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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훈 감독과 김왕순 선수

 

[조영섭의 복싱스토리] 지난 금요일 필자는 서울 백병원 업무과에 근무하는 아시안게임 복싱 2연패의 금자탑을 달성한 이해정 과장과 함께 지난1월 제12대 대전복싱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한정훈 현 <대전대 감독>을 취재하려 대전으로 향했다. 

한정훈 회장은 한국체대 복싱선수 출신으로 1987년 대전체고 복싱부 코치로 입문한후 첫해부터 발군의 지도력을 발휘 최재기 최인수 이승언 김승석이 고교무대를 평정하며 탄탄한 입지를 구축, 이를 발판으로 89년도엔 <대전 중구청>을 91년도엔 <대전대학> 복싱부를 연달아 창단 <복싱 볼모지> 대전복싱의 활로가 크게 열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는 초지일관 선수양성에 몰입 고지수 김왕순 김승택 신은철 임재환 김태규 송인준 최진우 이경렬 백종섭 양현태 이경렬 임현식 임현철 홍인기 조세형 등 20명의 역대급 복서들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쉼없이 베출 <국가대표 제조기>로 명성을 날리며 입지를 구축했고 현재는 60Kg급 <고성훈>이 한국복싱의 샛별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한정훈감독, 이해정, 김왕순 체육부 차장(좌측부터)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엄지손에 굳은살이 박힌자 만이 식탁의 상석에 앉을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명언처럼  한정훈 회장은 30대에 최연소 <대한복싱협회> 이사진에 합류한후 이후 제 18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표팀 감독을 비롯 제 27회 카잔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코우치 한국복싱협회 부회장 대전 체육육성 심의의원등 전천후로 활약 현재 대전복싱협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입지전적 <立志傳的인> 인 인물이다. 한정훈 회장과 필자는 잊을수 없는 추억을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89년 지도경력 3년차의 당시 대전체고 한정훈 코치와 용산공고 1년차 코치로 재직하고 있던 필자는 그해 6월 학생 선수권대회에서 <코크급 준결승>에서 첫 맞대결을 벌였다. 당시 용산공고 1학년인 최요삼과 대전체고1학년 신은철과의 경기는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마치 알리와 프레이져의 경기처럼 치열한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5ㅡ0 신은철의 판정승이었다. 특히 3회전에서 신은철이 최요삼 에게 라이트 어퍼컷을 때리는 장면은 앞권이었다. 비록 적군이었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최요삼은 후에 프로로 돌아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 한국 프로복싱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신은철은 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게임<페더급>에서는 선발전에서 우승하고도 간염으로 불참했지만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 출전 8강에 진출했고 97년 헝가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16강에서 <세계랭킹 1위>인 쿠바의 하비에르 알바레스를 잡고 8강에 올라 부시노프(카자흐 스탄)을 13ㅡ6 으로 잡고 세계선수권사상 8번째 메달을 획득한 주인공으로 탄생하면서 1997년 대한복싱협회 최우수복서로 선정된다. 당시 최우수 신인상은 정희조 정창구 두 지도자가 투톱으로 일궈낸 <대구 성서공고> 이상호가 받았다. 신은철 은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태국의 워앙 웨사스에게 지독한 텃세에 밀려 판정패를 동메달에 머물렀지만 <한정훈 사단>의 선두주자로 90년대 한국 복싱을 대표하는 간판복서였다.

아틀란타 올림픽 페더급 신은철 경기장면(좌측)

 

90년 제1회 회장배 대회에서는 대전체고는 고지수<밴텀급>, 이재현<라이트 웰터급>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고지수는 5전전승<4KO승>을 기록 최우수상을 받으며 그해 4관왕을 차지했고 후에 국가대표로 발탁 92년 95년 서울컵<페더급>에서 2연패에 성공했다. 92년 12월엔 대표선발전서 대전체고 3학년 <임재환>이 이태훈<한국체대>에 12ㅡ3 으로 꺽고 대표팀에 발탁 한정훈 감독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줬다. 임재환은 그해 10월 전국체전에서 후에 WBC 페더급 투타임 챔피언에 등극하는 지인진<당시 당곡고>를 잡고 금메달을 획득하며 대전대에 진학한후 이후 각종 국제대회에서 신은철과 쌍두마차를 형성하며 한정훈사단의 핵심 멤버로 한축을 담당했다. 1997년 11월27일 홍수환 타이틀획득 20주년에 벌어진 국가대표 선발전이 생각난다. 당시 <한정훈 사단>의 핵심멤버들인 김태규(플라이급) 임재환(밴텀급) 신은철(라이트급) 송인준(웰터급)등이 4체급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최진우(플라이급) 박재갑(페더급) 장형욱(미들급)이 3체급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기염을 토했다. 99년과 2000년엔 전국체전에서 무려 7개의 금메달을 걷어 올리며  중원에 위치한 도시답게 한국복싱의 중추적일 역할을 했다. 이렇듯 33년간 걸어온 그의 이력을 펼치면 차고 넘친다.

한정훈은 62년 6월22일 충남 대덕구 출신이다. 대덕구는 만해 한용운. 성균관대 설립자이신 <심산 김창숙> 과 더불어 (三節士)로 불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탄생지이다.. 78년 한정훈은 대전종합 체육관 김종태 관장 문하에서 복싱을 수학한다. 이체육관은 두체급 프로복싱 챔피언 이열우를 비롯해 오인석, 박일규, 지택림, 임영재, 이상은 등 명망높은 복서들을 배출한 체육관으로 한정훈은 계룡공고 2학년때인 79년 제60회 전국체육대회 코크급에서 1회전에서 장관호(서울)와 치열한 접전을 펼친 끝에  판정승을 거둔 후 결승에서 제1회 한중 교환경기에 출전한 김종옥<성남 성일고>을 잡고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금메달을 획득한다.

