. 한국 복싱 역사의 파도위에 산처럼 우뚝솟은  유명우 챔프나 사업가로 입지를 견고하게 구축한 김성용 대표 역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창조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밑바닥부터 노력으로 정상을 타고 올라간 공통분모가 있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절박함과 간절함이 묻어나야 성공한다. 자서전이 될 만한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이세상에 태어 났을땐 손톱자국 같은 흔적이라도 남기고 떠나야한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주요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