 

대전대학교 복싱부와 한정훈감독(뒷줄 우측에서 2번째)

 

한정훈에 완패한 김종옥은 80년 제4회 김명복배<코크급> 준결승에서 허영모(순천 금당고)에 판정승을 거둔 실력파로 결승에서 윤봉기(원주 대성고)를 잡고 올라온 최점환(경주상고)에 패했지만 이듬해 국가대표로 발탁 제1회 마르코스 배에서 젠센 켈즈(덴마크)를 꺽고 동메달을 획득한후 연달아 킹스컵 에도 출전한 강적이었다. 한정훈은 발레리나처럼 율동적인 스텝에 의한 죽창처럼 날카로운 스트레이트 카운터가 뛰어난 복서였다. 이주특기로 한정훈은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홍진호(육군)에게 패했지만 <최종선발전>에선 선전분투한 정상이 참작되어 선발된어 첫판에 홍동식에 접전 끝에 패했지만 고교생이 올림픽 선발전에서 홍진호 홍동식 과 간판복서들과 대등한 경기력을 보인 자체만으로 큰 성과였다. 이후 한정훈은 83년 대통령배 밴텀급 준결승에서 문성길과 초접전을 펼쳤던 오종서(용인대)를 비롯해 프로로 돌아 82년 6월 시오니.카르포와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랭킹전을 벌였던 유망주 장수곤(청운실고), 꿈나무 출신의 윤승희(경희대), 81년 62회 전국체전 페더급 결승에서 성두호(전남)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최태영 (예산 중앙고)등을 잡으며 60회 전국체전 금메달에 이어 30회 학생선수권과 제8회 김명복배를 연달아 우승하며 3관왕을 달성 82년 한국체대에 진학한다.

한정훈은 한국체대에 진학한후 4년 연속 전국체전 결승에 올랐으나 허영모 한선수 에게 내리 3연패를 당함을 물론 각종 대표선발전에서도 암초처럼 나타난 그에게 연패를 당하며 상승세에 제동이 걸린다. 한정훈이 꺽은 김종옥 에게 완패를 당한 허영모가 한정훈 에겐 역으로 먹이사슬의 상위 포식자로 변신한 것이다. 결국 한정훈은 단한번의  태극마크도 한번 달지 못한체 현역에서 은퇴를 한다. 대학 졸업후 한정훈의 인생 2회전이 펼쳐진다. 87년 만25세에 대전체고 코치로 입성 33년 동안 복싱울타리에서 화려한 족적을 남긴 것이다. 미당 서정주가 자신을 키운건 8할이 바람이라 했지만 한정훈을 키운 역설적으로 8할이 허영모 였다. 지난번에도 필자가 언급했듯이 인생을 길게 보면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게 되어있다. 허영모에 당한 쓰라린 패배가 선수생활 땐 <걸림돌>으로 작용했지만 지도자로 변신 해서는 강한 승부욕을 자극하는 <디딤돌> 로 탈바꿈 강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한 원천으로 작용 말단 <末端> 이등병에서  출발 복싱판에서 <장성>대열에 합류한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대전복싱협회 한정훈회장

 

필자 역시  한정훈 감독과는 최요삼의 참패 이후 이어진 2차례 트라우마가 가슴에 묻혀있다. 용산공고에 근무하던 92년 당시 학생선수권대회 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했는데 대전대 한정훈 감독은 코크급에서 2관왕을 차지한 임계룡을 스카웃하기 위해 필자에게 의사를 타진했지만 이미 동아대로 진학이 결정되어 난색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꿩대신 닭이란 말처럼 한정훈감독은 서울체고를 졸업한  B급 대회 우승자인 강인용을 스카웃을 해 갔는데 다음해 선수권대회에서 강인용 (대전대)은 임계룡(동아대)과 맞대결 첫회부터 난타전을 벌여 결국 임계룡에 2회 RSC 승을 거두었다.  2000년 전국체전에서는 1999년 서울체고 에 근무중인 필자가 <국나남> 이란 복서를 양성 이옥성(경남체고)과 홍문원 (원주대성고) 에 4연승을 거두면서 3관왕을 만들면서 한국체대에 진학시켰지만 전국체전 첫경기에 맞대결한 복서가 대전대학 이경렬 이었다. 열띤 타격전 끝에 1포인트 차로 승부가 기울자 상심한 국나남은 그경기를 끝으로 아마복싱을 접고 말았다. 한정훈 감독은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97년 대전중구청 소속의 <김민기> 선수가 슈퍼 헤비급으로 출전 95년 서울컵 슈퍼 헤비급 금메달 리스트인 안정현(나주군청)과 과 91년 세계선수권<호주 시드니> 헤비급 동메달 리스트인 채성배<호남대>를 연달아 누르고 결승에 올라 88서울 올림픽 금메달 백현만을 4회 RSC로 잡고 우승한 경기를 꼽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옥태 회장이 1백만원 건내며 격려해준 그때 그경기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정훈 회장은 낙반사고로 굴속에 갇힌 광부가 목슴을 걸고 살아 남기위해 생사를 걸고 처절하게 곡괭이를 휘두르듯이 그렇게 글을 썼다는 발자크의 어록처럼 선수들을 지도에 심혈을 기울여 처절한 서바이벌<Survival> 게임에서 생존한 인물이다. 세상은 공짜는 없다. 인생은 인과응보 자승자박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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